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움)
10월 15일~17일 포르투갈 리스보아(발렘 지구, 신트라)
오늘 아침에는 전철을 타고 발렘 지구에 갔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들어가는 줄이 몇 개의 줄로 이어져있다. 우리는 성당의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는 줄을 지나야 하는데 다행히 미사참례자들은 줄 서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누엘 왕의 이름을 딴 마누엘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은 여러 가지 양식이 혼합되어 굉장히 웅장하고 천정도 높았다.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도 일요일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많았다. 미사가 끝나고 성당 내부를 돌아보고는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인도를 발견하고 돌아온 바스코 다가마와 그 일행들의 귀환을 기념하기 위해 마누엘 1세가 이 자리에 수도원을 지었다고 한다. 이것을 짓기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번성기의 포르투갈의 모습이 수도원으로 대변되는 것 같다.
미세하고 아름다운 세공으로 조각된 거대한 성 같은 수도원의 모습은 경건함과 더불어 그 시대의 이름난 건축가의 작품임을 느끼게 한다.
수도원과 연결된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죽 둘러보고 나와서 베라르도 컬렉션 현대미술관에 들어갔는데 미술관 규모도 크고 작품들도 회화에서 조각, 설치미술품 등 유명한 화가의 그림들부터 나에게는 생소한 이름의 현대적인 기발한 작품들까지 다양하게 많았다.
우리나라의 백남준 선생의 비디오 아트도 있어 반가웠다. 우리는 재미있게 관람하고 맞은편에 있는 발견 기념비에 올라가니 발렘 지구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강이라고 하기보다는 바다같이 보이는 타 구스 강 옆으로 현대적인 건물들과 붉은색 지붕의 예쁜 주택들 그리고 멀리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와 비슷한 4월 25일 다리와 어우러진 발렘 지구의 모습은 화사하면서 탁 트인 품이 넓은 얼굴의 리스보아였다.
모두들 먹어보는 에그 타르트도 먹고 지하철을 타고 리스본 시내로 돌아와 어제와는 반대편의 언덕에 있는 식당을 가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이곳은 관광객으로 붐비는 평지를 벗어나 타일 바닥의 계단을 기분 좋게 하나씩 오르다 보면 건너편 오래된 성과 어우러진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계단참에 마련된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유머가 넘치는 식당의 주인이 차려주는 생선요리를 와인과 함께 맛있게 먹으며 눈으로는 건너편의 고성을 바라보았다. 어제 트램을 타고 마저 가보지 못한 곳을 눈으로만 보려니 아쉬웠다. 와인 한잔에 기분이 좋은 남편의 얘기를 들으며 계단을 내려오니 여기저기서 혼자 버스킹을 하는 연주자들이 보였다.
두 명의 관객을 앞에 앉히고 열심히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젊은이가 있고, 다른 쪽에는 가녀려 보이는 젊은이가 긴 담뱃대 같은 관악기 알프호른을 받침대에 올리고 연주를 준비한다.
리스보아에는 화려하지 않지만 누추하지도 않은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며칠씩 화염으로 타오르던 도시와 그로 인한 수만 명의 사람들의 죽음 앞에 탄식하면서도 다시 새롭게 지진에 맞서 도시를 설계하고 재건한 저력이 숨어있는, 그래서 당차 보이는 그런 도시다.
언덕을 오르며 변하는 풍경을 만들어내는 도시의 모습이 지혜롭다. 거리의 바닥도 타일로 무늬를 만들어 멋지게 연출하는 미적 감각들이 부럽다. 또한 언덕을 오르는 색색의 트램들과 평지를 오가는 트램들의 모습이, 우리 곁에서 사라진 그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다음 날 민박집의 아침을 준비하는 유학생을 만났다. 학교에 가기 전 이곳 민박집에 일찍 와서 아침 준비를 거들고 식탁을 차리고 본인도 밥을 먹고 식탁을 깨끗이 치운 뒤 등교하는 믿음직하고 그러면서도 조금 짠한 마음이 들게 하는 여학생이다. 쾌활하고 재빠른 솜씨로 식탁을 차리고 정리하는 모습이 대견하다. 바쁜 학생과 얘기를 나눠볼 여유는 없었지만 민박집 안주인과 서로 든든한 관계인 듯 좋아 보였다.
오늘은 시내 큰 빌딩 안으로 올라가 기차를 타고 신트라에 갔다. 언덕에 건물들이 많은 도시라서 그런지 기차도 지하가 아닌 언덕 위의 건물 안에서 출발하는 것이 신기했다. 신트라 안에서 관광지만 왕복하는 버스를 타고 무어 성 앞에 내렸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여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무어 성의 성벽을 걸으며 중세시대의 영화 한 장면이 그려졌다. 성을 함락시키려고 쳐들어온 적들을 성루에서 화살을 쏘며 갖가지 방법으로 물리치는 병사들의 긴장된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며 성 밖 아래 멀리 보이는 마을과 성벽 사이의 깊이가 느껴지고, 꽤나 길게 이어진 성벽길을 걸으며 안갯속에 까마득히 보이는 돌무더기며 나무들이 우리가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를 느끼게 했다.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가 살았을 페나 국립 왕궁에도 들어갔다. 왕실의 생활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왕실에서 쓰던 침대, 의자, 식탁 가구, 주방 기구, 아름다운 식기와 찻잔 등이 방마다 이어지며 있었다.
