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업도 숫자가 없으면 검토되지 않는다
중소형 딜 실사 현장에 들어가면 처음 며칠은 늘 비슷하게 흘러간다.
자료를 요청하고 며칠 후 돌아오는 답은 대개 이렇다.
"지금 만들고 있어요." 혹은, "엑셀에 있긴 한데 정리가 안 돼 있어서요."
데이터가 없는 게 아니다. 정리가 안 된 것이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투자자 입장에서는 결정적이다. 정리된 데이터는 검토로 이어지지만, 정리되지 않은 데이터는 공수로 이어진다. 사람이 투입되고, 시간이 늘어나고, 우리 입장에서 딜의 경제성이 흔들린다.
국내 중소·벤처 M&A는 건수 기준으로 전체 M&A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그런데 금액 기준으로는 30% 수준에 머문다. 규모는 작고, 거래는 많다. 이 구조에서 PE가 중소형 딜에 공을 들이기 어렵다는 논리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투입 공수는 비슷한데 회수 규모가 작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비효율의 원인을 제대로 짚어보고 싶었다.
중소기업의 규모가 작아서인가. 아니다. 규모가 작아도 사업 구조는 대형 거래만큼 복잡할 수 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재무보고 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기업에 대기업 딜과 동일한 실사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PE 실사에서 재무실사의 핵심 중 하나는 Adjusted EBITDA 산출이다. 과거 3~5개년 손익항목을 분석해 지속가능한 이익 수준을 도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월마감이 불규칙하고, 관리회계와 법인세 신고용 재무제표의 경계가 모호하며, 비용 분류 기준조차 연도마다 다른 기업에서 이 작업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오래 들어가야 하는가. 답은 경험한 사람이라면 알고 있다.
산업연구원이 2024년 국내 466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기업들이 디지털 전환에서 가장 어렵다고 꼽은 요인 1위는 디지털 기술 역량 부족(22.4%)이었고, 2위는 전문인력 부족(18.6%)이었다. 그런데 더 주목해야 할 숫자가 있다. AI 기술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5점 만점에 3.0으로 비교적 높게 평가됐음에도, 실제 도입률은 14.6%에 그쳤다. 인식과 실행 사이의 거리, 그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반 데이터다.
데이터를 정리하지 않은 기업에게 AI는 작동하지 않는다. 입력할 데이터가 없으면 모델도 없다.
같은 조사에서 데이터 활용 역량이 높은 기업일수록 디지털 전환 단계가 높다는 관계가 확인됐다. 인과관계가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가 봤을 때 방향은 분명하다. 데이터를 다루는 역량이 모든 것의 전제다.
우리가 개발 중에 있는 AI IB 에이전트의 출발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화려한 기능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있다. 로우 데이터를 정리하고, 월마감 손익을 구조화하고, 관리회계 기준을 일관되게 만드는 것. 이것이 갖춰진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 사이에는 실사 진입 비용에서 이미 격차가 벌어진다.
잘 정리된 내부 보고 체계는 경영진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투자자가 판단할 수 있는 근거 자료가 된다. M&A에서 중소기업이 직면하는 가장 큰 과제로 M&A 준비 및 역량 부족과 기업가치 평가의 어려움이 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숫자가 없는 기업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어렵다.
이건 투자받을 자격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사업을 하고 있어도, 숫자가 정리되지 않으면 투자자의 시간을 잡아먹는다. 투자자의 시간은 유한하다. 결국 실사 공수를 감당할 수 없는 딜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린다.
AI IB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속도가 아니다. 중소기업이 투자 가능한 상태로 진입하는 비용을 낮추는 인프라다. 데이터가 정리된 기업은 더 빨리 검토되고, 더 신뢰 있는 숫자로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 준비된 기업이 좋은 딜을 만든다. 우리가 판단하는 그 준비의 첫 번째 조건은 월마감이다.
*참고자료: 삼일회계법인·한국벤처캐피탈협회, 『M&A 가이드북』 (2025), 산업연구원, 『산업의 디지털 전환 현황과 혁신 활성화를 위한 연구』 (2024)
**조르조 모란디 Giorgio Morandi (1890–1964) 이탈리아 볼로냐 출신의 화가. 평생 거의 볼로냐를 떠나지 않았고, 거의 같은 소재만 그렸다. 병, 단지, 그릇. 그게 전부였다. 외부에서 보면 단조롭다. 그런데 모란디의 작업실에 들어가 보면 다르다. 그는 사물의 표면에 분필 가루를 발라 반사를 없앴고, 같은 오브제를 수십 년에 걸쳐 다른 배열로 반복해서 그렸다. 소재가 아니라 관계를 탐구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