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6 습관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심어준다 / 에필로그
목차
프롤로그 숫자 5의 위험한 마술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1 / ‘5고초려’와 ‘5개월’의 힘
Part 1 생각이 행동을 바꾼다
스페인 무적함대의 보복침공 /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 작은 촛불을 켜라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2
Part 2 나이테가 늘수록 나무는 튼튼해진다
로버츠 등반대, 히말라야를 정복하다 / 오고초려, 다시 시작되다 / 하치의 충심도 생존의 문제였다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3
Part 3 행동은 습관을 만든다
삼겹살집의 도원결의 / 실행은 복리로 수익을 돌려준다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4
Part 4 미래에 대한 매력적인 그림을 그려라
직선도로와 우회도로 / 반응성 애착장애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5
Part 5 습관이 되어야 변화는 완성된다
살얼음판 위의 스케이팅 / 따또빠니를 위한 성공의 아침 / 닭들의 회의를 멈춰라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6
Part 6 습관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심어준다
물타기 작전 / 백야를 부르는 승리, 혹은 향수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7
에필로그 습관은 운명을 만든다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8
Part 6 습관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심어준다
물타기 작전
“NBS 소비자시대의 정웅현 피디입니다.”
방송국 피디로 보이는 사내와 카메라맨이 회의실에 들어섰고, 사내가 본인을 소개한다. 카메라맨은 카메라를 고정시키기 위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저희가 방송국으로 가도 되는데 이렇게 오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저는 부사장 조용원이구요 라만차식품중앙연구소 소장도 맡고 있습니다. 이 옆에는 저희 라만차식품의 사외 이사이자 한국식품문화경영컨설팅의 이로운 실장, 그리고 마케팅부 김동원 이사, 마케팅부 석현우 차장, 마지막으로 라만차식품의 이명세 고문 변호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인터뷰에 들어가지 전에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뭐죠?”
“혹시 몰라서 그러는데 오늘 인터뷰 내용을 저희도 녹음해도 되겠습니까?”
정 피디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리고는 얼굴에 묘한 웃음기를 띤 채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한다.
“물론이죠.”
정 피디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석 차장은 핸드폰과 녹음기를 하나씩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곧바로 녹음에 들어간다.
“그러면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저희 방송국에서 히말라야의 원료인 히말라야시다를 구해서 외국을 포함해 3군데 연구소에 성분의뢰를 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제 나왔습니다. 이게 그 결과구요.”
방송국 피디는 A4 크기의 서류 2장을 조용원 부사장에게 내민다. 조 부사장은 첫 장을 볼 때는 엷은 미소를 띠었고, 두 번째 장을 읽을 때는 굳은 표정이 된다. 조 부사장은 자료를 이 변호사에게 넘긴다.
“이 결과로 보면 히말라야시다에는 유사분열억제제(有絲分裂抑制劑:vinca alkaloid) 빈크리스틴이 들어 있고, 인터페론 베타도 3개 연구소 모두 들어 있다는 실험 결과고, 노르아드레날린 수용체는 없거나 미약하다는 결과네요. 제 말이 틀렸나요?”
“맞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촬영을 시작하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좋습니다.”
“저희가 국내외 3개 연구소에 의뢰하여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히말라야에 항암제인 빈크리스틴이 들어 있고, 아울러 인터페론 베타 즉 체내에 침입한 바이러스의 작용을 약하게 하거나 소멸하게 하는 약의 성분은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노르아드레날린 수용체는 없거나 미약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암 예방 효과는 있는데 비만 예방 효과는 없거나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회사의 공식 입장을 밝혀 주십시오.”
“비만 치료제는 보통 식욕억제, 지방분해, 열량소모, 지방흡수 억제 등의 기전에 따라 흔히 사용합니다. 노르아드레날린은 음식 섭취를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희 제품 히말라야에 노르아드레날린 수용체는 없거나 미약하다는 결과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노르아드레날린의 햠유 성분이 지극히 미약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아예 없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죠.”
“사실 저희 소비자시대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이점입니다. 지금 나온 실험 결과는 히말라야에 노르아드레날린이 아예 없거나 미세하다는 것인데, 그럼 있다고 치죠. 노르아드레날린 수용체는 음식 섭취를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어떻게 비만 예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뭐 이 점도 그렇다고 치죠. 그렇다면 소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노르아드레날린을 자주 복용하게 된다면 불안, 두통, 불면, 심계 등의 부작용이 따른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여기 나타난 결과처럼 히말라야의 노르아드레날린의 함유량은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인체에 결코 혜를 끼치지 않습니다. 관련된 데이터나 자료도 있습니다. 다만 음식 섭취를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히말라야는 비만 예방이라는 기능은 분명히 있는 겁니다.”
“식욕을 떨어뜨리는 효과가 비만 예방이라는 논리는 너무 심한 비약이 아닐까요?”
피디가 묻자 이로운 실장이 나섰다.
“예방이라는 의미는 질병이나 재해 따위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대처하여 막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히말라야를 마셔서 음식 섭취를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면 당연히 살찌는 것을 막아주니까 예방이라는 표현은 옳죠. 그러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연구소에 의뢰하셔서 과학적인 결과가 명징하게 나왔는데 왜 NBS에서는 예고편까지 내보내면서 방송을 강행하시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다른 경쟁 업체의 의뢰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뭐라고요? 말씀이 좀 지나치시군요.”
