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까다로운 여자
언제부터일까?
내가 괜찮다는데, 내 나이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과,
그들의 고마운 오지랖 덕분에,
그들이 좋다는 사람들을 하나둘 소개받다 보니
어느새 난 까다로운 여자가 되어 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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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옥이요?"
"이야~! 제가 좋아하는 홍콩 배우랑 이름이 똑같네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하하하..."
남자는 방금 던진 멘트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호텔 커피숍이 떠나갈 듯 커다란 소리로 웃었다.
그런 그의 앞에서 무척 예의 바른 느낌의 웃음을 지어 보이는 여자, 장만옥.
"네... 장만옥...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아버님이, 그... 홍콩영화 팬이셨나 봐요?"
"네? 아... 뭐 그렇죠..."
그가 툭툭 던져대는 이야기에, 눈은 웃고 있었지만 사실 만옥은 지금 이 시간이 너무나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또, 이름 가지고 시작하는 같은 주제에 같은 이야기...')
사실 이 자리는 그녀가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모의 등살에 떠밀려 나온 선자리일뿐이었다.
알고 보니 털털한 재벌 2세였다던가, 출생의 비밀을 떠안은 고독한 미남이라던가... 그런 드라마 같은 상대를 기대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적당히' 괜찮으면, 기왕 나온 김에 오늘만은 '적당히' 타협을 하리라 굳게 마음먹고 선자리에 나온 그녀였지만.
그래도 역시 '마음'이 안 가는 건 만옥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친구들에게는 기대 안 한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나름 머리도 하고, 옷도 새로 맞춰 입고 나왔는데...
어쨌거나 입구에서 열심히 옷매무새도 고치며, 기대 아닌 기대를 했던 만옥이었다.
그녀의 나이 서른둘...
사실 그녀는 스스로 결혼이 정말 하고 싶은지 어떤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니, 알지 못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어쩌다 보니 수년을 만난 사람과 헤어지게 되었고...
그와는 자연스레 결혼을 하게 될 거라 생각해 왔던 그녀였기에, 지금... 원치 않게 주변에서 걱정을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너랑 나이차이가 좀 있긴 한데... 워낙 조건도 괜찮고..."
"또, 사람이 그렇게 성실하다지 뭐니!"
불현듯 며칠 전 이모와의 대화가 떠오른 만옥.
"그래?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있어?"
"그렇다니까!"
"아니 이모! 그럼... 그렇게 좋은 사람이 왜 여태 결혼은 안 했대?"
"그... 그게, 자기가 결혼할 마음이 없었나 보더라고."
"흥... 그래?"
"그런데 갑자기 결혼할 마음이 생긴 거야?"
"뭐... 때가 되었다고 느꼈나 보지."
"그래? 계속 선을 보는데도 아직 못 만난 건 아니고?"
"아우! 얘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주변에서 그렇다니까 나도 그렇구나 하는 거지... 아무튼 다른 소리 하지 말고 이모 믿고 한번 보기나 해!"
"애가 참 괜찮아!"
"애...? 가...?"
"<애가> 라니? 이모, 혹시 아는 사람이야?"
"아... 아니야!"
"정말 아니야?"
"아우 얘! 아니라면 아닌 줄 알아! 아무튼 그쪽이랑 이야기 다 해놓았으니까... 너 이렇게 좋은 사람 또 만나기 힘들다!"
"그러니까, 다른 말하지 말고 그냥 한번 만나봐!"
"적당히 괜찮다 싶으면 너무 따지지 말고, 그냥 날 잡아서 결혼하는 방향으로 생각해 보는것도 좋고!"
그랬었는데...
역시, 이모를 믿는 게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선자리에 나온 이 남자는, 이모 아들! 그러니까 만옥의 사촌오빠의 친구였던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마음에 들면 자기 딸이나 소개해 줄 것이지? 왜 애꿎은 나한테 소개를 한 거야? 부탁한 적도 없는데.'
그랬다.
이모가 그렇게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이모 아들의 친구는, 아무리 '적당히 타협'을 하려고 해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그런... 그러니까, 만옥의 타입이 '전혀' 아니었다.
심하게 나온 '배'도... 그럼에도, 몸에 '딱 달라붙게' 차려입은 패션센스도... '커다란' 금목걸이도... 한지 얼마 안 되는 듯 보이는 '어색한' 눈썹문신도... 끊임없이 날려대는 '아재개그'도...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만옥의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아홉 살 차이...
만옥은 평소 사람을 만나는데 숫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전혀 해본 적이 없었지만, 오늘만은 그 숫자의 갭이 유난히 크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렇게 아름다운 사촌동생이 있으면서. 왜 그동안 소개를 안 시켜줬지? 병길이 그 자식도 참..."
"아니야... 어쩌면 말이죠... 오히려 오늘 이렇게 만난 것이 더 운명적인 걸까요? 만날 사람은 꼭 만나게 된다는 그런? 하하하!"
"아... 예..."
('이 상황이 운명적? 사촌이라고 하지만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닌 사촌 오빠의 친구를 그 엄마의 강요로 만나는 게?')
하지만 그런 만옥의 생각을 알리 없는 맞선남은 계속해서 위험한 마이웨이를 시전 했다.
"우리... 시간도 늦었는데... 식사나 하러 가실까요?"
('하... 역시 밥을 먹자고 하는구나...')
"예... 뭐, 좋은 대로 하세요."
"만옥씨는 뭐가 좋으세요?"
"전, 아무거나 다 좋아요..."
"아무거나 다 좋으시다...? 그럴 리가요?"
