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과 직장인 사이에서 - 4

25년을 되돌아보며 적는 소회 (4) - 어리고 치열했던 내신 레이스

by 모뷰 MoBeau


오랜만에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입학하게 된 고등학교 이야기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내 기억으로 대전과고 입학 후 처음 있었던 큰 행사는 꽃동네 봉사활동이다. 원래 영재고 전환 전 과학고 시절부터 있었던 행사라고 하는데, 충북 음성에 있는 꽃동네에서 이루어지는, 2박 3일간의 봉사를 빙자한 신입생 OT였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90명의 동기들과 아직 통성명도 못하고, 이름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우당탕탕 끌려갔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그 봉사활동이 나름 중요했던 이유가 있다. 해당 활동엔 신입생들이 팀을 짜 장기자랑을 하는 구시대의 문화가 남아있었고, 그 때의 결과를 바탕으로 선배들의 눈도장을 받아 대학 입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학내 학술 동아리 가입에 성공했어야 했다. 내 직속 후배들이 입학하자마자 그런 악습은 바로 없어지긴 했다만 그 땐 그런 쓸데없는 과거의 잔재가 그것 말고도 여럿 남아있었다. 잘생기고 예쁜 애들만 뽑는 비공식 동아리가 따로 있다든지 하는... 지금 생각하면 정말 하등 쓸모가 없는 완장질들이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놓인 열다섯 살 고등학교 1학년에게 동아리 입부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 때 나는 고등학교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잘하는 화학을 중심으로 공부를 할 생각이었기에 화학올림피아드를 준비하고 있었고, 대학 학과도 화학 쪽을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당연히 학교에서 가장 잘 나가는 화학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지연'이라는 한국의 3대 인연의 벽에 부딪혔다.




분명 대전과고는 전국에서 학생을 모집했지만 엄연히 대전시교육청 산하이고, 대전시에 배정된 세금을 활용해 학교가 운영되고 있던 만큼 암묵적으로 일정 비율은 대전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을 선발했다. (광주과고는 아예 비율이 명시되어있다.) 그리고 그러한 정책은 필연적으로 학기 초반 이미 같은 학교, 학원을 다니며 인연을 이어오고 있던 대전 출신 친구들의 그룹화를 촉발했다. 심지어 동아리 선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1학년 위 선배들은 전부 대전사람들이었기에 대전 출신 동기들은 그 선배들을 이미 알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자연히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 시절 소심했던 나는 이를 극복할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쭈굴거리다가 별다른 어필도 해보지 못하고 깔끔하게 동아리 선발에서 탈락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우리 기수가 화학 전공을 지망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이에 기존 2개의 화학동아리로는 모든 인원을 수용할 수가 없어 새로운 화학동아리가 신설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내 입장에서는 인기가 별로 없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동아리에 들어갈지, 아니면 아예 올해 신설되는 동아리를 함께 만들지의 선택지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새롭게 시작해보자! 하면서 호기롭게 새로운 동아리 설립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운이 좋게도 그 때부터 지금까지 늘 대전과고에서 가장 인기 좋은 화학 선생님이 내가 탈락한 잘 나가던 동아리 지도교사를 내려놓으시고 이 새 동아리의 지도교사를 맡아주셨다.