정 피디는 갑자기 언성을 높인다. 이 실장은 일부러 자극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해 보세요. 소비자시대는 시사고발 프로그램으로 우리나라 사람이면 다 아는 NBS의 간판 프로그램이 아닙니까? 소비자시대가 방송을 다루는 것만으로도 이미 장난으로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는 효과가 있는데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한국암예방재단 소속 의사들이 인증한 제품에 문제를 제기하느냐 이 말입니다.”
“방송이 지금 장난이라고 하셨습니까?”
정 피디가 얼굴에 노기를 띠고 항의하자 조용원 부사장이 나선다.
“정 피디님, 잠깐 진정하시고요. 제 말을 좀 들어주십시오. 짐작하시겠지만 소비자시대에서 예고 프로그램이 나간 이후로 진실과는 상관없이 매출이 매일 30%씩 감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거든요. 저희 히말라야 제품이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 작년에 영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출시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영국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이 히트 상품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실패했었지만 이번에 재론칭을 통해 본 괘도에 올랐는데 저희로서는 어마어마한 충격이거든요. 그 점을 좀 이해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입장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희 소비자시대는 시청자나 소비자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우리 사회의 진실을 밝히는 게 목적입니다. 사심이 있을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이 지나쳤다면 사과드립니다. 지금 시대에 방송에 외압이 있을 수 없고, 방송 자체가 장난일 수도 없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방송 쪽에서도 공익을 위해 애쓰다 보면 분명 다치고 쓰러지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 달라는 취지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실장은 피디에게 악수를 청했고, 피디는 마지못해 이 실장의 손을 잡는다.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 실장은 집요하면서도 능란하다. 마지막까지 공격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이번 취재에 응한 분들의 명단을 공개해 주실 수 있나요?”
“취재원 보호 차원에서 곤란합니다. 아울러 실험결과를 통보해온 연구소의 이름도 방송 당일에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면 인터뷰이 중에서 한국암예방재단 소속 의사분도 있습니까?”
“미안합니다. 확인해 줄 수 없습니다.”
“안타깝네요.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수밖에 없으니.”
조용원 소장이 엄살을 부리자 피디는 알듯 말듯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라만차가 과연 가만히 앉아서 당하기만 할까요? 벌써 손을 쓰신 것 같던데.”
“무, 무슨 의미시죠?”
조용원 부사장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요. 인터뷰에 응하는 사람들이 왜 한결같이 그것도 빠짐없이 자신들도 다 녹음을 하겠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부사장님은 그 이유를 아실 것 같은데 모르세요?”
조 부사장은 웃는 낯으로 말을 잇는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군요.”
그러자 역시 쓴웃음을 흘리며 정 피디가 재빠르게 말한다.
“자, 이것으로 인터뷰는 끝내죠.”
*
석 차장과 조용원 소장, 그리고 이로운 실장이 인와인에 들어서자 종업원이 반색한다. 이로운 실장은 실내를 돌아보다가 종업원이 상당한 미인이라는 점이 흥미로운 듯 시선을 떼지 못한다. 얼마 만에 마시는 술인데 싱겁게 와인을 먹느냐고 투정을 부리던 태도는 온데간데없다. 오전과 오후에 연이어 개최된 대책회의, 그리고 중간에 방송국과 인터뷰를 한 상황이라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는 듯하다. 세 사람은 자리에 앉는다. 자리에 앉자마자 조 부사장이 먼저 말을 꺼낸다.
“아이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네.”
석 차장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고, 이 실장은 여전히 종업원의 얼굴을 흘금흘금 쳐다본다.
“운동은 좀 하십니까?”
석 차장이 묻자 조 부사장은 측은하다는 눈길로 말한다.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운동이 얼마나 있겠어? 보아하니 나보다 자네가 더 문제일세. 젊은 사람이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여. 자네야말로 운동 좀 하나?”
“지금은 못 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겠죠.”
그때 종업원이 와인과 치즈를 들고 다가온다. 이로운 실장이 눈을 빛내며 말한다.
“뭐야? 여기는 주문을 안 해도 술이 나오네. 얼마나 자주 오길래 이 정도야? 솔직히 말해봐요, 두 사람 이 언니한테 작업하려고 몰래몰래 여기 오는 거죠?”
조 부사장과 석 차장은 둘이 눈을 마주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러다 조 부사장이 불쑥 말한다.
“다음이란 없어!”
“예?”
“세상에서 다음 기회란 없단 말일세. 나야 어쩔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자네 연배 정도는 체력이 곧 무기야.”
“알겠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말을 흘려듣네. 자네 내 말 잘 듣게. 운동도 습관이야. 습관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주잖나? 물론 자신감은 훈련과 실행의 반복에서 얻어지는 종류의 것이네. 그러니까 다음 기회란 없어. 운동을 지금 안 하면 기회가 잘 주어질 리가 없어. 일도 마찬가지야. 더 잘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찬스가 오네. 실전에 연습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는 말이지.”
“무슨 얘기를 하는데 그렇게 정색을 하세요? 아니 그냥 열심히 운동해라 그러면 되지 소크라테스 3단 옆차기 논법으로 얘길 하시네.”
“내가 그랬나?”
“네.”
석 차장이 토를 달자 세 사람은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린다.
“그나저나 소비자시대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네. 영국에서도 결국 언론사에서 걸고넘어지더니 반복이야, 반복.”