"네?"
"제 생각에는 말이죠... 만옥씨는 아무래도 홍콩분이니까, 역시 짜장면?! 하하하하"
"아... 네... 짜장면 좋아해요."
('더욱더 격렬히 집에 가고 싶다.')
"에이, 만옥씨도 순진하시긴! 아무리 그래도, 제가 처음 뵌 건데 설마 짜장면을 사드리겠어요?"
"네? 저, 짜장면 괜찮은데... 요?"
"어허! 저 그렇게 쪼잔한 남자 아닙니다! 당. 연. 히. <탕수육>도 사드려야죠!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자신의 개그가 마음에 들었는지, 유난히 큰 소리로 웃는 남자.
"아... 하하하... 하하... 전 다 좋으니까 편한 대로 하세요."
('그냥 대충, 빨리 먹고 집에 가자!')
"그럴까요?
"그럼... 짜장면 말고, 밥도 먹고 술도 한잔 하게 이자카야 어떠세요? 마침 제가 잘 가는 분위기 좋은 이자카야가 있는데!"
('뭐? 술까지 마시자고?')
"아... 죄송한데, 전 술을 전혀 못해서..."
('오늘 술이 무지하게 당기긴 하네요! 너 때문에...')
"괜찮아요! 술은 제가 마실테니 만옥씨는 식사하세요."
"그래도, 죄송해서..."
('너랑은 안 마시겠다고!!!')
"아닙니다. 제가 또 술을 마시면 지금보다 훨씬 재미있어지거든요!"
('술 마시면 지금보다 더 심해지겠구나...')
"네... 그럼... 이자카야로 가요."
"그럼 사케는 좋은 걸로 제가 사케요! 스시는 만옥씨가 돈을 좀 스시지요! 핫하하하하하하하하!"
"아하하..."
('아... 이런 님의 시바견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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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술자리를 마치고, 굳이 괜찮다는데 대리운전으로 집까지 데려다준 맞선남을 보낸 만옥은, 집으로 들어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 털썩 -
"아 피곤해... 오늘은 정말 역대급으로 힘들었다..."
- 지잉 지잉 -
순간 울리는 전화벨!
"이모겠네... 뻔하지 뭐..."
아니나 다를까, 이모의 전화였다.
('아... 귀찮아...')
"어, 이모..."
"넌 끝났으면 바로 이모한테 보고를 해야지! 아니, 이모한테 전화하는 것도 잊을 만큼 좋았던 거야?"
('하... 그걸 지금 말이라고...')
"이모, 미안한데 내가 좀 피곤해서... 내일 이야기하면 안 될까?"
"얘? 사람 괜찮지 않아? 안 그래도 너 마음에 든다면서, 고맙다고 바로 전화 왔다더라!"
"그게... 이모 말대로 사람은 좋은데... 내 타입은 아니네... 미안하지만 병길이 오빠한테 그렇게 전해줘 이모."
"얘가? 그게 말이야 방구야? 넌 무슨 애가 그렇게 까다롭니? 네 나이를 생각해 얘! 너 그렇게 재다가 시집 못 간다!"
"그런 사람 다시 만나기 힘드니까! 이모 말 믿고 몇 번만 더 만나봐!"
('아...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이모! 있잖아...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면 나 말고 이모 딸 소개해주면 좋겠네?"
"미경이한테 소개해줘! 저번에 보니까, 미경이도 결혼 정말 하고 싶어 하더라! 아주, 딱이네! 딱이야!"
"아우, 얘는... 미경이는 아직 어리잖니?"
"이모! 그게 말이야 막걸리야? 이모 딸 미경이, 나랑 겨우 한 살 차이잖아?"
"그... 그랬나?"
"그래! 나 서른둘, 미경이 서른 하나!"
('설마 몰랐을 리가 있나...')
"아우, 몰라 애! 됐으니까! 아무튼 긴소리 하지 말고, 몇 번만 더 만나봐! 이모는 그렇게 알고 전달할게? 그럼 끊는다!"
"싫어! 이모? 이모? 이모! 이모?!!!!"
('아 싫다니까...')
"뻔하네...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일 거고... 자기 딸한테 소개해줄 정도로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나한테 떠 넘긴 거겠지... 그것도 자기가 나서서, 상대방이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오지랖으로 소개해준다고 했을 거고..."
"아... 피곤하다, 정말..."
- 지잉 지잉 -
때맞춰 맞선남으로부터 장문의 문자가 왔지만, 만옥은 읽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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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옥에게 보낸 맞선남의 문자 내용은...
'홍콩 여배우 장만옥보다 더 이쁜 장만옥씨! 당신의 주윤발 김진욱입니다. ㅎㅎㅎ 어찌나 이쁘신지 그 미모때문에 시간가는줄 몰랐써요. 저 월래 이런 말 쉽께 하는 남자 아닌데, 만옥씨 처음 보자마자 반해버렸써요. 저도 그동안 만은 여자들 만나봤지만 만옥씨같은 여자는 처음 봤써요. 천눈에 우린 운명이라고 생각이 들었써요. 덕분에 오늘 좋은꿈 꾸게 될거갇타요. 이러다 꿈에서 만옥씨 만나면 어떡하죠? ㅎㅎㅎ 그럼 꼭 바나나우유 사줘야지? 나한테 바나시라고. ㅎㅎㅎ(지금 빵터졌죠?) 만옥씨도 좋은 꿈 꾸세요. 내꿈꿔~ ㅎㅎㅎ - 당신의 주윤발 김진욱으로부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