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의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스페인에서 보던 풍경보다는 덜 풍요롭고 조금 투박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면서 짧지만 강하게 보냈던 파티마에서의 여운이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우리를 침묵하게 했다.
나는 나대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창 밖을 보고, 남편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어느새 소리 없이 잠이 들었다. 이제 순례의 일정은 모두 끝나고 리스보아 한인 민박집에서 보내는 며칠간의 자유여행이 남았다.
2년 전 순례길을 걸으면서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젊은이가 산티아고 도착 후에는 포르투갈의 포르투와 리스본을 여행하려고 한다는 얘기를 했었다.
우리는 마드리드로 여행을 가려고 미리 민박집과 돌아갈 비행기도 예약을 해놓은 상태라 일정을 변경할 수 없어 아쉬워하다가 예상보다 산티아고에 일찍 도착한 덕에 포르투 만 2박 3일 여행하고 마드리드에는 야간 버스를 타고 갔었다.
야간에 버스를 타는 게 얼마나 피곤한지 그때는 전혀 생각 못했었다.
장시간을 가야 되니 앞자리에 모두 앉은 게 잘못이었다. 버스에 기사가 두 명이 함께 타서 기사를 졸지 않게 하느라 계속 큰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더구나 버스에 집시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러 명 타면서 짐을 짐칸에 두지 않고 들고 타려니까 기사가 날카롭게 견제하며 전부 짐칸에 넣으라고 강하게 말하자 분위기가 약간 살벌(?)했었다. 또한 운전하면서도 그들을 계속 관찰하면서 가니 앞에 앉은 우리는 무엇 때문에 기사가 계속 신경 쓰는지 몰라 조금 불안했었다.
또한 고속버스는 우리나라와 같은 시스템이 아니라 중간에 몇 개의 도시에 들어가 정류장에서 한 밤중에 승객을 내리고 태우면서 쉬다가 출발을 했다. 스산하고 어두컴컴한 정류장에서 20분 이상을 대기하는 것은 두렵고 힘들었다.
유럽의 고속버스 시스템이 버스 기사의 휴게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것은 대강 알았지만 전세버스가 아닌 일반 고속버스를 타고 그것도 밤중에 그것을 경험하는 것은 긴장되고 피곤했다. 순례가 끝난 후 나는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그 야간 버스를 타고 가느라 마드리드에서 약까지 사 먹으면서 감기 때문에 고생했었다.
그러나 남편은 그런 경험을 언제 해보겠냐고 겁이 나면서도 흥미로워했었다. 그 덕분에 이번 순례길에 살라망카도 갈 수 있었으니까.
다행히 파티마에서 리스보아 까지는 멀지 않아 두어 시간 지나서 도착했다. 광장을 지나고 골목을 찾아 언덕을 올라가 벨을 누르면 '벨라 리스보아' 한인 민박집이다. 시내에서 가깝고 민박집 근처는 주택들이 많아 조용하다.
우리는 17일 한국으로 떠날 때까지 있어야 돼서 도미토리 방을 선택했다. 각각 남 녀 도미토리 방을 이용하면 하루에 40유로씩 절약할 수 있고 매일 함께 다니는 남편과 밤 시간이라도 떨어져 다른 여행객들과 얘기도 나눠보고 싶은 이유였다.
민박집주인은 아이들이 어린 젊은 부부였다. 친절하고 동네에서 자주 만났던 이웃처럼 친근했다. 하루 숙박비에는 한식 아침식사비가 포함되어 있어서 괜찮았다. 2년 전 마드리드 한인 민박집도 도미토리는 숙박비가 같았고 아침도 한식을 제공해서 좋았다.
2인실을 꼭 쓰지 않아도 된다면 여행비도 절약되고 다른 곳을 여행하고 오신 분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는 재미도 있어 좋은 것 같았다.
방을 배정받아 들어가니 우연히도 파티마에서 첫날 만났던 젊은 아가씨가 있었다. 반갑고 신기해서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전날 미사와 특별 행사로 늦게까지 있었을 텐데 숙소에는 잘 갔었냐고 물어보니 차가 없어서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의자에 앉아 잠을 잤다고 했다.
강화성당 부부도 함께 그곳에 있었다니 안타까웠다. 그분들은 아침에 헤어져 만나지 못하고 본인만 이곳으로 와서 계속해서 잠만 잤다고 하며 몹시 피곤해했다.