“영국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어요?”
“예. 라만차식품의 히말라야가 옛날 영국에 패한 스페인 무적함대의 침공이라는 신문칼럼이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립니까?”
“라만차가 소설 돈키호테에 나오는 주인공의 고향이잖습니까. 라만차의 히말라야가 선풍적인 인기를 끄니까 신문기자가 국수주의를 자극하는 패러디 기사를 쓴 셈인데 정정기사를 요청하니까 소비자들이 언론수호를 외치는 쪽으로 흘렀던 모양입니다. 불매운동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불매운동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히말라야를 구한 것은 당시 영국의 암환자들로 구성된 로버츠 등반대가 때마침 히말라야산맥의 안나푸르나를 등극한 사건이 있었지. 그런데 그 등반대 중의 한 명이 우리 제품인 히말라야를 들고 있는 사진이 우연히 공개됐어. 그 사진을 광고로 활용했더니 금세 상황이 바뀌더군. 국수주의는 국수주의로 대항했으니 물타기 작전인 셈이었지.”
“로버츠 등반대는 또 뭡니까?”
“1960년에 영국하고 네팔의 공동 팀인 로버츠 등반대가 제2봉을 정복했었다는 거야. 영국 암환자들이 그 이름을 달고 다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정복한 거였지.”
그때 석 차장의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진동한다. 석 차장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낸다. 그는 액정 화면을 확인한 후 핸드폰을 든 채 조용히 일어나 와인바를 나선다.
“응. 나야.”
“당신, 많이 늦어?”
“어…… 왜?”
“나 심각해. 빨리 좀 와줘.”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아니. 하여간 늦지 않게 와줘. 나 지금 같아서는 돌아버리겠다고.”
석 차장은 핸드폰을 끊고 영문을 알 수 없어 허둥거린다. 아이가 아픈 것일까? 아니면 아이가 다친 것일까? 그는 와인 바로 다시 들어간다.
“저, 집에 일이 좀 있는 모양입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석 차장이 양해를 구하자 두 사람은 순순히 응한다. 석 차장은 와인 바를 빠져나와 지하철을 탈까 택시를 탈까 잠시 망설인다. 아내의 모든 고민의 시작과 끝은 아이다. 그는 마음이 급해지자 택시를 잡아탄다. 또 무슨 일일까. 한동안 잠잠하더니 아이와 무슨 갈등이 생긴 것일까. 회사일로 정신이 없다보니 그동안 집안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아내와의 대화도 쉽지 않았고, 딸아이의 변화도 살펴보지 못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현관에 들어서자 집안은 평온하다. 다만 아내가 거실 소파 위에 돌아누워 있을 뿐이다. 석 차장은 딸아이의 방문을 열어본다. 아이는 침대 위에 없다. 그는 안방의 문을 연다. 안방 침대 위에는 딸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다. 그는 다가가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닫고 거실로 나선다.
그때서야 아내는 팔짱을 낀 채 소파에 앉아 있다. 석 차장은 양복 윗도리를 벗으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경희는 잘 자는데?”
아내는 대답대신 턱으로 소파 옆의 간이 탁자를 가리킨다. 탁자 위에는 편지 봉투가 놓여 있다. 석 차장은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편지 봉투 속의 종이를 꺼낸다. 종이는 주민등록 등본이다. 가족란을 살펴보니 딸아이의 이름 옆에 아이의 부모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심지어 주민등록번호까지 적혀 있다. 석 차장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다. 입양한 아이의 친부모와 그네의 주민등록번호까지 호적에 남게 된다는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다.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지금 몰라서 물어? 호적에 저 아이 부모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남아 있다면 얼마든지 추적이 가능하다는 얘기야. 저 아이가 크면 자기의 부모를 찾아 떠날 거라는 사실을 정말 모르겠어?”
“저 아이가 뭐냐? 우리 아이지. 그리고 내 딸이고 내 자식인데 누구 맘대로 떠난다는 거야?”
아내는 갑자기 입을 다문다. 석 차장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아내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딸아이가 안방 문 앞에 서 있다. 석 차장과 아내는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다.
백야를 부르는 승리, 혹은 향수
방송이 끝나고 스크린이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환하게 밝아진다. 우주로 비행선을 무사히 올려보낸 나사의 직원들처럼 서로를 격려하며 악수를 나누거나 부둥켜안는 사람도 있다. 텔레비전을 통해 NBS의 시사프로그램 <소비자시대>를 시청한 후, 석 차장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한다. 방송은 애매하게 끝났다. 소비자나 시청자 입장에서는 히말라야가 암과 비만에 예방 기능이 있거나 없거나 확실하게 판단해줄 걸로 기대했겠으나 결론은 유보된 채 끝나고 말았다. 프로그램에 출연할 걸로 예상되었던 유명 암 전문의 이철승 박사는 처음부터 아군이었다. 이로운 실장의 말로는 이 박사와는 히말라야시다의 효능에 대한 우수성은 예전부터 공유하고 있었고, 방송국의 왜곡된 편집을 막기 위해 미리 전화통화만 했을 뿐이라고 설명했지만 효과는 컸다. 이 박사는 암 전문의로 워낙 유명한데다가 인터뷰 중간중간에 히말라야를 홀짝거렸고, 방송 스태프들에게도 마시라고 권했다는 말도 들렸다. 물론 비만 전문의가 방송에 출연하여 히말라야에 소량이나마 들어 있는 노르아드레날린은 의사의 처방 없이는 복용해서는 안 되며 그 부작용에 대해 낱낱이 소개하며 경고했다. 그러나 뒤이어 한국암예방재단 소속 의사가 네팔 트샴파스트족의 사례와 세계 학술지에 실린 임상실험 결과를 제시하자 노르아드레날린의 부작용 문제는 조용히 묻히고 말았다. 히말라야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년을 마셔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 셈이었다. 결국, 히말라야는 암 예방에는 효과가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비만 예방은 불분명하다는 것이 방송의 결론이었다.
