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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디 Aug 17. 2020

넌 뭘 그렇게 어렵게 사냐

<리틀 포레스트>의 송혜원과 나

주기적으로 다시 보는 영화가 세 편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바닷마을 다이어리>, 마크 웹의 <500일의 썸머> 그리고 임순례의 <리틀 포레스트>다. '인생 영화'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붙인 건 아니다. 이 영화들이 완벽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시 보는 데에는 그저 각각의 이유가 있을 뿐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네 자매가 집 마당에서 매실 따는 장면 때문에 다시 본다. 수도권 대도시를 벗어나 본 일 없이 혼자 어린 시절을 보낸 나 자신이, 결코 겪어본 적 없을 신기한 그리움을 느끼곤 한다. <500일의 썸머>에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건물들이 한눈에 보이는 장소에 썸머를 데려간 톰이, 자신의 꿈과 취향을 늘어놓는 장면이 가장 좋다. '이런 이야기를 평생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라면 그것이 이상적인 연인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서론이 길어졌는데, 어쨌든 내 생각에 - 과거 경험을 들여다보고 또 찾는 일은, 좋았던 감정을 다시금 느껴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기제의 작동이다. 내가 특정 영화의 특정 장면을 다시 보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리틀 포레스트>는 조금 다르다. 일부러 쓴 약을 들이켜는 마음으로 다시 본다. 나만큼이나 인생을 답답하게 살고 있는 김태리의 '송혜원'을 보기 위해, 2시간 남짓한 이야기를 기꺼이 처음부터 쭉 관찰한다.


혜원은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이다. 남자 친구도 같은 시험을 준비했는데, 혜원은 떨어지고 남자 친구만 붙어버렸다. 도망치듯 고향에 내려온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남자 친구의 합격 역시 그중 하나다. 혜원의 속도 모르고 남자 친구는 계속 전화를 건다. 혜원은 어떻게든 대화를 피하려 하고, 결국 시골이라 전화가 안 터진다며 어설픈 연기를 한다. 전화를 끊으며 혜원은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송혜원, 넌 뭘 그렇게 어렵게 사냐."



스쳐 지나가는 대사다. 작품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장면도 아니다. 하지만 이 말은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다. 나 역시 매 순간 속으로 외치니까. 넌 뭘 그렇게 어렵게 사냐고. 사람도, 일도, 생각도 뭐 하나 쉽게 해내는 게 없냐고. <리틀 포레스트>를 여러 번 봤지만 늘 그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일단 혜원과 내가 처한 상황은 다르다. 나는 혜원처럼 도망치듯 돌아갈 수 있는 고향집도, 불현듯 떠오른 깨달음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할 용기도 없다.

내 오랜 고질병은 '불안'이다. 미움받을지 모른다는 불안, 죽었다 깨어나도 누군가의 첫 번째가 될 수 없으리란 불안, 나 역시 내가 첫째로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없을 것이란 불안. 이 불안은 결국 상처가 되어 돌아올 것이므로, 혼자 적정선을 만들고 벗어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럼 거기서 만족해야 하는 게 맞는데 - 나를 만든 존재(?)는 내게 과도한 감성과, 쉽게 호감을 갖고 빠져드는 성향을 함께 부여해주었다. 너무너무 좋고, 너무너무 하고 싶은데 그걸 참아야 한다니. 그러다 보니 결국 어렵게 살게 되는 것 같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빙 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멈추기도 한다. 송혜원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견디지 못하는 뭐 그런 거.

어렵게 살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다. 가장 큰 변화는 사람과 상황을 무작정 믿어보려 한다는 것이다. 근거 없는 믿음이라 해도 내가 저 사람을, 상황을 믿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시작해보지 못하고 끝난다"는 걸 공식처럼 여기려 노력한다. 사람들이 '행복 회로'를 돌리는 것처럼 '믿음 회로'를 돌려본다고나 할까. 상처 받은 날이 수두룩했던 것도 맞고, 앞으로 역시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상처 없이 지나간 수많은 순간들을, 내가 눈치채지 못한 걸 수도 있겠다고. 그리고 그것이 전부 내가 무의식적으로 발휘한, 사람과 상황에 대한 믿음 덕분이었던 것 같다고.

그러니 불안해 죽겠지만, 오늘도 있는 힘껏 믿어보는 수밖에. 이게 내가 최근 어렵게 살지 않으려 쓰고 있는 방법이다. 문득 송혜원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우스운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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