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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일로 May 31. 2024

끝자락 달빛

크루아상

6:52 AM. 알람이 울리기 전 눈이 떠졌다. ‘벌써 아침이야.’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흐릿한 시야를 가렸다. 다시 잠에 들고 싶었다. 하지만 의식은 이미 제모습을 갖췄고 남아있던 잠도 모두 달아났다.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땐 커튼 사이로 햇살이 천장 모서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흐르는 정적 속 벽에 스며든 빛깔을 한참 바라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면 블랙홀처럼 침대 안으로 하염없이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일단 나가자.’ 맞춰둔 알람을 끄고 최소한의 준비만 했다. 나가기 전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아는 사람은 마주치지 않길 바라며 집에서 나왔다.


찬 공기에 가라앉은 대문 밖 정경이었다. 밤사이 내린 비에 젖은 낙엽은 햇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은은한 바람을 들이키며 고요한 동네 길을 걷다 보니 굳어있던 몸이 풀리면서 기분도 산뜻해졌다. 그제야 허기진 배도 기척을 냈고 짧은 고민 뒤 집 근처 카페로 갔다. 신문을 넘기는 주름 잡힌 손, 노트북 앞에 찌푸려진 미간, 살랑이는 강아지 꼬리에 덮인 신발. 평일 아침, 카페 안은 이미 사람들로 꽤 북적였다. 다행히 창가 옆에 남은 자리 하나가 보여 서둘러 주문을 했다. 비워진 테이블로 갔을 땐 마치 자신이 맡아놓았다는 듯 의자 위에 햇볕이 내리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커피와 빵이 나왔다. 작은 호흡에도 코끝에서부터 반겨주는 아메리카노 향은 카페 안을 감도는 조화된 커피 향 속 도드라졌다. 크루아상은 둥근 접시에 담겨 있었다. 흰 배경 위에 그려진 크루아상의 황금빛 곡선은 초승달을 본떠 만들었다는 유래를 기억나게 했다. 하지만 겹겹이 쌓인 결을 바라볼수록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되어가는 초승달보다는 공허한 암흑을 마주할 그믐달이 연상됐다. 그릇 안에 담긴 끝자락의 달빛은 씁쓸함을 가져왔다.


멀게만 느껴지던 비자 만료일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 뒤로 아침이 유독 빠르게 온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밤을 쫓는 듯하다. 그리고 따스한 햇볕을 순식간에 가리는 먹구름 아래서 하루에도 몇 번 ‘어쩌면 마지막’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운다. 제멋대로인 영국 날씨처럼. 사람들을 만나면 비자 연장과 취업 이야기가 빠짐없이 나온다. 대부분 그 끝은 ‘모르겠다’라고 매듭지었다. 알고 있었지만, 모른다는 말 뒤에 숨고 싶었다. 런던을 언젠가는 떠나겠지 생각은 했지만 막상 그날이 다가올수록 이곳에 더 머물고 싶어 하는 바람을 굳이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나가는 시곗바늘을 외면해도 내가 서 있는 곳은 끝 무렵이다. 초승달보다는 그믐달에 가까운 런던 생활이다. ‘끝’의 촉감은 매번 낯설다.


움츠러든 내면의 갑갑함이 나도 모르게 입술 밖으로 새어나갔다. 지켜보던 햇빛이 그 불안을 알아주듯 내뱉은 한숨이 커피잔 위에 그려졌다. 핸드폰을 꺼내 초승달(crescent)을 검색했다. 초승달의 정의 아래로 달의 위상에 대한 글들이 나열됐다. 흑백 화면을 내리던 중 문장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습니다.’ 달이 지구 주위를 공존하면서 태양 빛에 반사되는 위성의 표면이 우리에게 보인다는 설명이었다. 애초에 빛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묘하게 위로가 됐다. 스스로 보름달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완성된 모양 이후에 사라지는 게 아닌, 묵묵히 지구 곁에서 자신의 역할을 지킬 때 그 모습 일부가 태양에 의해 비치는 것이었다. 가장 환하고 아름답게. 그믐달은 끝 무렵이 아니었고, 깜깜한 밤하늘에도 달의 존재는 여전했다.


런던을 언제 떠날지, 이후의 삶이 어떨지 아직은 그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불확실 속 지어지는 짙은 그림자로 때로는 발을 내딛기 조차 막막해진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순간들도 마주한다. 달빛의 모습은 달라도 그 안에 여전히 맑고 부드러운 빛이 담겨있듯이. 어둠에 가려진 곳에서 움츠리기보다는 빛이 비치는 곳을 만끽하고 싶다. 매일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때마다 다르게 빛나는 자신의 삶을 충분히 누리는 사람이 되어가길. 그리고 마침내 이곳에서 마지막 노을이 지면 선선한 밤공기를 맡으며 취할 그 무르익은 시간을 기대해 본다. 그러다 또 다른 초승달을 맞이하고.


어느새 맞은편에 앉아있던 햇빛은 창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그란 그릇 위에는 빵 부스러기만 남아있었고 줄어든 무게와 함께 커피잔의 온기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를 나왔을 땐 여름을 불러오는 햇살로 아직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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