그래도 문제는 남아 있었다. 만약 <소비자시대>의 방송에 따른 영향으로 정부나 관계 부처의 시정 명령이 내려질 경우를 생각할 수 있었다. 물론 제품의 용기에는 구체적으로 표기가 되어 있지 않아서 그 영향은 크지 않지만 제품의 효능인 ‘암’과 ‘비만’ 예방이라는 문제에서 ‘비만’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인쇄 광고의 경우에는 비만이라는 문구나 내용은 전부 삭제해야 하고, 텔레비전 CF의 수정도 불가피한 상황이 될 수 있었다. 어쨌거나 히말라야가 암 예방의 기능이 확실하다는 것은 방송에서 입증해준 셈이었다.
무엇보다도 다행스러운 것은 히말라야시다의 효능에 대해 흑백을 가리는 일은 방송국과 라만차식품의 대결이라기보다 방송국과 의사들의 논쟁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이었다. 방송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국암예방재단 소속 의사들이 성명을 발표했다. <소비자시대>가 자신들의 인증 제품에 대해 부정적인 방송을 내보냄으로써 의사들의 권위가 심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이로 인해 의사는 물론이고 재단의 명예와 신뢰가 무너져 이에 대한 사과가 없을 경우 민사상, 형사상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이었다.
다음날 오전에는 소비자단체의 성명도 잇따랐다. 히말라야에 노르아드레날린이 얼마나 함유되어 있고, 그것이 인체에 유해한가를 국립대학이나 연구단체에 의뢰하여 확실히 밝힐 것을 요구했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히말라야는 물론이고 라만차식품 전체에 대한 불매운동에 돌입하겠다고 했다. 이에 라만차식품중앙연구소 조용원 부사장은 오후에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S대학 부설 연구소의 실험결과, 한국암예방재단의 실험결과와 인증서, 영국암센터의 실험 결과, 세계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 등을 통해 히말라야는 암 예방에 효능이 있으며, 효과는 크지 않지만 비만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표했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한 식품 회사의 음료와 그 기능을 따지는 내용이 방송을 탄 이후 며칠간의 이해 당사자들의 공방을 통해 국민의 모든 관심사는 라만차식품의 히말라야에 쏠렸다. 그 관심사도 부정적인 방향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시사 프로그램의 애매모호한 결론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히말라야가 최소한 암을 예방한다는 데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폭발적인 매출로 이어졌다. 경쟁 업체들로부터는 처음부터 라만차식품이 시사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막대한 광고효과를 얻어냈다는 질시 어린 분석까지 낳았다.
모든 논란이 가라앉고 히말라야는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회사의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사장의 명의로 전 사원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가 떠올랐다.
친애하는 라만차가족 여러분!
그리고 라만차그룹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주신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가정에 항상 행운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임직원 여러분!
우리는 21세기 첨단시대를 맞이하여 라만차 속의 세계화를 다져왔고, 세계 속의 라만차를 위해 글로벌 경쟁력을 키워왔습니다. 여러분들의 땀방울은 헛되지 않아 잉글랜드라만차를 시작으로 코리아라만차가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한국라만차는 세계의 불황과 한국의 어려운 경제 속에서도 유통과 식품 등 주력 사업 부문에서 2/4분기 현재 예상 매출의 두 배를 이루었습니다. 그동안 숙원이었던 동산물류센터를 완공했고, 라만차개발과 라만차홈쇼핑을 출범시켰으며, 라만차화학공업도 시너지 효과를 내며 기대치 이상의 실적을 올리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임직원 여러분!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습니다. 마케팅부의 한 직원이 제게 직접 기획안을 제출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니 그동안 여러 번 제출했었던 기획안이었습니다. 너무나 어이가 없었던 것은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같은 기획안을 다섯 번이나 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기가 막히고 불쾌했습니다. 참고 참다가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면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고 사인을 해주었습니다. 그 기획안을 바탕으로 제품은 출시되었고, 현재의 매출액은 월 200억 원, 총 600억 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히말라야의 성공신화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존경하는 임직원 여러분!
지금 이 시각 생각한 아이디어를 말하기가 겁나십니까?
지금 이 시간 제출하려는 기획안에 자신이 없어서 망설이고 계십니까?
상사나 동료나 후배가 비난할까 두려워 자신의 의지를 꺾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사장인 제게 직접 말하십시오.
여러분의 아이디어와 기획안과 의지를 막는 사람이 있다면 다 무시하시고 사장인 제게 직접 제출하십시오. 여러분에게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존경하는 임직원 여러분!
생각은 행동을 바꿉니다.
행동은 습관을 만듭니다.
습관은 운명을 바꿉니다.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고 싶다면
당신의 생각을 지금 당장 실행하십시오.
