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 지나갔어도 깊게 남은 고양이들
양치를 하며 창문으로 잔디밭을 내려다봤다. 분명 치즈가 보여서 헐레벌떡 준비하고 내려갔는데, 치즈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보통 치즈는 점잖게 걸어 다니기 때문에 빠르게 사라질 일이 없었는데도 그랬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가필드라는 것을 알았다.
가필드는 치즈와 정말 비슷한 덩치와 색을 가졌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구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성격은 정반대였다. 치즈는 당당하고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는 한편, 가필드는 전혀 순화가 되지 않아 항상 수풀로 숨어 다니고 사람을 무서워했다. 하악질을 하거나 공격성을 띄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두컴컴한 수풀 안에서 야옹 소리도 없이 그저 뜨거운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나도 처음부터 가필드의 존재를 알았던 건 아니다. 워낙 조용히 숨어 다니기 때문에 가필드의 바람대로 존재 자체를 모르고 지냈다. 가필드는 그렇게 몰래몰래 다니며 내가 리필해두는 사료와 물로 조용히 배를 채우고 갔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료그릇과 물그릇에 파란색의 형광물질이 뿌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약속 때문에 외출을 하려고 나서며 사료가 얼마나 남았나 흘깃 보던 길이었다. 처음에는 수풀에 달린 나무 열매를 찧어다가 그 즙을 뿌려둔 못된 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생각해보니 쥐약 같기도 했다. 버스를 타기 직전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뒤돌아 기숙사로 향해 밥그릇과 물그릇을 수거했다. 빡빡 닦아서 기숙사 방에 가져다 두며, 내가 보는 앞에서만 아이들을 먹이기로 다짐했다. 이후에 며칠을 기다려도 밥그릇이 코빼기도 비치지 않자, 배고픔을 참지 못한 가필드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야옹."
크림, 치즈, 프레즐. 모두들 내 눈앞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누가 울음소리를 낸 거지?
주위를 둘러보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한참을 찾은 후에야 수풀 속에서 배고픔에 번뜩이는 눈동자를 보았다. 일을 오래 다닌 사람에게 물어물어 고양이의 이름이 가필드라는 것을 알아냈다.
"저도 거의 본 적 없는 데다 한참을 안 보여서 가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 있었네요."
가필드의 존재를 알고 난 후에는 고양이들에게 밥을 줄 때는 물론 평소에도 관목 사이를 주의 깊게 살펴보며 지나가는 습관이 생겼다. 다른 고양이들이 밥을 먹는 시간을 놓치면 가필드는 하루 종일 쫄쫄 굶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밥시간이 아닐 때도 가필드가 보이면 바로 밥을 주기 위해 나는 항상 두리번거리는 인간이 되었다.
차마 인간에게 얼굴을 보여줄 용기는 없는데 배가 고파 어두운 수풀 속에 숨어 자기도 밥을 달라고 울던 가필드. 나도 한동안은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사료를 덜어 수풀 속에 밀어 넣어주면 가필드가 먹곤 했다. 사료 먹는 소리는 멎었는데 가필드가 있는 것 같으면 사료를 더 채워주었고, 다 먹고 자리를 떠나는 기척이 느껴지면 밥그릇을 치웠다. 그러다가 한 번은 가필드가 울지도 않고 다른 고양이들이 밥을 먹는 것을 구경했다. 수풀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지켜보던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수풀 깊숙이 사료를 받아먹는 것이 익숙해진 건지, 가필드는 아주 천천히 경계심을 덜어냈다. 한번 얼굴을 보여주고 나자 적응이 조금 되었는지 점차 얼굴을 보여주기도 했다. 기숙사 고양이들의 이름을 내가 지은 것은 아니지만, 모두 먹거리 이름인데 가필드만 왜 가필드일까 궁금했던 나는 가필드의 얼굴을 제대로 보자마자 그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나와는 달리 고양이들은 가필드의 존재를 진작에 알고 있었다. 모두들 가필드를 봐도 놀라지 않았으며, 밥을 같이 먹곤 했다. 가필드는 아무리 밥을 주는 나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있으면 절대 가까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밥을 주고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봤고, 그럼 용기를 쥐어짜낸 가필드가 살금살금 나와 밥을 먹었다.
