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불쌍하고 안쓰럽게 여겨 저절로 기운이 떨어지고 조심과 생기를 잃은 눈빛을 지니게 된다. 자기 연민은 우울함이나 우울증 증세와 유사성을 띄기도 하지만 추후 양상을 비교하면 엄연히 다른 감정 세계이다. 자기 연민은 결코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거나 무능한 저지로 내몰지 않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으로 자기 연민은 자기 계발에 추진력을 가한다. 남들은 겪어보지 않았을 비참한 현실은 세상이 나를 시험하는 것으로 여긴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이기에 훗날 값지게 쓰이기 위해 잠시 시련이 닥쳐 단련하는 중으로도 생각한다. 이미 수많은 위인전이 말하는 시련과 극복이 그 증명인 셈이다. 위인의 앞길은 기다렸다는 듯 장애물에 가로막히지만 그들은 힘겨워도 끝내 무언가를 성취한다.
우리 대다수는 어려서부터 여러 위인전을 통해 성취와 성공에 이르러면 난관을 뚫어야 한다고 배운다. 수월하게 손에 넣는 성공은 그저 운이 따라서 혹은 뒷배가 좋아서이지 순전히 본인의 의지와 재능은 아니라고 하기 일쑤다.
그러나 정작 현실에선 크든 작은 성공과 성취에는 개인의 능력도 한몫 거들겠지만 복합적인 여러 요건들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빠르게 정보를 얻고 다양한 경험을 쌓고 부족하지 않은 기회를 제공받는 환경과 인맥, 혈통의 지원 등으로 성공에 다다르는 출발선의 차이 말이다.
특히 현대사회는 타인의 일상과 라이프 스타일까지도 쉽게 엿볼 수 있는 통신망의 확대와 보급으로 비교가 너무나 쉽다. 자신과 자동된 삶을 누리는 이들의 탄탄한 앞날은 곧바로 그보다 못한 자신을 연민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만약 불우한 유년시절을 지냈거나 부모와 골이 깊은 갈등으로 불안을 느낀다면 연민에 점령되는 건 일도 아니다.
자기 연민에 굴복한 이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함으로써 타인의 관심과 기대를 사로잡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일례로 이상의 환심을 사려고 일부러 자신의 어두운 가정사를 담당하고도 처연하게 묘사하는 이들을 들 수 있겠다. 이들은 이야기의 종지부로 상대 이성의 존재감을 부각시켜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털어내주는 마법 같은 느낌을 전달한다.
결국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이 갈구하는 것은 하나로 집중된 관심이다. 자신 하나에게만 집중된 무한한 찬사와 거절을 모르는 승낙만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감독 톰 티크베어 영화 향수의 그르누이가 바로 이렇다. 쥐스킨트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사생아로 시장 바닥에서 비위생적으로 태어나 곧장 버려진 그루누이가 최고의 향수를 제조하는 여정을 스크린에 담아냈다.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가 부재로 붙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일정 부분 노출한다. 제목이 주는 선입견 때문에 영화 관람을 포기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살인자가 주인공이라면 끔찍한 살인 장면들로 도배된 영화일 게 틀림없다 짐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살해 장면은 영화 속에서 중분이 묘사된다. 하지만 분노로 일그러진 김정의 분출로 살인을 계획하지 않는 점에 이 영화는 여느 살인자를 다룬 이야기들과 구별된다.
마치 살인을 맹목적 추구의 한 수단으로 삼아 귀중품을 다루듯 혹은 미학적 유물을 발굴해서 보존하는 방법으로써 활용한다. 피살자를 다루는 장면들이 마치 예술 행위와 흡사한 것이 그 이유이다.
그르누이는 살인의 비도덕성과 범죄의 측면을 알지 못하며 오로지 자신의 목적과 희망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살인을 저지른다.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고 사회의 질서와 규칙을 파괴하는 범법행위가 확실하지만 그르누이의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의 내면 깊숙한 고독과 처연함에 빨려들어 어느새 그를 위로하고 싶어 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특히 그의 궁극적 욕구를 발견하면 왜 그가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공감과 반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르누이의 모든 요건과 환경은 자기 연민에 빠지기에 맞춤이었다. 하물며 정체성과 상응되는 고유의 체취마저 전혀 없이 누군가에게 아무런 인상과 기억마저 남기지 못해 외로움은 아주 깊어졌을 것이다. 그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미모의 여인들 목숨을 끊어 그 체취를 소유하면 자신 또한 그와 비슷한 아름다운 매력을 지닐 것이라 말하고 실천하였다. 결국 그는 세상의 이목을 사로잡고, 모두의 경탄으로 숨 쉬고 싶었던 욕망을 실현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마지막 표정은 기쁘지만은 않다.
그리고 감독 데이미언 셔젤 영화 위플래쉬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 영화에선 자기 연민의 충돌을 감상할 수 있다. 외형상 스승과 제자의 대립 구도이지만 각자 자기 연민에 위해 타인과 공감할 줄 모르는 모습들을 영화의 마지막까지 목격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자신을 연민한다. 그러나 우리 대다수는 연민의 방향을 자신이 아닌 바깥의 무엇으로 돌릴 줄 안다.
이것은 교육의 결과이기도 하고 본성의 발현이기도 하다. 일찍이 동서양의 여러 현자와 철학자들이 스스로에겐 엄격하길 강권하고 연민은 외부로 분출시켜 덕을 쌓길 가르쳤던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