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 언니네 집으로 11

by 고미젤리

명주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오전 내내 언니를 붙잡고 하소연을 이어갔다.

옛날 같으면 저런 버릇없는 며느리 당장 나가라고 소리소리 질렀을 언니인데, 간병인이 떠주는 밥을 넘기면서도 명선은 명주를 향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파르르 떨리던 명주의 흥분도 제풀에 지쳐 떨어져 버렸다.

명주는 당장 내일부터 이 집에 오지 못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재석이 태어나자마자 똥 기저귀 갈아주며 키운 게 누군데, 언니네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집안 살림 맡아한 게 누군데, 언니 파킨슨병 진단도 벌써 4년이 넘어가는데, 그렇게 계속된 지난한 세월을 오늘 하루아침에 끊어내야 한다니...’

명주는 이런 사태를 깔끔하게 정리해주지 않는 언니가 이제 못 미더웠다. 언니는 정말 엄마 같은 환자였다. 엄마처럼 누워만 있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짧게 깎인 머리와 이상하게 번들거리는 금붕어처럼 동글동글한 얼굴을 가진, 엄마와 똑 닮은 환자였다.

‘내일부터 경로당이라도 갈까? 옆집 할머니 따라 공공근로라도 신청해 볼까? 문화센터 트로트 교실이 그렇게 좋다고들 하던데 그런 거나 한번 배워볼까?’


그녀는 여기저기 주워들은 할머니들의 시간 때우기 일정을 떠올려봤다. 하지만 자식도 없고 돈도 없는 자신이 그런 세월 좋은 할머니들과 같을 수는 없었다. 명주는 아무리 아파 누워 있어도, 명선처럼 근사한 집에 자식새끼들에게 둘러싸여 사는 언니가 부러웠다.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재석은 자신의 공을 인정해 줄까? 이제라도 이야기를 좀 해볼까? 명주는 어쩔 수 없는 심정으로 재석에게라도 하소연을 해보기로 결심하고 전화기를 들고 나왔다. 평소라면 두 발까지 척 올리고 기대앉았을 소파가 보였지만, 저 방 하나에 혜림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여기서 전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신발을 꿰차고 밖으로 나온 명주는 조경이 잘 된 아파트 단지 안, 자신이 좋아하는 그늘진 벤치에 앉았다.

‘재석이한테 앞으로 못 온다고 얘기해 볼까?’

명주가 아는 재석은 이런 다툼의 중재자라기보다 그냥 회피하고 보는 어린 녀석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자기편을 들어줄 사람은 그놈뿐이었다.


‘바쁜데 전화하면 못 받으려나. 자기 엄마 잘못된 줄 알고 놀라서 받으려나.’


명주의 조심스러운 마음과 달리,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전화를 받은 재석은 “이모, 저 지금 바빠요.”라며 퉁명스레 전화를 끊었다.


재석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명주는 섭섭했다.


‘회사 일이 바쁘겠지. 그래도 자기 엄마 전화도 이렇게 받았을까?’


명주는 새삼 자신이 ‘이모’ 일뿐이라는 사실을 확인받는 것 같았다.

별 수 없이, 명주는 결심했다.

아직 뜨거운 여름 햇살을 견디며 유튜브 트로트 메들리를 끝까지 듣고 난 후였다. 그 구수한 노래 가락을 들으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듯, 명주는 이내 동네 마트로 향했다.



여름의 끝자락이라지만 수박은 아직 비쌌다. 이것저것 통통 두드려가며 명주는 실한 놈으로 하나 제대로 골랐다. 두 시간 뒤에 배달해 주겠고 마트 사장이 친절하게 말했지만, 명주는 그렇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그 무거운 수박을 직접 들고 언니네 집으로 향했다.

‘시원하게 썰어서 혜림이 갖다 줘야지. 아까는 내가 너무 흥분했다. 사과해야지. 어깨도 두드려주고 손도 잡아주면서 아픈 어머니 모시느라 네가 수고가 많다 위로해 줘야지.’

수박이 쏙 들어간 손잡이가 명주의 손가락을 파고 들어가고, 명주는 한 손으로 들기 버거운 수박을 이쪽저쪽 바꿔 들었다. 땀이 비집고 나와 등을 적시고, 머리 뿌리에서부터 흘러내린 땀이 눈을 덮어 시야도 가려졌다. 그래도 명주의 마음은 다소 가벼워졌다.


‘반통은 썰어서 언니랑 혜림이랑 나눠먹고, 나머진 깍둑 썰어 찬반에 담아와야지. 오늘 저녁 드라마 한 편 보면서 시원하게 수박이나 먹어야지.’

언니네 집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며, 명주는 지나가는 차들과,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과 끌차를 밀며 산책하는 노인네들을 지나쳤다. 내 집처럼 드나들던 이 친근한 집.



그렇게 명주는 오늘도, 내일도 언니네 집으로 간다.


-끝-

이전 10화비밀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