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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 Oct 18. 2021

04 크림

얼굴 큰 고양이는 미남이라던데


 크림이는 보는 사람들마다 감탄을 터뜨리게 만드는 고양이다. 이름처럼 희귀한 모(毛) 색에 동그랗고 커다란 얼굴, 반짝반짝 빛나는 눈망울을 가진 크림이를 고양이계의 묘델, 연예묘라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보통 치즈 고양이들은 느긋하고 낙천적인 성격이 많고 그만큼 밥도 많이 먹어 비만이 되기 쉽다는데, 크림이는 타고난 덩치부터가 남달랐다. 딱히 뚱뚱해 보이진 않는데도 기세로만 보면 호랑이에 버금갈 정도였으니까. 덩치에 비해 성격은 또 얼마나 순둥 하고 겁도 많은지, 순화된 기숙사 고양이들 중에서는 가장 낯을 가리고 소심했다. 그런데 겁이 많은 것 치고는 약간 바보였다.


 한 마디로 크림이는, 얼굴도 크고 땅콩(뽕알)도 크며 아름다운 자태와 망충미가 돋보이는 동네북 고양이였다. 나 역시 고양이들에게 관심을 갖는 동시에 크림이의 반전 매력에 저항 없이 빠져들고 말았더랬다.



기숙사 현관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크림이는 운동량이 많은 고양이다. 치즈는 혼자만의 사색을 즐겼고, 프레즐은 아직 어려 지나가는 사람이나 치즈에게 장난을 많이 걸곤 했다. 그런데 크림이는 밥을 줄 때를 제외하면 잘 나타나지 않았다. 대체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 걸까 궁금해서 뒤를 쫓아가 본 적이 있는데,  깜빡 시야에서 놓친 사이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얼굴이 큰 고양이는 대장 고양이라던데."


 인터넷에서 검색한 내용을 되뇌며 그저 얼굴이 큰 크림이가 대장으로 있는 구역이 넓어, 매일같이 순찰을 나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정확하게는 얼굴 큰 고양이는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의 분비가 활발하다는 반증이고, 때문에 고양이계의 미남이었던 것이지만 당시에는 막연히 덩치도 얼굴도, 땅콩마저 큰 크림이가 당연히 대장 고양이일 거라 여겼다.


 그렇게 연기처럼 사라진 크림이는 밥을 주려고 캔을 두드리거나 사료 봉지를 부스럭거리면 어디선가 또 홀연히 나타나 통통 튀는 걸음으로 다가오곤 했다. 운동을 많이 해서인지 크림이는 밥 먹는 속도가 정말 빨랐다. 치즈가 밥을 다 흘리면서 천천히 먹고 있으면 크림이는 순식간에 한 그릇을 해치우고, 리필해준 한 그릇 역시 금세 먹어치우고도 시간이 남아 치즈의 밥을 탐냈다. 그러면 치즈는 순순히 물러나 밥그릇을 양보했다. 잘 먹는 크림이가 대견한 한편 입이 짧은 치즈가 걱정스러웠던 나는 먹는 양도 많고 속도도 빠른 이 먹성 좋은 밥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밥 줄거예요?" 기대에 찬 표정의 크림





묘델워킹은 기본!


 크림이의 매력은 양파처럼 까도 까도 넘쳐나지만, 특히나 그 독특한 걸음걸이만큼은 따라 할래도 따라 할 수 없는 크림이만의 시그니처다. 앞서 묘사했듯 크림이의 통통 튀는듯한 발걸음은 시간이 흘러도 상황이 변해도 유지되는 중이다. 유명 모 유튜버네의 '뚱땅이'처럼 뚱땅거리는 걸음과도 비슷한데, 크림이는 매 걸음이 스타카토처럼 통 통 튀는 듯한 걸음걸이다. 걸음걸음마다 살짝씩 튀어 오르는듯한 그 독특한 통통걸음을 보고 있자면 웃음을 짓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난 엉뚱한 매력을 가진 크림이의 성격을 쏙 빼다 놓은 듯한 그 걸음걸이를 사랑한다.


 엉뚱 매력 크림이의 능력은 통통걸음으로 끝이 아니다. 고양이답게 호기심이 많은 크림이는 집사의 가방을 좋아했다. 나는 가방 속 내용물을 옮기는 게 귀찮아서 휘뚜루마뚜루 사용할 수 있는 커다란 에코백 하나를 가지고 다녔는데, 크림이는 항상 그 속을 궁금해했다. 매일 먹을 것이 끝도 없이 나오니까 신기했던 모양이다.


 밥을 주려고 가방을 내려놓고 그릇을 세팅하고 있자면 그 속을 살그머니 들여다보았고, 그러다가 머리가 걸려 빠져나오지 못하고 버둥거리기도 했다. 가방을 뒤집어쓰고 어리둥절 두리번거리며 어정쩡하게 뒷걸음질 치는 크림이를 보고 있자면 너무 귀엽고 웃기고 사랑스러웠다. 돌바닥에 차가운 냉기가 느껴질 정도로 추운 날이면 가방을 방석 대용으로도 요긴하게 사용했다. 뻔뻔하다기보다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 행동이 안타까웠다.


