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025)>를 보고서
(*가족 단위 감상 추천하지 않습니다. 스포 없음. )
10월 3일 금요일 개천절을 시작으로 추석 연휴 5일이 일요일이다 보니 8일 수요일 대체 공휴일을 끼고 9일 목요일 한글날까지. 이렇게 하면 기본이 7일, 연차나 휴가를 쓴 다면 10일까지도 된다. 11월엔 빨간 날이 하루도 없으니 다들 이 기회에 여행도 가고 가족들과 시간도 보내고 다들 재충전하며 보내지 싶다.
내 경우도 그랬다.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재충전을 하는 시간을 보냈다. 다만 그 장소가 국내의 한 대학병원이었고 여기서 수술을 했다. 누가? 내가. 무튼 지금은 회복 중이다. 여기에 대해 소상히 털어놓을 기회가 있겠지만 지금은 이만 줄이는 걸로. 이렇게 병마(?)와 한 판 하고 나면 보통 가치관이 변한다 하지 않나. 나도 그런 것 같다. 변한 것 같다. 이를테면 내 마음의 소리를 잘 듣게 된다. 내 무의식이 보내는 소리들. 그런 사인에 집중하고 있던 중에 본 영화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One Battle After Another, 2025>이다.
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우선은 영화의 광고 문구를 보면 딸을 찾는 아빠의 추격물이나 액션물처럼 묘사하는데 물론 아빠가 딸 찾으러 가긴 한다만 <테이큰> 같은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미국 사회의 풍자극,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둘째로 이게 더 중요한데, 15세 이상 상영 영화이나 가족들과 보기엔 꽤 민망한 영화다. 추석 연휴라고 초등학생 자녀나 조카가 있는 가족이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간 필시 낭패 본다. 아이들이 혁명과 폭력성 그리고 거기서 오는 카타르시즘이 무의식적으로 에로시즘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엔 버겁지 않을까.
나는 이 영화를 아빠한테 추천했다. 그러니까 성인이 혼자 보기엔 좋다. 아니면 성인 커플이 보기에도 좋다. (원래는 아빠랑 같이 보려고 했는데 일정이 안 맞아서 같이 못 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같이 안 봐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유는 무엇보다 숀 펜, 진짜 맛깔나게 연기한다. 이 영화는 숀 펜이 연기하는 스티븐 J. 록조를 보는 재미로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선 악의 기준으로 캐릭터를 판단하게 하는 걸 뛰어넘어 드는 생각. ”아, 저 자식 진짜 골 때리네. “
그리고 각본, 스포 때문에 자세히 못 밝혀서 그렇지 각본이 꽉 차있다. 이 영화의 러닝 타임이 2시간 30분이 넘는데 지겨울 틈이 없었다. 아이맥스관의 정가운데서 약간 뒤쪽에 앉아서 관람했는데 중간에 일어서는 사람이 없었다. 되려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이 영화에 점점 몰입해서 의자에 기대앉지 않고 몸을 스크린 쪽으로 숙이는 바람에 잘 스크린의 하단이 잘 안 보였다. 이따금씩 2시간짜리 액션 영화들이 지루할 때가 있지 않은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럴 땐 나는 총소리를 asmr 삼아 영화관에서 졸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이 영화의 각본은 얼마나 탄탄한가.
영화는 동시대 미국을 배경으로 반이민정책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단체명 ‘프렌치 73’) 부부를 보여준다. 반정부 활동 중에 만난 두 남녀, 이들은 아이가 생기지만 정작 둘 생각은 서로 다르다. 아이가 생기니 가정에 충실하고자 하는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 아이 때문에 혁명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못하는 게 싫은 퍼피디아 베버리 힐즈(테야나 테일러 분). 퍼피디아는 결국 집을 뛰쳐나와 다시 거리로 돌아가지만 정부군에 체포되고 이후 퍼거슨은 홀로 아이를 키운다. 그러나 시대를 관통하는 이데올로기는 현존하기에 레지스탕스들은 다시금 활동을 준비한다. 그렇게 퍼거슨과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 분)는 위험에 빠진다. 영화는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게 찾아온다. 우리의 인생처럼 말이다.
이 영화는 인종주의에 따른 맥카시즘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현실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21세기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시대에 인종차별이라는 단어는 구시대의 어휘 같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해외여행 가면 인종차별 당하는 일은 다반사에 얼마 전 패션쇼 사진에서 고의적으로 로제를 누락한 사진은 소셜 네트워크 상에 뜨거운 감자였다. 무엇보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는 이민을 막기 위한 국경 장벽이 설치되었다. 물론, 반이민정책과 인종차별은 동의어가 아니다. 그러나 반이민정책이 가지는 배타성이란 특성은 인종차별의 주요 특징이기에 완전히 다르다 말하기는 어렵다.
프렌치 73은 폭력을 통해 맥카시즘에 저항한다. 여기서 우리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선다. 예스라고 해도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노라 해도 마찬가지.
그렇다고 ‘그렇다’고 답한다면, 자극적인 수단 없이 언론의 이목을 끌 수 없다는 현실적 이유가 근거가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적·물적 피해는 어떻게 할 것인가. 더 근본적으로 묻자면, 당신들의 저항이 정말 ‘선(善)’인가? 인명을 해치는 ‘선’이 존재할 수 있는가?
반대로 ‘아니오’라고 답하면 어떨까. 예스의 논리와 도덕이 서로 자리를 바꾼다. 인명 피해를 일으킨 혁명은 모두 악일까? 그렇지 않다. 식민지 시대의 민족해방운동을 떠올려보면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자살폭탄 테러를 생각하면, 선과 악의 경계는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결국 혁명과 테러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저널리즘일까, 이데올로기일까. 체제 전복에 성공한 행위는 혁명이고, 실패하면 테러라고 말한다면, 사실과 해석 사이엔 얼마나 큰 괴리가 존재하는가. 답이 없는 논제에 늘 골몰하는 것 이것이 어쩌면 인간의 숙명일지도.
그리고 이 전투가 끝나면 사람들은 다시 자기의 자리로 돌아간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가정으로 돌아간다. 가정, 한 개인이 우리를 처음으로 느끼는 그곳으로.
나도 이번에 수술을 하는 동안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사회라는 일선에서 배틀을 하다 물러난 곳엔 가족이 있었다. 그리고 깨달은 사실 하나, 내 활동명은 ‘딸’이 아니겠나. 내가 배틀을 하는 이유도 결국은 내가 속한 가족을 위함이다. 영화 속 부부가 저항 활동을 하는 것도 한 발짝 물러나 보면 인종이 다른 이들 부부가 행복한 삶을 꾸리기 위함이 아닐까. 결국 저항 운동을 하는 모든 이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과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다. 그래, 그들은 결국 ‘딸’이나 ‘아들’ 혹은 ‘아빠’나 ‘엄마’일 테다.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자가 내 마음속 말이었다. 그게 가족이었다. 우선은 건강한 ‘딸’이 그 출발이다. 그리고 좀 더 확장된 가족이 된다면, 그럼 그땐 ‘엄마’도 가능하지 않을까. 다음은 성정(性情). 고운 마음으로 돌아가자. 존심양성(存心養性). 맹자의 말씀처럼 타고난 선한 품성을 돌보는 걸로.
올 한 해가 3개월쯤 남았다. 나를 차분히 돌보며 살아갈 시간으로 그 정도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