인생사 새옹지마인게, 그 때의 선택으로 나는 지금까지 연락을 이어가는 최고의 은사님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동아리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연락을 드리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나를 포함해 함께 한 친구들 중 몇몇이 초대 회장을 노렸기에 가위바위보로 회장을 정했는데, 이 가위바위보를 이긴 덕에 팔자에도 없던 학술동아리 회장 타이틀을 획득할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애매하게 부원으로 적당히 시간을 보내느니 회장을 하고 그걸 자소서와 생기부에 남길 수 있던 것이 훨씬 남는 장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때를 돌이켜보면 감정적으론 정말 억울했다. 나는 뭐 잘못한 게 없는데 시작부터 같은 지역의 먼저 알던 사람들이 모여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챙겨주고 하는 모습에서 소외감과 박탈감을 많이 느꼈다. 물론 머리로는 그저 저 사람들이 어렸을 적부터 아는 사이니까 편하게 지내는거지 나에 대한 악의가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아닌 말로 나도 수지 친구들이랑 친했으니 다른 친구들 입장에선 우리 사이에 끼기 어려웠을 것 아닌가. 하지만 그 때는 대전 친구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고 그 많은 이들의 견고한 유대감의 틈을 파고들 수 없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은 결국 시험을 잘 봐버리자는 것이었다. 어차피 대학과 학과를 결정하는 것은 동아리 이름이 아니라 내신 등급이니까. 보여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를 숫자로 증명하고, 모두에게 보이는 것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약간 무식하고 유치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결과론적으로는 분노와 좌절이라는 부정적 감정을 열의로 잘 치환해서 긍정적으로 풀어냈지 않나 싶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뽑아낸 엄청난 열의로 첫 중간고사 공부에만 장장 6주를 투자했다. 물론 친구들과 친해지기 위해 탁구도 치고, 축구도 하고, 이런저런 활동에도 종종 끼긴 했지만 다들 학교에 적응하고 힘들었던 고입에 대한 보상을 받겠다는 듯 신나게 세미나실에서 게임을 할 때 이를 악물고 독서실 한구석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고 그 결과는 중간고사 전교 1등이라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성과로 돌아왔다.




그 때 느낀 감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 이 똑똑한 애들 사이에서도 내가 열심히 하니까 되는구나! 하면서 목표를 아득히 초과한 결과를 받아들었을 때 느낀 희열이 생생하다. 중학교 시절 넘을 수 없는 재능의 벽을 느꼈기에 앞으로 내가 1등을 할 일은 없을거라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그 벽을 느끼게 한 친구가 같은 고등학교로 오기까지 했었고 말이다.


그런데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시간을 때려박으니 안 될 것 같았던 것도 되더라. 이 때의 경험이 지금까지 살아오며 그냥 하면 되지. 내가 정말 열심히 하면 뭐든지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을거야! 라는 자신감의 원천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중간고사 이후 이어진 기말고사도 나름 괜찮게 보면서 나는 31기의 첫 학기 1등을 당당히 차지했다. 이 때 2등과 평점 차이가 0.2인가 날 만큼 차이가 꽤 컸는데, 이 덕에 나는 나중에 찾아온 등수 하락에도 절대평가의 힘을 빌려 졸업 성적 상위권을 기록할 수 있었다. 첫 학기가 이렇게 중요하다...!


어쨌든 성적을 차치하고 정말 웃긴건 암만 열심히 공부를 하며 학교를 다녔다 하더라도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보니 어색했던 다른 친구들과 자연히 친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기 초에 가졌던 분노와 소외감은 그저 내 좁은 시야에서 비롯된 자격지심에서 말미암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축구도 하고 탁구도 치고 게임도 하며 친해지고 보니 애들이 초반에 끼리끼리 뭉친건 무슨 악의가 있어서 그런게 아니었다. 그저 그 친구들도 낯선 정글에 떨어진 초식동물들마냥, 새로운 환경에서 조금이나마 편안함을 좇기 위해 발버둥쳤을 뿐이었더라. 공감능력이 부족했던 그 시절의 나는 (지금도 부족하다) 그 사람의 입에서 어떤 말을 듣기 전까진 이들도 같은 사람이고,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다들 힘들었던 시간을 지나 친밀감이 쌓이게 되면서 불편함, 불안감, 패배감은 사라졌고 이와 함께 부정적인 감정에서 초래된 내 동력, 독기마저 완전히 빠져버리고 말았다.


독기가 빠진 나는 당연하게도 공부보다는 같이 놀고 깔깔거리는게 그저 즐거운 고1 남학생일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집중력은 흐트러졌고 첫 시험에서 6주나 되는 시간을 공부에 투자했던 것과는 달리 점점 시험과 과제에 쓰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전교 등수는 학기가 지나감에 따라 점점 떨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행히 나를 지켜준 건 그때까지는 영재고 초기라 존재하던 절대평가 제도였다. 모든 성적을 완전히 점수만을 기준으로 하는 절대평가로 성적을 매겼기에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성적이 떨어지더라도 일정 점수만 넘어가면동일하거나 비슷한 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