우리는 민박집주인이 알려준 집 근처의 맛집을 가기 위해 현관 열쇠를 챙겨서 나왔다. 언덕을 내려오다 오른쪽으로 난 골목을 들어가니 음식점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우리가 찾던 집에는 손님들이 많았다. 요리를 내오고 주문을 받는 사람은 남자 둘이었는데 몇 달 동안 여행을 다녀오느라 문을 닫았다가 며칠 전에 다시 영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들은 일을 해서 얼마간 경비가 모아지면 가게문을 닫고 여행을 하다가 돌아와 다시 문을 열고 일을 하는 것을 즐겨한다고 말했다. 여행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집인 듯 손님이 계속 들어왔다. 생선요리를 주문했는데 아주 맛있었다.
주문표의 그림을 보고 시켰는데 생선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여행 후에 즐겁게 손님을 맞으며 유쾌하게 일하는 젊은 주인들의 모습이 좋아 보였다. 아마도 여행에서 돌아오면 새 메뉴를 내어놓아 더욱 인기가 있는 집인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골목을 내려와 조금만 지나면 각각의 상점들이 즐비하고 광장과의 거리도 멀지 않다. 워낙 걷는 게 습관이다 보니 웬만한 거리는 모두 가깝게 느껴진다. 시내의 큰 광장에 가니 젊은 여행객들이 광장에 가방을 모아놓고 즐겁게 놀고 있고 분수대 근처에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담소하는 커플들도 많았다.
포르투갈의 치안 상태는 좋은 것 같았다. 거리에 여행객들이 밤늦도록 어울려 놀고 있었고 상점들이나 음식점들에도 손님들이 많았다. 여기도 상점 안 보다는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와 음료를 즐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첫날 저녁이라 느긋하게 광장 분수대 근처에 앉아 주변을 바라보다 숙소로 돌아왔다.
광장 바닥의 타일이 물결처럼 디자인되어 불빛에 반짝이니 물결이 이는 듯했다.
이튿날 아침 8시에 민박집에서 준비해준 아침식사를 맛있게 먹고 거실에서 리스보아 근교 여행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직접 그려서 만들어 놓은 지도를 하나씩 주고 리스보아 시내팀, 발렘 지구팀, 신트라팀 등으로 나눠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리스보아 시내를 관광하기 위해 집 근처에서 트램을 타고 '리스본의 야간열차'를 생각하며 언덕을 올라가 리스보아 시내를 한눈에 보며 맞은편 언덕 위에 지어진 알록달록한 색깔의 집들을 보았다.
'리스본의 야간열차' 영화에서 나왔던 장소-높이 가림막을 쳐놓아 제대로 보이지 않아 잠깐 벤치에 올라가 보았다.
300여 년 전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이어진 화재로 도시가 며칠씩 불타 리스보아 평지인 바이샤 지구뿐 아니라 언덕 위의 몇 지구 외에는 대부분의 집들 85% 정도가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복구되었다는 것을 아침에 듣게 되었다. 그때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고 무질서와 혼란은 전쟁 때보다도 더 심했다고 했다.
건물이 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내진 설계를 하면서 100년에 걸친 도시 재건의 노력 끝에 오늘날의 리스보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진이 300년 주기로 온다고 알려져 도시를 새롭게 건설하기보다는 유지하면서 산다고 현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전해주었다.
리스보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들었던 구도시의 첫인상이 유럽의 다른 도시에 비해 조금 만만하다는 느낌이었는데 얘기를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 60~70년대의 '산동네'같은 느낌인데 지붕의 색깔과 타일 벽의 색감이 어우러져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자연적인 조건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높낮이가 다른 주택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화사해 보이는 모습이 우리나라 산동네의 모습과 다른 것은 주택이 갖고 있는 색감의 힘일까?
지금은 모두 고층아파트로 변해버린 우리나라 일명 '산동네'의 모습이 산뜻하고 깨끗한 환경으로 바뀌어 좋아졌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한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아래에서 걸어 올라가면서 오밀조밀 나뉜 골목길을 걷다 보면 집집마다 한 두 그루씩 담장 가까이 심어놓은 라일락이며 개나리, 감나무, 대추나무들이 정겹고 예뻤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회색의 담장 위에 네모난 아파트들만 즐비해 골목의 아름다운 정경을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우리도 자본의 논리만 따지지 말고 미학적으로 주택을 정비하고 지을 수는 없는 걸까? 여행을 할 때마다 지형을 잘 살려 예쁘게 집을 짓고 가꾸며 편리함보다는 전체적인 도시의 미학을 선택한 주택들을 보면 이렇게 아쉬움이 밀려온다.
