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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그림자 Sep 30. 2023

핑크빛 불바다 속에서 살아남기

처음 맡은 책은 180페이지가 채 되지 않아 한 달만에 번역을 끝낼 수 있었다. 책이든 뭐든 번역 자체가 처음인지라 프로젝트 매니저 일을 할 때 봤던 번역 원고들을 참고삼아 찬찬히 작업을 진행했다. 


“음, 큰제목이랑 소제목은 굵은 글씨로, 목차는 빠진 거 없이 꼼꼼히, 본문에서 글씨체가 다른 부분은 이탤릭체로 바꾸고, 표나 그림은 페이지 표시 꼭 하고 설명은 파란색 글씨로 박스라고 쓴 뒤에 하고, 독자에게 따로 설명할 주석은 역주라고 표시하고…….” 


처음 하는 번역이어서인지 작업하는 기간 내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속이 울렁울렁하고 긴장과 불안이 반복됐다. 물론 오역이나 실수라도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는 기분 좋은 흥분이 지속됐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엄마, 번역은 엄청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나 하는 건 줄 알았지 살면서 내가 책을 번역할 일이 다 있네?”

“그러게. 갑자기 중국 간다고 난리를 떨더니 다녀온 보람이 있네. 돈은 많이 준다니?” 

“에이, 처음 하는 책인데 돈이 문제야? 엄마는 만날 돈 밖에 몰라.”

“그럼, 뭐? 돈이 문제지!” 

“알았다, 알았어. 근데 엄마. 나중에 서점에 가면 진짜로 내 이름이 박힌 책이 매대에 누워 있을까?” 

“어이구, 그런 생각하기 전에 번역이나 잘 해라. 책 나오면 앞에 사인이나 해서 주고. 엄마 친구들한테 자랑하게.” 


첫 번역 작업은 자꾸 엎어지기만 하던 내 인생에 작지만 기분 좋은 변화였다. 그건 부모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어랍시고 배워 와서 돈도 안 되는데 일에만 몰두하던 딸이 처음으로 하는 그럴 듯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책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아 무사히 번역을 마칠 수 있었다.


재테크 관련 책이다 보니 복리니 주식이니, 포트폴리오니 익숙하지 않은 경제 개념들이 튀어나와 적잖이 당황했지만 빡센 자료 조사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그렇게 번역 작업이 끝나고, 한 달 전만 해도 같은 회사에서 일하던 후임자에게 메일로 원고를 발송했다. 


며칠 뒤, 편집팀의 대리님으로부터 교정 요청 메일을 받게 됐다. 내 번역의 수준이 어떤지 확인만 해 달라고 부탁했던 바로 그 대리님께 이런 메일을 받을 줄이야, 뭔가 기분이 묘했다. 그건 대리님도 비슷했던 모양이다. 


‘세경 씨, XX 대리에요. 이렇게 만나니 기분이 이상야릇한데요.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 기뻐요. 그럼 잘 부탁드려요.’ 


번역 원고 첫머리에 쓰여 있는 글귀를 보자 내가 정말 번역가가 됐다는 게 실감이 났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이 든 것도 잠시, 곧이어 눈앞에 펼쳐진 핑크빛 불바다에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나보고 번역 잘한다고 칭찬하더니, 이게 뭐야? 내 원고를 죄다 고치라고?’ 


대리님은 원고의 앞부분 몇 페이지만 샘플처럼 자세하게 수정을 해 놓았다. 띄어쓰기와 맞춤법이 틀린 단어와 문장, 주어와 술어가 호응하지 않는 문장, 문맥이 매끄럽지 않은 표현, 써야 할 글씨가 빠진 탈자 있는 곳, 말하는 습관대로 줄여 쓰기를 한 단어, 의미가 애매한 문장 등 모두 수정의 대상이었다. 대리님은 수정할 부분들을 모두 핑크색으로 정성스럽게 표시해 놨고, 이미 본인이 수정한 부분은 파란색으로 표시해 둔 상태였다. 


현란한 핑크색의 물결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졌고, 나의 보잘 것 없는 번역 실력에 기가 팍 죽고 말았다. ‘어떤 부분은 내 표현이 나아 보이는데 왜 몽땅 뜯어고쳤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솔직히 속이 부글부글 끓기도 했다.  

“번역은 할 만해?” 

“할 만한 줄 알았는데… 아니네.”

“왜? 무슨 문제 있어?” 

“번역한 원고 수정하라고 왔는데, 나는 무슨 무당이 칼춤 추는 줄 알았어.”

“뭔 소리야?” 

“원고에 이거 고쳐라, 저거 고쳐라 아주 칼바람이 났다니까.”

“하하하, 고칠 게 그렇게 많아? 너 띄어쓰기랑 맞춤법 잘 알잖아.”

“나도 그런 줄 알았지. 근데 그냥 보통 사람보다 잘하는 거였어. 내가 잘못 쓰고 있거나 모르는 게 엄청 많더라고. 나름 국문과라고 어깨에 힘 잔뜩 줬는데 완전히 망했어!” 

“처음이라 그렇지, 뭐. 책 번역을 하게 된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경험을 하다 보면 점점 더 나아질 거야. 괜히 지레 겁먹지 말고, 파이팅!”

“크흑, 그래도 나 응원해 주는 건 너밖에 없다.” 


중국어 공부한 지 두 달 만에 중국에 가겠다고 했더니 일단 학원에 등록하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들려 줬던 베프가 늘 그렇듯 다정하고 논리적인 응원으로 힘을 북돋워 줬다. 가만히 생각하니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그래, 처음에는 다 그런 거지. 처음부터 고칠 곳 하나 없이 완벽하게 번역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사실 나 스스로도 진작 생각했었다. ‘번역에 ‘번’자도 모르는 내가 책을 번역하다니. 출세했다, 출세했어.’ 무려 180페이지에 가까운 책 한 권을 통으로 번역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대단하고 칭찬받을 일이었다. 또한 내 원고가 온통 핑크빛 바다로 물든 건 경험이 부족해서였다. 처음 하는 번역에 능숙한 요령이 부족한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친구의 말을 곱씹다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러자 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핑크색이니까 잘 주워 먹자!’  

이제 막 책 한 권 번역한 사람의 실력이 나을까 아니면 수십, 수백 권의 번역 원고를 보며 수정한 편집자의 실력이 나을까? 물론 답은 편집자일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을 인정한 나는 어떤 단어와 문장이 왜, 어떻게 수정됐는지를 유심히 살펴봤다. 단순한 띄어쓰기나 맞춤법 말고도 문장을 매끄럽게 수정한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니 나의 잘못된 언어 습관이 눈에 띄었다. 늘어진 문장과 주어 앞에 놓인 갖가지 수식어, 반복된 어미 사용 등 단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런 실력으로 책을 번역하게 되다니, 너무 민망하고 창피해 얼굴이 후끈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핑크빛 불바다에서 살아남으려면 모범 답안의 사소한 부분 하나까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편집팀 대리님이 수정해 준 원고를 보고 또 보며 적어도 다음에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이렇게 다짐하는 것만으로 다음 책부터 실력이 확 좋아진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 뒤로 몇 권의 책을 더 번역하도록 나는 수많은 실수와 계산 착오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 불바다 속에서 내 부족함을 인정하고, 더 나은 답을 찾아 실수를 줄이려고 노력한 덕에 번역 실력은 점점 더 상승 그래프를 그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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