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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뷰 MoBeau Nov 30. 2020

T의 일기장 - 2

2. T의 공감 - 상황과 감정

[이 글은 전적으로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MBTI의 T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일반화하고 있지 않습니다]


공감 [共感]  - 표준국어대사전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


  정말 쉽게 쓰이는 간단한 단어이지만 이 두 글자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사실 의미 자체만 보면 간단명료하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대해 나도 그렇게 느끼는 것, 그게 공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항상 공감능력에 대해 언급하는 걸 보면 공감이라는 행위 자체가 그 정의만큼 간단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공감'이라는 행위를 행하는 방법은 사전에서 명시되어 있듯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해볼 수 있겠다. 


1. 정말 그렇게 느끼거나

2. 그렇게 느낀다고 기분이 들거나


  보통 MBTI의 F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공감능력이 뛰어나다고들 한다. 필자는 T 유형이기에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공감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필자 본인의 경험과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T의 입장에서 조금은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필자 본인이 느끼는 공감이라는 키워드에 대한 경험과 감상을 위주로 글을 풀어가 볼까 한다.  




  필자에게 해당하는 공감의 정의는 두 번째 것인 경우가 많다. 이미 그와 비슷한 상황을 직접 겪어보았기에 내가 그 감정을 느껴본 경험이 있는 게 아닌 이상에는 보통 그런 것 같다. 즉 남의 감정, 의견, 주장을 온전히 느낀다기보다는 그렇게 느낀다고 생각되도록 사고 회로를 돌리는 과정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흔히 역지사지라는 말을 많이 쓰곤 하는데 사람들은 이 말을 공감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필자의 의견은 엄밀하게 따지면 역지사지는 공감의 이성적 방법론이며 두 번째 정의에 해당하는 공감을 위한 방식 중 가장 대표적이라는 것이다. 사실 사람이 뇌가 다 따로 달려있고 사고의 과정이 분리되어 있는데 어떻게 완벽하게 남의 생각에 이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온 말이 내가 그 상황에 처해있다는 가상의 환경을 조성하고 사고해보라는 말일 테다. 그렇게 해야 그나마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한 것처럼 느낄 수 있을 테니까.


  필자의 아버지께서는 이를 굉장히 강조하시는 분이시다. 아무리 사고하는 주체가 다르다고 해도 상대방의 상황에 입각해서 판단한다면 그래도 비슷하게 사고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고, 이 흐름을 잘 캐치한다면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적어도 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이 주요한 논지였다.




  사실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그렇게 그 필요성을 심각하게 인지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사실 학생이라는 직업과 미성년자라는 상황 속에서 아무리 다른 삶을 살더라도 각자 생각할 수 있는 범위의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다. 게다가 학년이 바뀌면서 반이 바뀌고, 그 구성원이 그 전년도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실질적으로 사회생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는 상황이 학교 생활의 특징이고, 아무래도 정말 잘 맞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깊은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며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미성년자인 점은 동일했지만 매년 구성원이 바뀌는 환경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필자가 다닌 고등학교는 한 학년이 90명에 불과해 보통 다른 반이라 할지라도 서로 다 알고 지냈다. 그리고 동아리, 연구 활동 등을 통해 다른 반 친구들과도 교류할 기회가 많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기숙사 학교였기에 모든 생활공간과 시간을 공유했다.


  생각보다 하교 이후 시간을 공유한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실질적으로 기숙학교가 아니라면 등교에서 하교 사이의 시간은 대부분 수업시간이고,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다 합쳐봐야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적당히 시간만 보내다가 귀가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과정에서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갈등이 발생하거나 감정적으로 서로 상처가 되는 상황이 만들어질 경우가 없었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함께 하는 시간에는 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이 발생하는 일들이 많아졌고 이는 필연적으로 예기치 못한 상황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대학에 오고 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에 나와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그 범주는 점차 넓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감이라는 키워드는 계속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사고하는 과정이 사람마다 다르고,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하지만 고등학생이었던 필자는 그 노력의 방법을 잘 몰랐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처럼 관련된 상황에 대한 고찰의 경험이 부재했고, 애당초 그저 내 말이 맞고, 남은 틀리다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오만한 자세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 이해가 가지 않으면 신경 쓰지 않는 마음 편한 인생을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내가 생각했을 때 이해"가 되고 안 되고는 전적으로 논리적 사고 과정에 기반했다. 필자가 이로 인해 트러블을 일으켰던 아주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다음과 같다. 체육 시간에 수행평가로 농구 팀 게임을 한다고 생각을 해보자. 농구를 끝내주게 잘하지는 못하는 내 입장에서는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결국 다음과 같은 사고 과정을 통해 결론에 도달했다. 그 과정은 이렇다.



