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

- 언니네 집으로 10

by 고미젤리

어느 날, 평소처럼 현관문 비번을 눌러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비밀번호가 바뀌었나?”


명주는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렸다.


“아줌마. 나 이모야. 문이 왜 안 열려.”


그렇게 잠깐 기다리는 명주 앞에서 문을 연 것은 며느리 혜림이었다.

혜림은 반갑지 않은 얼굴로,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돌리며 ‘안녕하세요.’ 간신히 내뱉었다. 명주는 이 더위에 여기까지 오느라 땀을 한 바가지를 흘린 게 억울해 혜림의 뒤통수에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비밀번호를 왜 바꿨니? 나 오지 말라고 그런 거니?”

명주는 이것이 혜림의 복수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말은 항상 곱게 듣지 않는 혜림의 비뚤어진 심보를 이번에야 말로 고쳐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혜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갑게 답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임시 요양보호사님이 오셔서 바꿀 수밖에 없었어요.”


명주는 그런 혜림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자신의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여기, 새 번호 입력해.”


잠시 혜림의 망설임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준비했다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저 당분간 집에서 일하기로 했어요. 이모님도 안에서 제가 문 열어드릴게요. 저 집에서 조용히 일해야 하니까 이모님도 좀 신경 써 주셨으면 좋겠어요.”


명주는 갑작스러운 통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내가 네 시어머니 동생인데. 지 남편을 어릴 때부터 어떻게 키웠는데’


발끈한 명주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내가 너네 집에 오고 싶어서 오니? 네가 시어머니를 제대로 안 모시니까 나라도 와야 되는 거 아니야? 네가 사이만 좋았어도 내가 이렇게 여기로 출근하겠냐고?”


뒤돌아 서 있던 혜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모님, 이제 여기 오지 마세요. 제 집이에요. 오실 거면 저에게 미리 말씀하시고 약속 잡고 오세요. 그냥 오셔서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오는 거 저 불편해요. 그리고 저희 어머니 돌보시는 분들 계세요. 그분들이 다 잘해주시고 계시니까, 이제 이모님은 어머니 신경 쓰지 마시고 댁에서 쉬세요.”


차갑게 내뱉은 혜림은 그대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명주는 억울했다.


‘내가 또 이렇게 이 집에서 쫓겨나는구나.’

명주는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이런 취급을 받다니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었다.


‘저 새파랗게 어린 게 내려다보면서 눈을 흘기고 따박따박할 말 다하는데 그걸 제대로 반박도 못하고.’

명주는 명선의 방으로 득달같이 달려갔다. 이미 한 바가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명주는 엉엉 소리 내며 울었다.


“혜림이 가요. 글쎄, 이제 나 오지 말래. 정말 나쁜 애네. 언니 말이 맞았어. 나 너무 억울해요. 언니”


명주는 명선이 며느리를 불러 자기 대신 혼을 내줄 것을 기대했다. 아무리 아파 누워 있어도 시어머니의 서슬 퍼런 눈빛을 혜림은 견뎌낼 수 없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눈을 감고 누운 명선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답답한 명주가 언니를 흔들어 댔지만 잠시 실눈을 떠 명주와 눈이 마주친 게 전부였다.

그러는 와중에 처음 보는 간병인이 식사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조용히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간병인은 명주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하며 말했다.


“저... 사모님 식사 시간인데요.”


명주는 언니가 좋아하는 누룽지와 부드러운 소고기 장조림에 계란찜까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쟁반을 쳐다봤다. 역시나 새로 온 아줌마는 눈치도 없이 명주 몫은 준비하지도 않았다. 속상한 마음을 누르며 명주는 부엌에서 밥 한 공기와 숟가락 젓가락 한 세트를 가져와 언니 앞에 앉았다.

“아줌마. 나는 여기 언니 동생이에요. 친동생. 앞으로 매일 올 거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간병인이 서툴러서인지 언니의 입에서 끈적한 무언가가 줄줄 떨어졌다.

“좀 천천히 드려요. 아줌마 성질 급하시네.”


명주는 맨손으로 언니의 입을 닦아주며 말했다.


“이 집은 내가 안 도와주면 되는 일이 없어, 되는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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