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일이면 어머니가 요양원으로 가신다.
나는 갑작스레 결정된 이 모든 일들에 번거롭다는 마음보다 불안함을 느낀다.
‘어머니가 갑자기 못 가겠다 고집을 부리시면 어쩌지?’
어머니는 파킨슨 병을 5년째 앓고 계시고, 이제 제일 최고 요양 등급을 받을 정도로 거동이 불편하시다. 하지만 정신만은 올바르셔서 예전의 위엄의 끈을 어떻게든 유지하려 애쓰고 계신다.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혼자서 꼼짝할 수 없는 몸을 멀쩡한 정신으로 내려다보는 그 마음이 어떨까 생각하면 어머니가 안쓰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나의 감정을 나누기에 우리 사이는 너무 멀고, 갈등의 골은 깊다.
요양원 이야기는 몇 년 전부터 계속 나왔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어머니가 화장실에서 넘어지시고, 이상한 자세로 웅크려 계시다 혈액 순환이 안 되어 119 구급차를 탄 게 세 번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어머니의 보호자로 구급차에 동승했다. 그것도 몇 번 하니 조금 익숙해졌다고, 119 대원들이 오기 전 나는 세수도 하고 선크림까지 바르는 여유도 생겼다. 뒤늦게 나타난 남편에게 시어머니를 인계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머니가 이번엔 못 돌아오시지 않을까?’라고 상상하기도 했다. 입 밖으로 내뱉은 말도 아닌데 자꾸 죄책감이 느껴지는 내 소심함에 ‘혼자 상상도 못 하나?’ 짜증도 났다.
어쨌든 어머니는 매번 집으로 금의환향하셨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죽어도 내 집에서 죽겠다.”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 여긴 어머니 집이 아니에요. 제 집이에요.’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요양 등급을 받으며 나는 우리나라의 복지 제도에 감탄했다. 시간당 3,000원이라는 적은 비용으로 요양보호사 선생님을 하루 6시간까지 쓸 수 있었고, 항상 외로우셨던 어머니는 매달 방문하는 사회 복지사의 관심에 고무되셨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집에서 나의 자리는 작아졌다. 혹여나 요양보호사님들에게 방해가 될까, 오전, 오후 선생님들이 오시는 시간마다 동네 카페와 도서관을 전전했다. 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시는 선생님들을 어르고 달래야 했고, 예고 없이 그만두시겠다 선언하시는 몇몇 분들 때문에 고역도 치렀다.
이런 세월을 거쳐 드디어 어머니가 요양원에 입소하시기로 결정했다.
지난주 금요일 오랫동안 함께한 요양보호사님과 눈물로 인사를 나눴다.
어쨌든 정말 잘 된 일이라고,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는 문 앞에서 부둥켜안고 한참 서로를 다독였다. 전직 일식 돈가스집주인이셨던 요양보호사님은 우리에게 맛있는 카레를 자주 해주셨다. 한 솥 가득 넘치도록 해주실 때마다 나는 다 못 먹고 남긴 모습에 섭섭해하실까 몰래 주변 친구들과 카레를 나누곤 했다. 지난 4년간 거의 한 달에 한 번 카레 잔치였으니, 도서관, 독서모임, 아이 학교 때 친한 엄마들 등, 얼마나 많은 이웃이 그 맛을 봤는지 모르겠다.
또 다른 요양보호사님의 남편은 트로트 가수셨다. 보호사님 입으로 ‘뜬 가수’는 아니라고 하셨지만, 최근 트로트 경연 열풍에 TV에도 좀 나오고 하셨다고, 덕분에 행사가 많아졌다고 자랑하시곤 했다. 오실 때마다 남편 노래를 크게 틀어 놓으시는 게 내 귀에 거슬리긴 했지만, 나야 밖에 나가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수고해 주신 요양보호사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어머니는 오늘 요양원에 입소하셨다.
입소에는 여러 가지 행정절차가 따랐다.
건강검진도 해야 했고, 병원에서 진단서도 발급받아야 했다. 건강검진은 남편이 하루 휴가를 내 가까운 보건소에서 오전 중에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또 일주일 후 직접 수령이라 할 일 없는 내가 가서 발급받아왔다.
사실 제일 간단할 거라 생각했던 진단서 발급이 의외로 속을 썩였다. 마침 담당 의사가 학회 참석 중이라 했고 요양원 입소 전에는 예약을 잡을 수가 없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동네 병원 여러 곳에 진단서 발급을 문의했지만 다니던 병원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만 돌아왔다. 결국 요양원에 양해를 구해 다음 달 정기 진료일에 진단서를 받아 사후 제출하기로 했다.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보험공단에 전화해 ‘시설’ 요양으로 자격을 변경하느라 전화통을 얼마나 붙잡고 있었는지. 한 시간 만에 연결된 통화로 겨우 해결했지만 그 결과물을 받는 데는 또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전산으로는 처리가 되었으니 우편물이 늦게 와도 상관은 없을 거라고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절차보다 더 까다로운 건 어머니의 많고 많은 짐이었다.
큰 박스 3개를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하고도 어머니의 옷장은 차고 넘쳤다. 그동안 방 2개를 차지하고 사셨던 어머니의 짐은 버리고 버려도 끝이 없었다. 작은 거 하나를 버리더라도 어머니의 승인이 떨어져야만 가능하니 그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화끈한 성격의 요양보호사님의 칼 같은 단호함이 없었다면 지금 버린 물건의 반은 살아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2주간의 사투 끝에 어머니 방 서랍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쓰레기통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늘 어머니가 요양원에 입소하셨다.
쌀쌀한 날씨에 어머니는 얕은 기침을 계속하셨다. 나는 묘하게 들뜨는 마음과 섭섭한 마음이 교차하는 가운데 차 안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커다란 짐가방과 함께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요양원에 들어셨고, 활달한 간호사님과 요양보호사님들이 주차장까지 마중 나와 우리를 반겼다. 원래 낯가림이 심하신 어머니는 그들의 환대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다. 감기 때문이라고 하시며 마스크를 벗는 것도 거절하셨다.
한참을 서류에 사인하고 가지고 간 짐들을 정리하고 드디어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남편은 한숨을 쉬고 있다.
“이게 최선인 걸까?” 혼잣말도 한다.
그렇지만, 이게 최선이다.
나에게도, 남편에게도, 그리고 시어머니에게도. 우리 모두에게 이게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