이겨야 한다 
-> 상대보다 점수를 많이 내야 한다 
-> 우리 팀은 전체적으로 농구를 잘 못한다 
-> 이런 상황에서 점수를 제일 쉽게 내는 방법은 그나마 제일 잘하는 친구에게 공을 몰아주는 방법이다
-> 상대도 반대로 생각할 것이다 
-> 상대가 점수를 못 내게 하려면 상대 중 가장 잘하는 친구를 막아야 한다 
-> 막으려면 적어도 룰을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막아야 한다
-> 룰을 알아야 한다
-> 나는 적어도 룰은 안다
-> 하지만 나는 수비 방법에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 거칠게 하는 수밖에 없다 
-> 거칠게 상대 에이스를 막는다


  이런 논리 회로가 순간적으로 촤르륵 돌아가며 내가 수비에 집중하겠다고 먼저 팀원들에게 이야기를 했고, 공격은 다른 친구들에게 맡긴 채 열심히 육탄 방어를 했으며, 결국 어떻게 어떻게 경기를 이겼다. 그리고 굉장히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여기까지만 보면 전략의 승리라고 판단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건 우리네 인생은 그 게임 한 판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논리, 그리고 그 게임의 승패와는 별개로 그 과정 속에 있었던 감정적 소요는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점을 완전히 무시했다. 나는 합리적으로 이 경기에 집중했을 뿐이기에 그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다른 사람의 감정, 의견을 일절 고려하지 않은, 공감의 정의를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던 것 같다.


  그랬기에 그 몇 분 안 되는 경기로 인해서 함께 운동을 했던 친구들과 사이가 소원해졌다. '쟤는 프로도 아니면서 유난이다', '혼자 논리적이고, 혼자 세상의 진리 인척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사실 그때는 별생각 없었다. 왜냐면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내가 맞으니까. 그 중요도가 어떻게 되었던 내가 임한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과 그 이후의 생활은 별개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가만 생각을 해보고, 그 밖에도 다양한 사건들을 겪으며 마음가짐이 조금은 바뀌었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완벽하게 타인의 감정에 동화되는 방법을 모르겠다. 그저 시간이 지나며 축적된 케이스를 바탕으로 공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일 뿐, 그렇게 했을 때 경험적으로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뿐이다. 



 


  보통 사람들이 공감이라고 한다면 상대방의 상황, 감정을 먼저 배려하고, 더 감정이 상하지 않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T는 그러한 상대의 입장보다는 절대적인 논리적 흐름에 더 집중하는 것 같다. 이는 사실 공감의 정의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 같다. 어떠한 인과관계로 인해서 상황이 발생했다면 그 상황에 더 집중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이러한 경향성은 아무래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감정을 사고 과정에서 배제하게 만든다. 결국 그 결말은 논리적으로 옳다면 그게 맞는 거다 라는 생각에 점철되는 것이다.


  이처럼 T는 상대의 감정을 본능적으로 느끼는데 취약하기에 필연적으로 머리를 굴려야 한다. 보통 사람들이 여기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나 자신의 상황에 대입해보고 시뮬레이션해보는 과정을 거치거나, 내 경험이 미루어 생각해보거나, 이미 학습된 정형화된 대답을 예쁘게 포장해서 내놓아야 한다. 그러한 일이 어떻게 보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역지사지가 아닐까.




  '공감'이라는 단어가 온전히 상대의 감정을 느낀다는 심플한 한 개의 문장으로 정의되지 못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 이유가 있다면 필자는 그것이 정말 그렇게 느끼는 진실된 공감그렇게 느꼈다고 생각되게 기분이 드는 꾸며진 공감을 표면적으로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누군가가 괜찮아?라고 물을 때를 생각해보자. 정말 괜찮은지 걱정되어서 묻는 것인지, 이 상황에서 나라면 괜찮아?라고 물어봐 주길 바랄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묻는 것인지, 아니면 보통 사람들을 이 상황에서 다들 그렇게 물어보니 묻는 것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자니 내가 딥러닝 된 로봇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가긴 하지만 뭐 이러한 방식의 고민 역시 사람들 사이에서 어우러져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이러한 생각의 연습을 통해 적어도 나로 인해 내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소중해질 사람들이 상처를 받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이 분석이라는 껍질을 뒤집어쓴 날카로운 말 한마디에 상처 받지 않도록 신경 쓰고 살아보려고 하는 나날이다. 항상 무슨 말을 하기 전에 한 번은 "역지사지"를 해보려 한다.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렇게 한 번 한 번 노력할 때마다 나로 인해 상처 받는 사람이 줄어드리라 믿는다.





P.S.  다소 극단적으로 글을 풀어봤다. 아무래도 내 머릿속에서도 정리가 완벽하게 되지 않은 주제이니만큼 많은 이견들과 발전 방향에 대한 코멘트가 절실하다. 



P.S.1. 사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지를 적당히 잘 프로그래밍하면 그게 그냥 A.I. 가 되는 게 아닐까 싶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인간과 프로그래밍된 로봇의 리액션만 놓고 비교하면 솔직히 분간이 잘 안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P.S.2. 절대로 T가 다 내 글에 묘사한 것처럼 생각할 거라고 보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냥 필자가 인격파탄자일지도 모른다. 그냥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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