친애하는 라만차가족 여러분!
우리는 지금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이 출발점에서 생각을 가다듬고 실행을 위한 굳은 결의를 다짐합시다.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이미 늦기 때문입니다.
*
핸드폰에서 모닝콜이 울린다. 석 차장은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얼른 버튼을 눌러 소리를 잠재운다. 아내는 새벽 늦게 잠들었는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다. 불행과 행복은 이것저것 사정을 봐주는 법도 없었고, 순서를 가려서 오는 법도 없다. 불행이나 행복은 두서없이 오되 대개는 몰려서 오는 경우가 많다. 아내는 아이를 입양한 직후의 상황으로 돌아갔다. 아이에 대해 두려움을 품고 있었고, 계속 키우겠다는 확신도 갖지 못했다. 아이도 후퇴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아이는 비탄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병적으로 찾았고, 주지 않으면 서너 시간도 족히 울었고, 석 차장의 만류와 설득과 야단도 먹히지 않았다.
석 차장은 조심스럽게 아내의 얼굴을 살핀다. 핸드폰 모닝콜 소리에 잠을 깬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소리 나지 않게 안방을 나와 아이의 방으로 향한다. 아이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자기 시작한 것이다. 방문을 열자 아이도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다. 그는 아이의 침대로 다가가 얼굴에 코를 들이댄다. 순간 석 차장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난다. 알 수 없는 냄새가 코를 찔렀기 때문이다. 석 차장은 무슨 냄새인지 알기 위해 다시 아이의 얼굴에 코를 갖다 댄다. 가만히 냄새를 맡아보니 향수 냄새다. 향수 냄새는 아이의 얼굴에서만 나는 게 아니다. 아이의 옷과 이불에서도 풍긴다. 왜 그 냄새가 나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정체는 금방 밝혀진다. 잠자는 아이의 손에 향수병이 들려 있다. 아내가 가끔 뿌리는 향수 샤넬 5번이다. 샤넬 5번은 향수를 만드는 직업을 가졌던 에르네스트 보이라는 사람이 북유럽에 머물면서 겪었던 백야(白夜)의 이미지를 재현한 것이라고 했다. 석 차장은 아이가 향수를 뒤집어쓴 까닭을 알 것 같다. 아이는 알고 있다. 석 차장이 틈만 나면 자신의 얼굴에 대고 냄새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아이는 알고 있다. 자신의 양부모가 자신을 곧 파양하리란 것을. 더군다나 아이는 알고 있다. 자신의 희망은 여전히 아빠라는 것을. 그래서 아이는 엄마가 가끔씩 뿌리는 독한 향수 샤넬 5번을 뒤집어 쓴 채 잠들어 있다. 아내는 더 이상 희망을 품지 않았다. 아이에 대한 양육은 거의 방목에 가까웠다. 보다 못해 장모님과 처제가 집에 드나드는 모양이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처제는 울면서 석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아무래도 형부가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할 것 같다고. 그런저런 생각이 들자 울음이 목울대까지 차올랐지만 그러나 석 차장은 울지 않았다.
석 차장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에 들어선 그는 세면대로 다가가 물을 세게 튼다. 흐르는 물에 손을 담그고 거울을 바라본다. 눈자위가 붉게 충혈된 사내가 거울 속에 서 있다.
“아이도 인간인데 상처야 남겠지요. 그렇지만 아이들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아버님께서 양심에 가책을 느끼실 필요까진 없어요. 서로를 위해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여자의 말에 석 차장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문다. 그는 결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서류에 사인을 했고, 입양할 부모가 나타나면 길면 한 달, 빠르면 일주일 안에 아이는 인계될 터였다. 아이와 보낸 넉 달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릴 때면 지구가 무너지는 것만큼이나 안타까웠고,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아이의 말은 우주의 변화만큼이나 엄청난 것이었다.
“당신 먼저 집에 가 있을래?”
입양기관에서 나와 석 차장은 아내에게 말한다. 아내는 말없이 눈으로 묻는다. 아내의 눈자위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다.
“사무실에 들렀다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아내는 머리를 끄덕이며 돌아선다. 석 차장은 멀어져가는 아내를 바라보며 다시 어금니를 사려 문다. 더 이상 약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다. 자식을 선택할 것인가, 아내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 앞에 다시 선다면 앞으로도 아내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석 차장은 생각한다.
석 차장은 회사에 전화를 넣어 월차를 신청한 후 곧바로 고향으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오른다.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7
선배님께.
오랜만에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동안 명절 때만 내려갔었는데 역시 고향이 참 편안하더군요. 참, 선배님은 어떤 운동을 좋아하십니까? 저는 야구를 무척 좋아합니다. 올림픽 때 한국이 쿠바를 꺾고 우승을 했을 때 저는 한국 야구단을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미쳤어, 너희들은 정말 미친놈들이야! 겨우내 훈련을 하고, 봄 내내 연습시합을 하고, 여름내 치열하게 실력을 겨루고, 가을에 결실을 맺는 상황이 인생과 닮았지요.
그러고 보니 제가 친형이나 동생과 야구 글러브를 끼고 공을 주고받은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저는 삼형제 중에서 둘째였습니다. 삼형제 모두 야구를 무척 좋아했죠.