가필드는 사람을 아주 무서워했다. 단순히 순화되지 않은 야생 고양이라기엔 지나치게 겁이 많고 경계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짐작 가는 바는 있다. 아마 사람에 의해 학대를 당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이유는 추후 길고양이 TNR 편에 쓸 예정이다.
밥을 처음 주기 시작했을 때 가필드의 영양상태도 썩 좋지 못했다. 다른 고양이들의 깨끗한 얼굴과 보송한 털만 보다가 눈곱과 코딱지가 가득한 가필드를 처음 보고 놀랐을 정도였다. 구내염도 있었는지 침을 흘리기도 했다. 가필드는 매일 출석한 것이 아니라 잊을만하면 이따금씩 나타나서, 약을 챙겨주기도 어려웠다. 자주 나타나는가 싶으면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문득 찾아와 밥을 얻어먹고 가곤 했다. 아마 다른 영역도 건너 다니는데, 밥을 먹지 못하면 이쪽으로 한 번씩 오는 것 같았다. 가필드는 나에게도 얼굴을 잘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퇴사한 이후에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다. 가필드의 빼빼 마른 꼬리가 통통해지는 걸 보면서 뿌듯해하던 나로선 아쉬운 일이다. 가필드는 아마 치즈처럼 기숙사를 떠난 것 같다.
우유는 2018년 10월 2일에 처음 나타났다. 그렇게 외진 장소에 그렇게 다 큰 고양이가 뚝 떨어질 일은 없으므로 누군가 유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나 우유는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무서워했고,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기에 그 가설에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먼저 퇴근했던 근무자가 돌아와 처음 보는 고양이가 있다고 알려준 덕에 나는 들고 다니던 닭가슴살을 하나 들고나갔다. 차 밑에 숨어있던 우유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자 달려 나와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시 차 밑으로 숨었다. 애기야, 하고 부르자 다시 조심스레 나와 쪼그리고 앉은 무릎에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지만, 쓰다듬어주려고 손을 움직이면 화들짝 놀라 도망갔다. 그렇게 사람을 좋아하는데 사람을 무서워했다.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닭가슴살을 먹으면서도, 잘게 찢어주려고 손을 움직이면 무서워해서 그냥 혼자 먹게 내버려 두었다.
우유는 마치 강아지처럼 사람을 좋아해서 달려 나와 얼굴을 비비면서도 또 사람을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몸은 한껏 뒤로 빼고 언제든 도망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손을 아주 천천히 움직여 쓰다듬어주면 좋아서 골골 송을 불렀지만 손길을 마음 편히 즐기지 못하고 항상 안절부절 불안에 떨었다. 이런 모습들로 볼 때 우유는 학대당하거나 최소 유기당한 것이 확실해 보였다.
우유가 유기된 곳은 놀이공원 입구의 옆쪽이자 직원용 주차장이 있는 장소였다. 사람도 차도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라 겁 많은 우유가 지내기엔 위험해 보였다. 보름 가량 출퇴근할 때마다 밥을 챙겨주며 신뢰를 쌓았다. 점차 가까이 다가오며 겁내는 일이 줄다가도 내가 없을 때 무슨 일을 당한 건지 어느 날은 차 밑에서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구슬피 울기만 했다. 그러면 난 사료를 밀어 넣어 밥만 챙겨주었다. 그런 식으로 다시 신뢰를 쌓다가도 사람을 두려워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휴무날이면 밥을 챙겨줄 수 없고, 사람과 자동차가 하루 종일 지나다녀 위험한 주차장에 우유를 계속 두어야 하나 고민했다.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면 겁을 먹고 패닉 상태가 되어 돌발행동을 하기도 한다. 고양이 산책이 위험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위험한 장소지만 우유를 함부로 옮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 신뢰를 쌓았는데도 갑자기 인간을 무서워한 이후, 다시 신뢰를 쌓았지만 또 인간을 무서워하는 일이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폭력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어 우유의 거처를 기숙사로 옮기기로 결정을 내렸다.