 밥 차리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비닐 지퍼백에 담아온 사료를 먼저 먹다가 머리를 빼지 못해 봉지를 쓴 채 하염없이 뒤로 간 날도 있었다. 자기는 뒤로 가고 있는데 왜 사료 봉지도 따라오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이 투명한 비닐백 너머 보였다. 집사의 도움으로 빠져나온 망충한 크림이가 교훈을 얻지 못하고 그 후에도 두 번 정도 더 그랬다는 것은 비밀이다.


집사의 가방에 앉는 것을 좋아하는 크림이



"조금만 자도 돼요? 돌바닥은 차가워요."


크림아 어디까지 가는거야?







추운 것이 싫어


 고양이는 사막이 고향인 동물인 만큼 추운 것을 싫어한다. 스스럼없는 기숙사 고양이들은 살이 에는 듯 추운 겨울바람이 부는 날이면 기숙사생들의 따뜻한 무릎 위에 올라가고 싶어 눈치싸움을 하곤 했다. 착해 보이는 기숙사생, 천천히 지나가는 기숙사생, 배달음식을 기다리는 기숙사생, 하다못해 너무 추운 날이면 그냥 아무나 붙잡고 도와달라고 야옹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간택된 사람들은 대부분 흐뭇해하며 선뜻 무릎을 내주었다. 덕분에 추운 날씨가 되면 꽁꽁 여민 인간들이 기숙사 현관 여기저기에 앉아있는 풍경이 연출되었다. 그들이 애지중지 겉옷으로 감싸고 있는 무릎 위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씩 앉아있었다. 애교쟁이 프레즐은 물론, 뚝딱대장 크림이와 심지어는 무뚝뚝한 치즈까지도 무릎냥이가 되곤 했으니 나는 '용베리아'라고도 불리는 용인의 혹독한 겨울 날씨가 야속하기만 했다.


 기숙사가 위치한 용인시 처인구는 지형 자체가 습했다. 여름에는 푹푹 찌는 듯이 더웠고, 겨울에는 칼바람이 웅웅대며 기승이었다. 인간이 기모 후드와 코트를 꺼내 걸치는 쌀쌀한 날은 고양이들에겐 조금 더 추운 날씨였다. 아무리 겨울옷으로 털갈이를 한 고양이라도 그곳의 날씨는 가혹했을 것이다. 운 좋게 사람을 붙잡아 무릎 위에 앉는 데에 성공해도 영원히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다리가 저리거나 찬바람을 못 견디거나 볼일이 있는 사생들은 먼저 들어가야 했고, 그러면 앉아있던 뜨끈한 방석을 잃은 고양이들은 다시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을 붙잡아야 했다.


 나는 애초에 몸이 찬 편이라 언제나 든든하게 입고 다니는 버릇이 있었다. 게다가 이젠 항시 고양이에게 무릎을 내드린 채로 겨울바람을 맞으며 몇 시간씩 바깥에 앉아있어야 했으니, 그날의 기온을 체크하고 단단히 여며 입는 습관도 들었다.


  이 날은 너무 추워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밥을 차리려고 그릇을 내려놓는데 사료를 붓기도 전에 프레즐이 무릎 위로 달려들어 앉았다. 그만큼 추운 날이었다. 먹보 고양이들이 밥을 마다하고 온기를 택할 정도였다. 인간 방석을 놓친 크림이는 한참을 기웃거리며 다른 사람을 찾았지만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고, 참다못해 프레즐이 앉아있는 내 무릎 위로 엉거주춤 올라왔다. 1냥 1 집사라는 암묵적인 룰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나로서는 행복이 두배 무게가 두배인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프레즐은 매우 당황한 표정이었다. 코트를 여며 두 마리 고양이를 모두 감싸고 한참을 현관에 앉아있었다.



쌀쌀한 초겨울, 프레즐이 선점한 무릎을 탐내는 크림


'이 형 뭐지…?'






알고 보니 동네북


 크림이가 대장 고양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시간이 꽤 지난 후였다. 사료만 먹고 사라지는 크림이의 꾸준한 행보와 기숙사에서 5분가량 걸리는 언덕 아래쪽 회사 건물의 1층 열린 창문 너머로 사라지는 기행을 목격한 후로는 '알아서 여기저기 잘 얻어먹고 다니는구나, 자기의 아지트가 여러 개구나'하고 생각했던 탓이다. 기숙사와는 거리가 꽤 먼 놀이공원 근처에서도 본 적 있다는 목격담이 떠돌았으니, 멀찍이까지 순찰을 다니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 터줏대감인 치즈가 실세였고 크림이는 밥만 얻어먹으러 올뿐, 자신의 영역이 될 만한 곳을 찾아다녔던 것이 아닐까 싶다. 너그럽고 무던한 성격이었던 치즈는 아무것도 모르고 까불까불 장난쳐대는 쪼끄만 프레즐은 물론, 다 큰 수컷 고양이인 크림이까지도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포용해주었던 것이다.