제가 중학생이었을 무렵, 두 살 터울의 형과 읍네에 있는 문방구로 가서 야구 글러브와 공을 샀습니다. 글러브 두 개는 그럴 듯 했으나 공은 고무공이었고, 배트는 형편상 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형과 나는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했습니다. 야구공을 주고받을 때는 누군가는 홈에 앉아 포수가 되어 공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형은 언제나 얌전한 포수를 자청했고, 나는 언제나 사나운 투수를 자청했습니다. 물론, 던지다 지친 나는 형과 자리를 바꿨고, 서로가 지치면 집으로 향하곤 했죠.
동생과 야구공을 주고받은 것도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홉 살 터울의 동생과 나는 낡고 헐어 빨랫줄로 엮은 글러브를 끼고 창피한 줄도 모르고 공터에 나가 홍키 공으로 공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때도 사는 형편이 어려워 배트는 사지 못했고, 동생과 나는 그런대로 공을 주고받으며 즐거웠었던 것 같습니다. 야구공을 주고받을 때 나는 언제나 먼저 얌전한 포수를 자청했고, 동생은 언제나 사나운 투수를 자청했습니다. 물론, 던지다 지친 동생은 나와 자리를 바꿨고, 서로가 지치면 집으로 향하곤 했습니다.
형과 야구공을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것은 적어도 20년 가까이 되었을 것이고, 동생과 야구공을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것은 적어도 10년은 넘었을 것입니다. 야구 글러브가 닳아 없어지는 동안 형도 결혼을 했고, 나도 결혼을 했으며, 동생은 지금 군대에 가 있습니다. 세월은 그렇게 흐른 것입니다.
아홉 살 어린 순한 동생은 공의 속도가 항상 느렸습니다. 성난 나의 공은 시력이 좋지 않은 형의 다리를 맞추기 일쑤인 데다가 폭투가 다반사였죠. 그렇지만 근성 있는 형의 공은 빠르지는 않았으나 언제나 정확했습니다. 삼형제의 삶도 공을 던지는 속도나 태도와 비슷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힘과 속도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 요즘 생각이죠.
친형과 야구 글러브를 끼고 야구공을 주고받던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남몰래 형을 부르더군요. 아버지는 지갑을 꺼내어 형에게 용돈을 주었습니다. 우연히 나는 그 장면을 보고 말았습니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라 형과 나는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었습니다. 용돈을 받았다 해도 형은 돈을 전혀 쓰지 않고 모아두는 성격이었고, 저는 용돈을 받는 대로 써버리는 성격이기도 했지요.
동생과 글러브를 끼고 야구공을 주고받던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때도 우리 집 형편은 그리 좋지 못했죠. 그래도 부모님은 공부도 잘하고 나이가 어린 동생에게 하드를 사주시곤 했죠. 저는 동생의 하드를 한 입 베어 물었다가 낭패를 보았습니다. 동생이 더럽다며 하드를 방바닥에 내동댕이친 것입니다. 저는 둘째였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투쟁이 몸에 익혀지더군요. 그래서 형에게는 돈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고, 동생에게는 먹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늘 욕심을 부렸죠.
딸아이를 파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죠. 고향집에 내려와서 보니 아버님이 몸살로 누워 계시더군요. 왜 바로 전화를 안 하셨냐고 화를 냈더니 어머니는 감정적인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못할까봐 전화를 못했다고 하시더군요.
하룻밤을 자고 집을 나서려는데 아버지가 저를 부르시더군요. 아버지는 돈뭉치를 내놓으셨습니다. 형도 모르게, 동생도 모르게, 심지어 아내도 모르게 뻔뻔하게 받아온 그 돈은 백만 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상황이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만 저는 그 돈을 받아왔습니다. 저는 그 돈을 야구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부모에게, 형제들에게 돌려줄 야구공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저는 회사에서 받은 포상금의 일부를 어머니와 형과 동생에게 조금씩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아내에게 주었지요. 제가 오늘에 있기까지는 모든 게 아내의 덕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정말 편지가 너무 길었군요. 건강하시길 빕니다. 현우 올림.
에필로그 습관은 운명을 만든다
늦은 점심을 먹으러 회사 식당으로 향하고 있는데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울린다. 핸드폰을 늘 진동으로 해놓고 있었는데 깜박 잊었던 모양이다. 액정 화면을 확인한 후 핸드폰을 받는다.
“응, 나야.”
“경희를 데려갈 양부모가 결정됐다는 연락이 왔어.”
“어…… 그래?”
“양부모는 의사 부부래. 일주일 후에 데려간다고 그랬어.”
“…….”
석 차장은 향수 샤넬 5번이 콧속을 파고드는 착각을 일으킨다. 갑자기 목울대가 뜨거워진다. 아내가 말을 잇는다.
“당신…… 괜찮아?”
“어…… 그럼. 괜찮아. 당신은?”
“나도 괜찮아…….”
괜찮다고는 했지만 아내의 말끝은 흔들린다. 핸드폰을 끊고 석 차장은 식당으로 가는 대신에 화장실로 들어선다. 그는 세면대로 다가가 물을 세게 튼다. 흐르는 물에 손을 담그고 거울을 바라본다. 눈자위가 붉게 충혈된 사내가 거울 속에 서 있다. 그는 손바닥에 물을 담아 얼굴에 문지른다. 참으려 했으나 자꾸 목울대가 뜨거워졌고, 덩달아 콧날이 뜨거워진다. 그는 세게 코를 풀었고, 눈자위가 붉어지도록 세수를 한다.