발코니와 같은 회랑으로 이어져 밖의 경치도 바라보게 지어졌고 역시 타일로 외부 벽을 장식하고 내부에도 그림과 푸른 타일이 벽을 산뜻하게 만들었다.
그곳에는 몇백 년 전 왕정시대의 왕과 귀족들의 취향이 배어 있었다. 나에게는 나란히 정렬되어 걸려있는 팬과 냄비가 있는 주방이 인상적이었다. 이곳은 처음에 수도원이었는데 1755년 대지진 때 많이 파괴되어 있다가 다시 왕궁으로 1854년에 완공하여 왕실 별장으로 쓰다가 공화정 이후 박물관으로 되었다.
지금은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되어 이렇게 관광객들의 방문이 많다. 절벽 위에 지어진 성은 안개에 싸여 그 신비를 더해주었다.
민박집에서 말해준 Cascais Natural Park에 들어갔다. 자연적으로 생긴 오래된 동굴들이 있고, 제주도의 곶자왈처럼 자연스럽게 멋대로 가지가 뻗어 나간 나무와 식물들이 자라고, 무어 성을 본뜬 듯 짧은 성벽과 성루도 있고 달팽이처럼 돌아가며 내려갈 수 있는 굴도 있어 신비했다.
어린아이들이 함께 오면 좋아할 곳이 여럿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린이와 함께하는 관광객들이 많았다. 우리도 동심으로 돌아간 듯 이곳저곳을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면서 한참을 그곳에서 머물렀다.
신트라 기차역으로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버스가 서는 중간지점에서 창밖에 서있는 '미스 최'를 보았다. 창문을 열고 '미스 최'와 인사하고 잠깐 내렸다가 다음 버스를 타자고 남편에게 말하니 그냥 가자고 한다.
관광객들이 많아 버스를 다시 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 할 수없이 버스 안에서 작별인사로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묵시아에서 헤어지고 거의 열흘 만에 보는 '미스 최'는 곁에 일행이 있는 듯했다. 아마도 순례길을 걸으며 만났던 사람들과 어딘가에서 오늘 우리처럼 만나서 함께하고 있는 것 같다.
기차를 타고 다시 리스보아로 들어와 남편이 추천받은 고기가 맛있는 식당을 찾아갔다. 예약을 하지 않아서 조금 기다려 보라고 하더니 테이블로 안내해 주었다. 아마도 예약자 외의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방인 듯했다.
깔끔한 분위기의 방에는 몇 개의 테이블이 있었는데 우리가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빈 테이블이 손님들로 가득 찼다. 대부분 젊은이들인데 주문하는 음식을 보니 모두 맛있어 보였다.
우리는 남편이 소망하던 대로 갈비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고기는 알맞게 구워져 뜨거운 돌 위에 올려져 나오고 신선한 야채와 소스가 어우러진 샐러드와 와인을 곁들인 식사는 생각 이상으로 훌륭했다. 가격도 비싸지 않았고 분위기도 좋아 오래도록 기억날 것 같았다.
즐겁게 식사하고 리스보아 시내를 동네 산책하듯이 걸어 다니며 며칠 동안 정이 든 거리에 아쉬움을 남기고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두 달의 여정이 때로는 힘들어 집으로 빨리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막상 내일 집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서운하다. 그러나 다음에 여행을 하게 된다면 이렇게 긴 여행은 하지 말자고 남편과 무언의 결의를 다졌다.
민박집에서 마지막 아침을 먹을 때 함께 식사 중이던 남학생이 본인도 오늘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우버 택시를 불러서 같이 타고 가자고 해서 함께 공항으로 출발했다. 학생이 애플 핸드폰 쓰는 걸 본 리스보아 운전기사가 한국의 삼성폰이 얼마나 좋은데 그걸 쓰냐면서 오히려 학생에게 묻는다. 자신은 한국의 자동차와 핸드폰 등 좋은 제품이 부럽다면서 학생에게 삼성폰 쓰라고 말을 한다.
우리는 서로 하하 웃으며 즐겁게 공항에 도착해서 기다리다 비행기 타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경유하게 되었다. 공항에서 기다리면서 보니 화물들을 비행기로 옮겨 싣는 모습들이 보인다. 가끔 여행가방들을 잃어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어 우리 배낭도 경유되는 비행기에 잘 옮겨 실어질지 걱정이 되었다.
여행에는 항상 두려움과 기쁨이 교차되는 걸 경험한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함께하는 사람들과도 투닥투닥하게 되는 것 같다.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느꼈던 것처럼 삶의 까미노 리스보아에서도 호기심과 두려움이 섞이면서 즐거움과 추억이 만들어진 것 같다.
이제, 때로는 지루할 수도 있고 그래서 다시 어딘가로 떠나기를 갈망하게 될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긴 밤을 지나 그리웠던 그러나 조금 낯설어진 집으로 돌아왔다. 달라진 공기와 익숙한 말씨와 길들이 반갑고도 새삼스럽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