트램을 타고 올라온 도시의 언덕에는 평지와 같은 길이 약간의 경사를 갖고 이어지고 트램도 다니고 자동차도 다닌다. 우리는 트램을 타지 않고 걸어서 도시를 구경했다. 중간에 오래된 작은 식당에서 점심으로 생선요리를 먹으면서 아침에 민박집에서 여행자들이 모여서 식사를 할 때 나눴던 얘기가 떠올랐다.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분이 자신은 포르투갈 여행을 여러 번 왔는데 오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곳의 생선요리를 먹기 위해서라고 했다. 정말 이곳에서 먹었던 생선을 먹기 위해 왔던 여행지를 그 멀리서 다시 오게 될까? 나도?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식사를 하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공감이 생겼다. 소박하면서도 정갈한 음식을 먹으며 아마 여행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면 나도 이곳의 음식이 그리울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걸어 다니면서 도시를 구경하다 보니 많은 곳이 지진 후 새로 지어진 건물들임을 알 수 있었다. 빌딩들, 고층아파트는 아니지만 아파트형 주택들, 시가지를 보면서 리스보아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났다.
저녁노을이 아름답다는 곳으로 가기 위해 트램을 탔는데 내리는 곳을 망설이다가 지나쳐 남편의 핀잔을 들었다. 트램 안에서 우연히 만난 민박집 동료 부부가 내리는 곳을 따라서 내리려고 우물쭈물하다가 종점으로 내려온 게 남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다.
어차피 트램은 또 올라가니까 종점에서 다시 타고 조금만 올라가면 되니 줄 서서 기다리자고 해도 뿔이난 남편은 나 혼자 알아서 가라고 하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속이 상해도 국내도 아닌 타국에서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남편의 모습에 나는 마음이 아팠다.
두 달 동안의 순례 여행을 하면서도 우리가 변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하는 실망감이 나를 더 우울하게 했다. 할 수없이 혼자 트램을 타기 위해 줄 서있는 다른 여행자들 뒤에 가서 서 있으니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다른 곳으로 가자고 남편이 나를 불렀다.
모른 체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남편과 함께 아우구스타 거리로 나왔다. 거리는 관광객으로 넘쳤고 특유의 분장들을 한 젊은이들의 공연을 보면서 우리는 서로 겸연쩍게 웃으며 화해했다.
자신의 기분을 감추지 않아 때로는 힘들지만 화해도 빠른 귀여운 남편과 아우구스타 거리의 상점들도 구경하면서 개선문을 지나 타 구스 강변을 마주하고 넓게 조성된 코메르 시우 광장으로 나갔다.
아우구스타 거리에서 공연 중인 젊은이들-어린아이도 따라서 추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리스보아에 대지진이 있기 전에는 왕궁이었던 이곳을 도시 재건을 하면서 광장으로 조성하고 타 구스 강 부두를 이용해 무역상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이곳의 이름을 상업을 뜻하는 코메르 시우 광장으로 했다고 한다.
광장과 아우구스타 사이의 개선문도 19세기에 들어서 도시 재건이 성공적으로 되었을 때 세워졌다고 한다. 광장 중앙에는 리스본 대지진 당시 왕이었던 주제(Juse) 1세 기마상이 있다.
코메르 시우 광장에서 타 구스 강(테주 강) 쪽으로 나오면 요트를 타는 사람들도 있고, 붉은색의 다리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서로 어깨를 보듬고 있는 다정한 커플도 있는, 모두들 각자 제 나름대로의 모습으로 즐기고 있었다.
다리의 이름은 완공 당시에는 독재자의 이름을 딴 '살라자' 다리로 불리다가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 혁명일을 기념하여 '4월 25일' 다리로 불린다고 한다. 우리도 목적지를 놓치고 트램을 내렸을 때의 미안함과 성냄을 뒤로하고 어느새 요트와 어우러진 다리와 노을이 지는 모습을 수줍게 마주했다.
타 구스 강변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과 요트
저녁을 먹기 위해 아침에 민박집에서 알려준 버찌 술과 생선요리가 맛있다는 곳을 찾아 계단을 한참 오르고, 조금은 허름한 곳이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별로 없어 쭈빗쭈빗하며 찾아간 계단 옆의 작은 식당은 문이 닫혀있었다. 할 수 없이 돌아 내려오다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리던 식당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푸근한 인상의 주인을 따라 들어간 식당은 3~4개의 식탁이 있는 아담한 식당이었다. 아마도 계단 옆에 위치한 식당들의 크기는 다 이렇게 작은 것 같았다. 버찌 술 2잔과 생선요리가 생각 외로 맛있었다.
한잔 술에 기분이 좋은 남편은 '여행은 이런 거야.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맛있는 걸 먹게 되고, 전망 좋은 곳이 아니라도 또 다른 걸 보게 되는 그것이 진정한 여행의 묘미지.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