석 차장은 화장실을 나와 발길이 닿는 대로 걷는다. 어느 날 아이와 함께 개천을 걷던 장면이 떠오른다. 석 차장은 아이에게 말했었다. 아빠는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 있어. 아빠는 널 절대 안 버려. 알겠어? 대답이 없는 아이에게 그는 말했었다. 왜 대답이 없어. 아빠는 죽을 때까지 경희랑 살 거야, 알겠지? 나중에 아이는 말했었다. 엄마한테 냄새 나. 엄마한테 냄새가 난다면서도 아내가 가끔씩 뿌리는 향수 샤넬 5번을 뒤집어 쓴 아이. 이제 그 아이를 놓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눈을 들어 앞을 보니 어느새 라만차식품중앙연구소 앞이다. 그는 깜짝 놀라 돌아선다.
“이거 봐, 석 차장! 날 만나러 온 게 아니었나?”
마침 건물 입구에서 나오던 조용원 부사장이 불러 세운다. 석 차장은 돌아서서 조 부사장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한다.
“아, 잠깐 지나가다가 들렀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보군. 꼭 귀신에게 홀린 표정이야.”
“…….”
“날씨도 좋은데 좀 걷지.”
석 차장은 조 부사장과 함께 걷기 시작한다. 조 부사장은 절대로 먼저 말을 꺼내지 않기로 작정을 한 것인지 굳게 침묵을 지킨다. 석 차장도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어서 묵묵히 걷는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이윽고 석 차장이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연다.
“아이와 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파양을 결정한 게로군.”
“그, 그렇습니다. 아이를 데려갈 사람이 의사 부부라는군요.”
“의사 부부라. 그나마 형편이 어렵지는 않겠군. 오늘 결정이 났나?”
“그, 그렇습니다. 우울합니다.”
“좀 이르지만 나와 낮술 한잔할 텐가?”
“아, 아닙니다. 술을 마시면 감정이 격해질 것 같아 두렵습니다.”
“감정이 좀 격해지면 어떤가?”
“예?”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대자면 몇 가지를 손꼽을 수 있지. 첫째는 피상적으로만 알 뿐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예수의 제자였던 베드로가 딱 그 짝이었지. 확신이 부족해서 스승을 부정했지.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게으르기 때문이야. 게으른 사람은 결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실행하기 어렵지.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세 번째 이유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행동을 포기하거나 망설이게 되네. 지금의 자네처럼 말이야. 간혹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 엄청나다고 처음부터 겁을 먹는 경우가 있네. 감정을 다스리기 어려울 때는 술을 마셔서 누그러뜨리는 것도 괜찮아. 두려운 일도 조금씩 낮술을 마시듯 실행하다 보면 어느 새 일은 마무리되면서 그 끝이 보이기 시작할 걸세. 하고 싶은 일을 실행하지 못하는 마지막 이유로는 완벽주의를 꼽을 수 있네. 슬퍼도 참고, 괴로워도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는 것도 위험한 상황이야. 그런 완벽주의도 사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자신은 다르다는 교만함 때문에 생긴단 말일세. 지금 자네는 아이를 떠나보내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아 낮술이 필요하네. 가서 마시게.”
어이가 없어 석 차장은 쓴웃음을 흘린다.
“저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굳이 낮술을 마실 것까지는 없겠는데요.”
“그것도 정답이네.”
석 차장과 조 부사장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린다. 웃음이 그치자 조 부사장이 진지하게 말한다.
“전에 내가 딸아이 얘기를 했었지?”
석 차장이 알겠다는 투로 머리를 끄덕거린다.
“결정을 못하는 딸아이에게 지금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당장 실행을 하지 못하는 이유 네 가지를 일러주었네. 그랬더니 얼마 전에 생후 6개월 된 아기를 입양했다더군. 자네가 했던 말처럼 반응성 애착장애도 곧 나타날 테지.”
“그러겠죠. 축하드립니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궁금한 게 있네. 좀 괜찮아진 것 같더니만 갑자기 상황이 달라진 이유는 무엇이었나?”
“제 등본과 호적에 아이의 부모의 이름과 주민번호가 남는다는 것을 아내가 알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등본이나 호적에 아이의 흔적이 남는 것은 상황마다 다른 모양인데 아내는 견디지 못하겠답니다. 아이를 키워 놓으면 생부모를 찾아 떠나버릴 거라고 믿는 모양이에요.”
“그럴 테지. 그런데 품 안에 자식이라고 키워 놓으면 누구나 짝을 찾아 떠나간다네. 부모 곁에 남아 있을 자식이 누가 있겠나. 딸아이도 꽤 명석해서 공부를 많이 할 줄 알았는데 사위 놈을 만나더니 다 포기하고 말더구먼.”
“…….”
“내가 괜한 소릴 했구먼.”
“아닙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솔직히 많이 위로가 됐습니다.”
“그래. 좀 편해지면 술 한잔하세.”
석 차장은 조 부사장에게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가 걷는 방향으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
일주일 후. 아이와 이별을 하는 날, 공교롭게도 회사에서 비상이 걸렸다. 기획실과 마케팅부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긴급회의가 소집된 것이었다. 간부급은 물론이고 실무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하라는 사장의 지시가 있었다는 전갈이었다.
