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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칭푸르 Aug 21. 2023

연애는 체질이 아니라서

1화. 우체국 택배박스 5호

우체국 택배박스 5호.

그녀와 보낸 2년이란 시간의 정리공간.

48cm X 38cm X 34cm

그녀와의 사이에 남은 기억의 크기.

그건 겨우 택배 박스 하나...


**********


- 달그락달그락 -

"음... 이건 버리고, 이것도 버리고... 이건... 흠..."

일요일 늦은 오후... 

남들은 낮잠을 자거나, 영화를 보는 등 여유롭게 보내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이 남자 승현은 그렇지 못했다. 

자신의 집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뭔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승현.

마치 이삿짐을 싸는 것처럼, 그의 방과 거실은 사방에 널브러진 온갖 짐과 잡동사니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것도 버리고, 이건... 아 이건 내 것이구나! 그리고 이건..."

".........."

분주히 짐을 정리하던 승현은 갑자기 심난해진 듯 한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 내가 지금 대체 이걸 왜 하고 있는 건지..."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가 정리하고 있는 짐은 떠나간 그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헤어진 지 벌써 11개월 하고 17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의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보관해 왔지만...

더 이상 지속했다간 삶이 통째로 망가져버릴까 봐...

찌질하게 1년은 넘기고 싶지 않아서, 마침내 정리하기로 결심한 승현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승현은 이내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아! 이것... 도 있었네?"

화장실 선반에는 그녀가 쓰던 머리끈이,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마지막으로 그녀가 놓았던 그 위치에, 

'여전히'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늘 같은 곳에 놓여 있었음이 분명한 머리끈임에도, 버리자고 생각하고 나서야 의식을 하게 되다니...

그건 익숙함에서 비롯된 무관심이었는지...? 

아니면 최근 들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 그녀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언제부터인가 정말로 머리끈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건지?

알 수도 없었지만, 이젠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하하... 이렇게 선반 문만 열면 바로 보이는데 말이야..."

잠시 서서 생각에 잠긴다.

2년간의 동거생활.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

그것이 사실 그녀의 외도로 인한 것이었단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얼마나 분노했었던가?

너 같이 나쁜 여자는 잊고 진짜 좋은 사람 만날 거라고 그 얼마나 다짐을 했었는지...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하고, 지난 1년 동안 해댄 수많은 뻘짓들!

그녀를 붙잡기 위해... 그녀를 잊지 못해...

그녀를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하면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고...

힘들어하고... 후회하고... 또 술 마시고... 연락하고...

대체 그녀를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건지... 그녀에게 연락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건지...

그런, 자신의 감정조차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속은 엉망이 되었고...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왜 그랬어...?'

분노와 원망이 마구 뒤섞여 힘들어하던 나날들!

그래도 처음에는 좋았었지.

그녀도 함께 슬퍼하며 힘들어해 주었으니까...

전화도... 문자도...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어.'


**********


- 헤어진 후 한 달 -

'오빠... 미안해... 나도 마음이 아파... 나 같이 나쁜 여자는 잊고 오빠도 오빠 인생 찾아...'


- 3개월 -

'이제 그만해... 나 오빠 때문에 너무 힘들어...'


- 6개월 -

'다신 연락 안 했으면 좋겠어! 그만큼 받아줬으면, 나도 오빠한테 충분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


- 10개월 -

'이 미친 XX야! 차단하니까 이제 남의 전화로 연락하냐? 그만 안 하면 신고해 버린다!'


**********


'그래...'

'사실 그렇게 욕을 먹었으면 정신 차릴 만도 했는데, 결국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

적당히 했어야 하는데...

그는 왜 그렇게까지, 유독 그녀에게 집착을 했을까?

'그녀 이전에도 몇 번의 이별은 했었잖아?'

첫 동거여서?

그녀의 외도로 헤어져서?

마음이 아파서?

억울해서?

그 마음이 무엇이었든 간에 결과적으로 그는, 그녀에게 온갖 민폐를 다 끼친 존재가 되었고, 둘 사이에 더 이상 남은 좋은 추억 따윈 없었다.

'그래... 이제 그만하자! 나를 위해서!'

승현은 다시 한번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아 본다. 

"이게 마지막인가?"

마지막으로 그녀의 화장품을 챙겨 넣은 승현. 

"버릴 것 버리고 나니, 너의 기억은 딱 이 정도구나...! 우체국 택배박스 5호..."

택배박스 속 잘 정리된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복잡한 심정이 들었지만, 머리를 흔들며 테이프로 박스를 밀봉했다.

- 찍, 찍찌익, 찌이익, 탁 -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포장은 했는데... 이걸 막상 보내주자니, 1년이나 그 난리를 쳐놓고, 결국 마지막까지 미련을 놓지 못한 자신을 들키는 것 같아 너무 x팔리고...

"그렇다고 이걸 버리기에도 애매하고..."

"흐음..."

사실, 그가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이었다.

값비싼 물건도 없었고... 

대부분이 그녀의 옷가지에 화장품들...

'그러고 보니 아끼던 명품들은 진작에 챙겨서 가버렸었지...'

심지어, 자신을 버리고 외도한 그 남자와 계속해서 만남을 가진 그녀였다.

'그런 것을... 행여 다시 돌아올까 은근히 기대하며 기다린 똥멍청이...'

게다가 최근에는 그와 곧 결혼할 거란 소식까지 들려왔다.