10월 13일, 우유를 기숙사로 옮겼다. 기숙사 고양이들은 너그럽다는 것을 알았기에 우유의 반응만이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어주자마자 우유는 튀어나가 풀숲으로 숨었고, 의외로 우유가 이동장에 있을 때부터 관심 있게 지켜보던 프레즐이 그 뒤를 따라갔다. 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이었다.
프레즐은 이후로 우유만을 따라다녔다. 심지어는 그 먹보 프레즐이 자신의 밥도 굶어가며 우유를 바라보는 일에만 열중했으니, 그 열정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딱히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빤히 지켜보다가, 유독 우유가 밥을 먹을 때면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가 덤벼들며 밥 먹는 것을 방해했다. 발정기가 온 것인가 고민해보기도 했는데 인터넷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밥 먹을 때만 달려드는 사례는 없었다. 그렇다고 영역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이 기묘한 긴장감이 이어지며 우유는 몸은 편해져도 마음이 불편해졌고, 프레즐은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프레즐이 불편했던 우유의 행동반경은 점차 넓어졌다. 프레즐을 떼어놓기 위해 언덕 위에까지도 올라갔다가, 저 아래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그래서 밥을 줄 때면 우유를 찾아다니느라 한참이 걸렸다. 그렇게 힘들게 찾아낸 우유 옆에는 항상 프레즐이 있었다. 나 역시 항상 귀엽게만 생각하던 프레즐이 조금 음침하고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우유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우유를 옮긴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출근해보니 우유가 원래 있던 주차장 그 자리에 있었고, 퇴근해보니 프레즐은 우유를 찾느라 울며불며 사방팔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프레즐의 짧은 첫사랑(?)은 그렇게 상처만 남긴 채 끝이 났다. 다행히 우유는 그쪽에서 새로운 고양이 친구를 만났다. 프레즐과 달리 부담스럽지 않았던 모양인지 곧잘 어울려 다녔다. 다만 그 친구는 고양이에겐 다정해도 사람은 싫어해, 내게 얼굴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우유가 수풀 앞에 나와있으면 걱정되는 목소리로 불렀고, 사료와 닭가슴살을 두고 돌아서 내가 시야에 보이지 않을 때만 나와서 먹곤 했다. 그래도 잘 지내니 다행이었다. 한편 프레즐은 실연(?)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 다시금 사료를 폭풍 흡입하며 돼냥이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바람이 차가워지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겨울은 잔인한 계절이다. 첫눈의 설렘과 동심으로 돌아가는 듯한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던 나는 고양이를 알게 된 후로 겨울이 싫어졌다. 친구들은 비가 오는 날이면 손님이 덜 온다고 좋아했지만, 나는 손님이 미어터져도 좋으니 고양이들을 위해 날이 맑고 선선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뀌기 마련이다. 다른 고양이들은 몰라도 유달리 연약한 우유가 이 혹독한 용인의 겨울을 잘 버텨낼 수 있을지 걱정할 때였다.
아르바이트생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커뮤니티에 '기숙사에 있던 우유의 위치를 알고 싶다'는 글이 올라왔다. 내가 우유의 밥을 챙겨주는 것을 아는 친구가 그 내용을 내게 전달했고, 연락이 닿은 글 작성자는 우유를 입양하고 싶다고 말했다.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내 마음과 별개로 우유를 위해서는 너무 잘된 일이었다. 길고양이를 구조해 입양 보내본 경험이 있는 부서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11월 4일, 우유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얌전히 이동장에 들어갔다. 사람을 무서워하고 긴장할까 봐 걱정하던 것이 무색했다. 약속시간보다 먼저 가서 우유와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와 부서 사람은 서운하면서도 다행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우유, 정말 잘 살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우유는 결막염이 있어 치료했고, 예방접종과 중성화까지 했다. 간간이 받아보는 사진으로는 점점 살이 오르고 통통해지면서 미모가 더욱 폭발하고 말았다. 우유가 이렇게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 역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우유 집사님의 인스타에 들어가 가끔 우유사진을 보곤 한다. 우유는 애교 많은 둘째 냥이로, 이제는 겁먹지 않고 사랑받으며 지낸다고 한다. 우유가 내 기억은 아예 잊어버려도 좋다. 그 작은 머릿속에 행복한 기억만 가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