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한 해
‘환승입니 –’
단말기에 댄 카드를 지갑에 다시 넣기도 전에 버스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가 옆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에어컨 바람이 피부에 닿으며 더운 계절의 냄새가 풍겨왔다. 창밖에는 나무마다 초록 이파리가 하나둘씩 피어나고 있었다. 그 순간, 몇 주 뒤면 맞이할 여름이 문득 떠올랐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봄이면 동네 벚꽃을 보러 사람들이 몰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지낼 아파트 단지의 거리가 벚꽃으로 뒤덮인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울 거라고 했다. 가을이 저물 무렵,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이곳에 언제까지 머물지 몰라 실감은 나지 않았다. 이후 이곳에서 지낼수록 길가의 나무들은 잎이 하나둘 메말라 가며 떨어졌고, 어느덧 앙상한 가지의 자취가 눈에 익었다. 공허한 회색 하늘 아래 분홍빛 풍경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봄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몇 달 전 들은 이야기대로, 집 밖을 나서자 사방이 분홍빛 솜털처럼 흩날리는 꽃잎으로 물든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며칠 지나지 않아 빛바랜 한지처럼 우수수 땅으로 떨어졌다. 야속할 만큼 빠르게 가지들은 푸른 새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봄은 잠시 얼굴을 비춘 뒤, 곧바로 여름을 불렀다.
찬 기운만 맴돌던 새벽, 손은 비어 있었지만 언젠가 그 손끝에 닿을 봄의 향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고요히 뻗은 손으로 다음 계절에게 품을 내어주고 있었다.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찰나를 바라며 제 자리를 지켰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볼에 움푹 패일 웃음 자국을 기대하며.
버스 안에서는 이미 풍겨오는 여름 내음에 익숙해질 즈음, 창밖 도심 풍경도 푸른 잎으로 가득 차 있겠지.
부산에 온 지 8개월이 되어갈 무렵, 런던과 달리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여전히 길게만 느껴졌다. 퇴근길에는 도로 위로 흘러간 단 몇 분도 아까웠다. 매일 저녁 버스에서 내려 빨간불만 바라보았다.
그날은 붉은 빛깔 바람에 흔들리던 나뭇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와 달리 검은 줄기 위에 작고 희디흰 벚꽃이 피어 있었다. 안부를 묻는 꽃의 첫인사는 매해 낯설게 다가온다. 찬 공기가 맴도는 밤하늘 아래, 그 낯섦이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아직’이라는 이름의 서글픔이 밀려왔다.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모든 계절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여름에는 햇빛 아래서 살이 그을려도 웃음을 멈추지 않고, 가을에는 다가오는 추위를 애써 멀리하기보다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산책로를 걷고, 겨울에는 짧아진 낮이 주는 아쉬움 대신, 일찍 찾아오는 노을 앞에서 붕어빵의 달달한 온기를 취하고, 계절마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그 속의 그리움을 애틋함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그렇게 한 해를 보내준다면.
겨울이 더디 지나가더라도 피어날 꽃을 한결같이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
원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재촉하기보다는, 그 떨림을 사랑스럽게 여겨줄 수 있는 사람.
혹여 피어난 꽃이 무겁지는 않을까, 또 다른 두려움을 품게 되지는 않을까 먼저 걱정해 줄 수 있는 사람.
비어 있는 가지를 보아도 충분히 그 날씨를 만끽할 수 있는 사람.
나의 계절을 누구보다 사랑해 줄 수 있는 마음.
— 부산 광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