석 차장은 화가 치밀었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석 차장이 화가 치민 것은 딸아이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석 차장이 전날 밤 아이에게 헤어져야 한다고 어렵게 말을 꺼냈으나 아이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쉽게 받아들였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은근히 화가 치밀었던 것이었다.
아이를 인계하는 것은 아내와 장모님과 처제가 맡기로 했다. 석 차장은 애써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딸아이와 마주했다. 아이는 그와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석 차장은 무슨 말이라도 할까 고민했으나 그만두었다. 오만 정이 다 떨어져야 서로를 위해 좋은 셈이었다. 석 차장도, 딸아이도 결국 서로를 향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재 상황을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원료인 히말라야시다가 경쟁업체에 공급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쪽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비만 예방 기능이 완벽하게 추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회의에 늦게 참석한 까닭에 석 차장은 허리를 숙인 채 회의실의 자리를 파고든다. 상황은 급박하다. 히말라야와 유사한 상품이 경쟁 업체로부터 출시된 것이다. 더구나 비만 예방 기능이 완벽하게 추가되어 상당한 출혈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마케팅부 석 차장은 아직도 참석을 안 했습니까?”
김 이사가 던진 말이다. 석 차장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제서야 먹이를 발견한 짐승처럼 김 이사의 말이 튄다.
“당신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매출이 반으로 꺾이게 생겼는데 이런 전시 상황에 당신 지금 뭐하는 거야?”
“…….”
“입 다물고 몸으로 때우겠다 이 말씀이신가? 그런데 시토 박인가 빌어먹을 놈인가는 왜 연락이 안 되는 건데? 이 새끼가 원료를 넘긴 게 분명해. 뭐 아는 거 있으면 얘기 좀 하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상황을 파악하고서 보고…….”
석 차장은 문득 묘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다. 냄새의 정체가 지금 풍기고 있는 것인지 딸아이와 헤어질 때 맡은 냄새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 냄새는 분명 향수였고, 샤넬 5번이다. 향수를 만든 사람이 백야를 재현했다는 그 냄새. 상황이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석 차장은 저절로 목울대가 뜨거워진다. 자신의 몸에 향수를 뿌렸다면 아이는 분명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얘기다. 석 차장은 자신의 왼쪽 가슴을 주먹으로 친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석 차장의 반응에 놀라는 눈치다. 석 차장은 떠나기 싫어하는 아이를 등 떠밀어낸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울음이 목울대까지 차오른다. 그는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계속해서 주먹으로 가슴을 친다. 석 차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일그러지자 사람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석 차장은 참지 못하고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한다.
“이봐, 석 차장! 싫은 소리 좀 했다고 얘처럼 울면 되나? 어허, 다 큰 사람이 왜 저래.”
*
석 차장이 눈을 떴을 때는 병원 응급실이다. 회의가 어떻게 끝나는 줄도 모른 채 응급실로 실려 온 셈이다. 그는 병원으로 실려 오는 동안 내내 슬픈 짐승처럼 목 놓아 운 기억밖에 없다. 숨이 끊어질 것처럼 벅차올랐고, 아련한 향수 때문에 몸부림친 기억이 있다. 울다 지쳐 잠에 빠졌던가?
“정신이 좀 드는가?”
조용원 부사장이다. 석 차장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조 부사장은 그의 몸을 눌러 그대로 누워 있게 한다.
“그러게 낮술을 좀 마시라니까 말을 안 들어. 의사가 그러는데 안정을 좀 취하라는군.”
뭐가 좋은지 조 부사장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는다.
“아, 걱정할까봐 미리 얘기를 하지. 자네 핸드폰이 울어대서 내가 대신 받았는데 자네 부인이 울면서 전화를 했더군. 병원이라니까 지금 달려오는 중일 텐데 내가 안심은 시켰어. 자네 딸아이도 같이 오고 있을 걸세. 자네 부인 말로는 파양을 하지 않기로 했다더군. 내막이야 나는 모르겠고.”
석 차장은 조 부사장의 말을 들으며 눈가에 다시 눈물이 번지는 것을 느낀다. 어디선가 아이가 아빠를 부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향수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다. 물론 향수는 샤넬 5번이다.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8
선배님께.
저, 현웁니다. 그동안 연락을 못 드렸군요. 잘 계시죠?
프랭클린 플래너의 개발자이며 <성공하는 시간관리와 인생관리를 위한 10가지 자연법칙>의 저자 하이럼 스미스Hyrum Smith는 시간에 대한 첫 번째 착각은 ‘우리가 지금보다는 언젠가 미래의 어느 때에 더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더군요. 다음 주에, 다음 달, 아니면 내년에 더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고 또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는 말이지요. 이런 생각은 시간을 저축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실제로 누군가 매일 아침 우리에게 86,400초를 입금해 주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당일이 지나면 이 계좌에 잔액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우울한 얘기로 들리십니까?
선배님, 저도 세상일을 많이 격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말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군요. 아무리 어려운 순간에도 당신에게 선택의 기회는 열려 있다고요. 그것을 닫는 것은 당신 자신이라고요. 똑같은 어려움이라도 당신의 선택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고요. 생각이 행동을 바꾸고, 행동이 습관을 만들며, 습관이 당신의 운명을 바꾼다고요. 그동안의 일을 겪고 나니 금방 늙어버린 것 같군요.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평안하시길. 석현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