한창 이것때문에 말이 많았던 적이 있다. 영재고 아이들의 생기부를 보면 전부 다 평점이 4.0을 넘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기 때문. 절대평가로 성적이 나오다보니 선생님들은 굳이 시험에 변별력을 주어 아이들의 등수를 가려내기 보단 적당히 70% 정도는 A0 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시험을 세팅했다. 그게 전반적인 입시에 더 유리했으니까. 개별 대학의 학과가 보는 건 해당 학과에 지원한 학생들의 학점뿐이고, 학교가 입시 과정에서 적당히 지원과만 잘 분산한다면 얘가 몇등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시절이기에 4.0 넘는 겉으로 보기엔 다들 우수한 성적을 거둔듯한 아이들이 무수히 양산되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나는 첫 학기의 6주의 시간투자를 통해 아직 상대평가에 익숙하시던 과학고 선생님들의 해괴한 난이도의 시험문제를 상당히 잘 풀어냈고, 다른 친구들이 A-를 받았으면 잘했고, B+도 상위권이던 과목들에서 A0, A+를 받아냈었다. 그 때 벌어둔 0.2의 평점은 5학기에 걸쳐 평균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이는 학점 인플레이션과 함께 막학기 전교 30등대를 기록한 나의 나태함을 은밀히 묻어버리며, 최상위권의 최종 성적으로 졸업하는 결과로 이끌어주었다. 이 덕에 대학 학과는 내 마음대로 골라 쓸 수 있었다.


절대평가가 이런 폐해가 있다보니 이제 '상대적 절대평가'라는 해괴한 제도가 도입되어 학교에 따라 다른 기준으로 특정 등수의 점수를 등급의 기준으로 하여 학점을 매긴다고 한다. 아무튼 그래서 요즘은 초반부터 성적 경쟁이 치열하다는 풍문이 들려온다. 말이 좋아 절대평가지 그냥 상대평가 같은데, 왜 굳이 이름을 그렇게 붙였는지는 모르겠다. 만약 그런 제도가 우리가 입학했을 시절부터 들어왔다면 고교 생활이 좀 빡빡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다행히 절대평가이기에 다들 자기만 잘하면 되는 환경이었고, 큰 경쟁 없이 굉장히 평화로웠다.


다들 견제하기 보다는 같이 잘하기 위해 노력했고, 사이도 다들 좋은 편이었다. 이 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등수로 줄 세우고 자르는게 당연히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시절 우리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절대평가로도 이미 충분히 동기부여가 된 구성원들은 좋은 퍼포먼스를 낼 수 있고, 오히려 '견제 없는 협력'이 주는 시너지 효과가 더 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깨달음을 대한민국의 고등학교라는 전쟁터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굉장히 운이 좋은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




이 때 공부를 하며 깨달은 중요한 사실이 나란 놈의 원동력은 승부욕 딱 하나라는 점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내 마음속에 경쟁자, 적을 설정해놓고 임해야 내 스스로 열정을 불태우며 최선을 다한다는 걸 고등학교 1학년 1학기에 알게 되었다. 내 경쟁자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항상 내 모든 집중력이 한계까지 발휘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불필요한 리소스 낭비를 허락치 않는 자제력까지 갑자기 생겨난다. 이 때 알아차린 내 심리의 트리거를 그 이후에도 잘 써먹고 있다.


이렇게 고등학교 시절 내신에 관련된 이야기를 1학년 1학기를 중심으로 길게 해봤는데 이렇게까지 길어진 이유는 딱 하나다. 그 당시의 몇개월이 물론 정신적으로는 꽤나 고달프고 피곤했지만 나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 2개를 스스로 인지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보다 열심히 했을 때 더 좋은 결과를 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있다는 점, 그리고 내가 어떤 경쟁자나 적을 이기기 위한 승부욕이 발휘될 때 최선의 퍼포먼스를 뽑아낸다는 점이 그러하다.


물론 후에 적게 될 고교 시절, 대학 시절의 다른 일화들을 통해 이게 무조건적인 장점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는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런 내 행동 양식을 적절하게 사용할 때 내가 가장 화려하게 빛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인생에서 손꼽을 만큼 의미 있는 한 해가 바로 2014년,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소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