 그랬던 크림이가 알고 보니 동네 바보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여기에는 크림·치즈·프레즐 외에 한 마리 고양이가 더 등장한다.




 오레오.





빵실한 볼살, 통통한 얼굴. 그런데 대장이 아니라고?



 오레오는 크림치즈프레즐 이후에 나타난 삼색 아기 고양이다. 갓 독립해 영역을 찾다가 기숙사 쪽으로 온 모양인데, 인심 나쁘지 않겠다, 밥 주는 인간도 있겠다, 먹고 살기 마음에 들었나 보다. 나도 이곳에 살겠노라 선포한 후 모든 텃세를 이기고 오히려 기숙사 서열 1 짱의 꿈을 꾸는 기 센 꼬마 고양이였다.


 레오가 나타난 후에 크림이는 항상 쭈굴쭈굴 주눅 들어 살았다. 레오는 순화라곤 전혀 되지 않은 야생의 고양이었기 때문에 하악질, 솜방망이질은 기본, 입질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기존의 순둥한 치즈 냥이들이 인사해볼까 친해져 볼까 다가가면 하악질을 하며 화를 냈다. 중학생쯤 되는 아이가 갑자기 집에 쳐들어와 세상 사납게 화내며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하니, 삼촌뻘 되는 기존 고양이들 입장에선 얼마나 황당했을까.


 오레오는 밥도 화를 내며 먹는 거친 냥이였다. 집사가 사료를 꺼내 주기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크림치즈 프레즐에 반해, 레오는 먹을 것을 꺼내는 순간 나를 물고 피가 나게 해 지혈하는 동안 봉지채로 빼앗아 쟁취해가는 무서운 고양이였다.



야생의 오레오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던 프레즐에게 암컷 고양이의 등장은 설레는 일이었나 보다. 프레즐은 끝없는 구애로 레오와 단짝이 되는 데에 성공했고, 그 후로 알차게 크림 삼촌에게 냥냥펀치를 날리는 불량커플이 되었다. 집사만 몰랐던 크림이의 서열은 이렇게 공개되고 말았다.



맞고 맞고 맞는다







빛나는 고양이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하고 순한 크림이는 그래도 특별한 고양이다. 비단 그 희귀한 털 색, 빵실한 볼살, 매력 있는 꼬리, 단단한 궁둥이가 아니더라도 크림이에게는 빛나는 무언가가 있다. 항상 긍정적이고 새롭게 순수한 크림이만의 눈빛이다.


 크림이의 통통 튀는 가벼운 발걸음과 무해한 눈빛을 보고 있자면, 세상의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속세의 찌든 때가 씻기는 듯하다. 가장 순한만큼 크림이는 사람에게 피해도 많이 입었다. 기숙사생들은 대부분 호의적이고 착하지만, 어디에나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있는 법이다. 싫어하면 그냥 무시하면 그만인데, 그중에서도 꼭 괴롭히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이 있다.


 나는 출근하는데 너는 자냐며 나뭇가지로 쿡쿡 찔러 깨운다던가, 같이 셀카를 찍자며 무례하게 번쩍 안아 들고 사진을 찍은 후엔 땅에 팽개친다던가, 감히 자기가 사준 간식을 먹지 않는다고 때린다던가. 아이들이 도망가기 위해서나 자기 방어를 위해서 발톱이라도 세울라치면 자기가 다친다며 더 극성으로 괴롭혔다.


 그래서인지 크림이의 몸과 얼굴은 자주 상처투성이였다. 처음에는 순찰을 돌고 와서 몸에 검댕이 묻은 줄 알았는데 상처였던 적도 있고, 얼굴에도 잔상처가 가실날이 없었다. (이것 때문에 대장 고양이로서 영역을 지키려고 싸움을 하고 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도 크림이는 매번 빛나는 눈으로 인간의 마음을 비춰 보인다.


 모든 인간들이 크림이의 반짝이는 눈에 자신의 양심을 비춰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하품하는 치즈와 초롱초롱한 크림



물 말고 밥 줘요



빼꼼 프레즐과 크림
이렇게 예쁜 고양이 본 적 있어요?






 퇴사를 한 후에도 크림이와 프레즐을 보러 기숙사에 가곤 한다. 편도로 3시간 걸리는 거리이니 하루를 통째로 비워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아이들을 보러 가는 날이면 콧노래가 나오고 기분이 들뜬다.


 크림이는 이제 기숙사 쪽에 아예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프레즐과 낮잠을 즐기고, 각자 그루밍을 한다. 둘은 각별하거나 애틋한 사이는 아니지만 함께한 세월만큼 서로가 편안한 눈치다.


 나는 크림이가 정착을 해서 기쁘다. 일에 치여 오랜만에 방문해도 나를 잊지 않고 통통 다가와준다. 겁 많고 소심한 크림이가 먼저 다가와준다는 점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크림이는 여전히 내 가방에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으며 수색을 한다. 변함없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가 아직도 그때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소중한 크림이, 한결같은 크림이.



유독 요정같은 크림



동화책의 삽화같다



잔디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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