'그래... 미련은 버리자. 미련은...'

갑자기 우울해져 한참을 멍하니 넋 놓고 있던 그는, 다시 한번 박스 속 물건들을 꺼내어 보며, 이제 곧 영원히 사라질 그녀와의 최후의 끈을 놓을 준비를 했다.

"이게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입었던 티셔츠고, 이건 혜림이가 헤어지기 전까지 썼던 칫솔... 그리고 이건..."

"후우..."

한동안 영혼 없는 표정으로 박스를 바라보던 승현은 이내 뭔가 복받쳐 오른 듯 오열하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 나쁜X! X같은 X! 미친X!"

"으흑흑 꺽꺽꺽..."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으허어엉..."

징그럽게 예쁜 놀이 스며든 작은 빌라 거실에서, 흰 러닝셔츠에 반바지만 입은 서른셋의 남자는 온 동네가 떠나갈 듯 흐느껴 울었다.

"으흐억... 흑흑... 키힝..."

얼마나 울었을까?

갑자기 승현은 흐느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아니지! 이건 아니지!"

"내가 왜? 어째서 그따위 여자 때문에 슬퍼해야 해?"

"내가 뭐가 못나서? 얼굴 준수하지? 직업 좋지?"

"심지어, 처음에 사귀자고 한 것도 내가 아니라 그X이잖아?"

"억울해! 너무 억울해! 억울해~~~~~"

"그래! 복수다! 복수를 하는 거야!"

"그X이 알게 된다면 정말 화나고 짜증이 날 그런 복수를..."

갑자기 뭔가 결심한 듯, 승현은 그녀의 물건이 담긴 박스를 거칠게 뒤집었다.

와르르 쏟아져내리는 그녀와의 추억들...

"와하하하하하"

"그래! 네 칫솔로는 변기를 닦아주겠어!"

"그럼 넌 변기와 칫솔을 공유한 여자가 되는 거지! 와하하하하하!"

"네 팬티는 우리 집 걸레로 쓸 거야!"

"네 브래지어는 잘 때 눈가리개로 써주지!"

승현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으며 그녀의 물건들을 마구마구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와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하하하... 하하..."

".........."

"휴우..."

한참 물건을 던지며 난동을 부리던 승현은 이내 체념한 듯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소용이람... 바보같이 나만 혼자서..."

"그래... 행복하다는데..."

"하나라도 행복하면 좋지..."

"까짓것 아름답게 보내주자!"

"잘 살아라 정혜림! 사랑했다!"

마침내 모든 미련을 버린 듯 마음이 편안해진 승현.

그렇다... 그런 그에게도 언젠가 좋은 인연이 찾아오겠지.

힘내라 노승현! 파이팅 노승현!


**********


그로부터 1주일 뒤 혜림의 집.

- 띵동 -

"택배 왔어요!"

"네~~"

택배를 받은 이는 혜림의 엄마였다.

"아이고! 이게 뭐야? 누가 택배를 보냈대?"

"노... 승현? 하! 또 이 녀석이네! 얘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승현의 이름을 본 혜림의 엄마는 바로 혜림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혜림아!"

"응 엄마!"

"그 인간... 승현이한테 택배가 왔는데...? 어떻게 할까?"

"뭐? 그 인간이 또? 이번엔 뭔데?"

"몰라, 상자가 꽤 크네?"

"아 짜증나게 뭘 또 보냈대? 한번 열어봐 엄마!"

"내가?"

"응, 괜찮아!"

"그래... 잠깐만...!"

- 찌이익 -

"가만 보자... 뭐야? 편지도 있고... 이건... 옷이랑 속옷... 화장품... 너 쓰던 물건들인가 보다 얘!"

"아... 징그럽다 징그러워! 엄마, 미안한데... 분리수거해서 좀 버려줘 엄마!"

"잠깐만 얘... 아... 편지... 도 있는데? 이건 어쩔까?"

"편지? 그냥 같이 버려, 엄마! 또 이상한 내용 쓰여 있겠지!"

"그래...? 그럼 엄마가 다 알아서 버릴게!"

"어! 엄마 부탁해!"


**********


한편, 승현이 그녀에게 보낸 택배박스 속, 

결국 그녀에게 전해지지 못한, 

그의 진심이 담긴 애절한 편지 내용은...

- 사랑하는 혜림아 -

이 편지를 받을 때쯤엔 넌 아마 결혼준비로 바쁠지도 모르겠구나?

결혼할 만큼 좋은 사람을 만났다니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너의 물건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많이 하다가...

그래도 너와의 소중한 추억이 담겨있기에 조심스럽게 챙겨서 너에게 보낸다.

이번에... 너의 물건들을 챙기면서, 

네가 내게 얼마나 특별한 여자였는지 다시 한번 알 수 있었어. 

비록 우리의 끝은 이렇지만, 너를 향한 내 마음만은 진심이었음을 알아주면 좋겠어...

사랑하는 혜림아! 

나의 혜림아!

(* 이 문장은 눈물자국으로 번져있다)

그래서 어쨌고...

하지만 그랬고...


..........

..........

..........

(중간 생략)

안녕... 내 사랑...


-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세상에서 널 가장 사랑하는 남자가... -

PS : 혹시라도, 청첩장은 보내지 말았으면 좋겠어. 다른 남자의 신부가 되어 눈부시게 빛날 너를 볼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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