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라서 불만이지만

by 달빛그림자

과거에는 무슨 문학상이니 신춘문예에서 상이라도 하나 타야

작가로 데뷔하던 시절이 있었다. 뼛속까지 텔레비전 덕후로 살며

드라마 작가를 꿈꿨던 나였지만 드라마 작가라고 상황이 다른 건 아니었다.

단막극 공모전에서 장려상이라도 하나 타야 누군가 봐줄 글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불과 몇 년 사이에 각종 SNS와 인터넷 플랫폼이 늘어나고

개인방송 콘텐츠가 발달하면서 누구나 원하면 작가, 만화가, 방송 크리에이터 등

창작자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까지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에 목을 매며

온갖 공모전에 탈락한 뒤 적성에 딱 맞는 번역가로 살아온 지 어언 10여 년,

나는 다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글이라고 하면 ‘꿈’이라고 여겼는데 요즘은 ‘생활’에 가까운 개념이 된 것 같다.

내가 오늘 뭘 했는지를 적고, 누군가와의 인간관계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풀어놓으며,

내일의 계획을 세우고, 재미와 흥미를 느끼는 일을 기록하는 등

글쓰기에는 소재도 표현에도 별다른 한계가 없어졌다.

아무리 평범한 이야기라도 꾸준히 그리고 끝까지 완주할 힘만 있다면

조금 어설퍼도 글을 쓸 수 있고, 독자의 공감과 응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작가란 이래야 한다는 기준이나 어쩐지 대단하고 위대해 보이는 이미지 따위는

개나 물어가라지. 글을 쓰는 ‘나’와 글을 읽는 ‘너’가 어느 한 부분이라도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글이 되는 것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나는 많은 책들을 번역해왔다.

그 중에는 철학서도 있었고, 교양서나 에세이, 소설, 경제서,

애완동물 관련서, 심리학서, 자기계발서 등 다양한 장르가 망라돼 있었다.

하지만 나는 특히 철학이나 심리, 자기계발과 관련된 중화권 서적들을

많이 번역했었는데 작가들을 보면 하나 같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이를 테면 그들은 어느 유명한 대학 교수이거나 수많은 책을 쓴 심리학자이거나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인생 멘토이기도 했다.


그들은 확신에 찬 어조로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나의 삶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힘들 때는 이렇게 해라.’라고 조언했다.

나는 그런 책을 볼 때마다 확고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작가들이 참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째서 심리나 자기계발에 관련된 책들은

내용이 다 비슷비슷할까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한 이런 글을 쓰려면 다 확실한 신념이나 주장이 있어야 되는 건가 고민하기도 했다.


사실 나로 말하자면 이렇다 할 신념도, 그럴 듯한 계획도,

굳센 실천력도,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의지도 전혀 없는 사람이다.

만날 뭐라도 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엉성한 계획은 세우지만

그 계획을 끝까지 완수해본 건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면서 일요일마다 교회에 앉아 다음 주에는 꼭 부지런히 살겠다며

기도한 게 1,512주는 되는 것 같다.


사실 드라마나 시나리오 작가가 꿈이라면서도

제목만 정하거나 인물만 설정하거나 줄거리만 쓰다 만 작품이

끝까지 쓴 작품보다 몇 배는 더 된다.

학교 다닐 때는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수업 시간에 대놓고 졸아본 적 없는 우등생 아닌 모범생이었지만

결국 공부는 하는 척에만 그쳤다.

그보다 더 어렸을 때는 햄버거 가게에 가서 할 말을 잊어버릴까봐

주문도 못하던 극소심주의자였다.

오죽했으면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때까지 발표를 하겠다고

단 한 번도 자발적으로 손을 들거나 그 흔한 장기자랑 한 번 나가보지 못했다.


그야말로 나는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어디에나 있으나

또 어디에도 없는 그야말로 존재감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귀는 얼마나 습자지처럼 얇은지 이 사람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저 사람 말에 가슴이 벌렁거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결정적일 때는 고집이 얼마나 센지 평생 돈 안 되는 일만 쫓아다니다

마흔 살을 훌쩍 넘긴 노처녀가 됐다.

사실 딱히 결혼할 생각도 없긴 하지만 툭하면 큰 조카의 엄마로 오해를 받으니

한 일도 없이 나이만 먹은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나는 타고난 개인주의자다.

그것도 머릿속은 아주 극심한 개인주의자이지만

행동은 정반대일 때가 많은 언행불일치의 개인주의자다.


이런 내가 나라서 불만이지만 그래도 나니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좀 더 폼 나는 글을 쓰고 싶지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역시 ‘나’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잘나지도 않고 유식하지도 않으며 남다른 인생철학도 없어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도, 뼈 때리는 충고도 누구에게 해줄 주제가 못 된다.

다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세상사람 다 이렇게 사는구나.’라며 안심하고

느슨한 공휴일이나 주말에 마음 편히 늦잠이라도 잘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