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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태공 Oct 14. 2023

어떻게 쉬어야 잘 쉬는 거죠?

남들이 보기엔 내가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랍니다.

목요일 밤에 잠을 설쳤더니 금요일에 출근하는데 귀가 아팠다. 

3일 치 약을 다 먹었지만 귀는 여전히 먹먹했고, 불편했다. 

일에 집중도 안 되고, 기운도 없었다. 

점심 먹고 조퇴해서 이비인후과로 달려가, 청력 검사를 했다. 

이명과 골도 검사를 제외하고 고막운동검사와 기본 청력 검사가 시행됐다. 

이명은 아니라니 다행인 건가 싶었다. 

낮시간에 가니 환자가 한두 명 밖에 없어서 진료도, 검사도 빨리빨리 이루어졌다. 


별도로 마련된 검사실에 들어갔다. 

유리창 너머로 안쪽이 들여다 보이는 골방 혹은 공중전화부스처럼 생긴 곳에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의자에 앉으니, 이상하게 생긴 헤드셋을 주신다. 

"삐 소리와 뿌 소리가 나면 버튼을 누르세요. 바람 소리는 누르시면 안 돼요. 오른쪽부터 할게요~" 


귀가 먹먹해서 그런지, 헤드셋 모양 때문인지, 귀가 불편해졌다. 

각종 음역대의 삐 소리와 뿌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렸다. 

얼마나 검사를 했을까. 갑자기 몇 초간 정적이 흐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삐~, 뿌~ 

왼쪽 검사도 마찬가지였다. 잘 들리다가 정적, 또다시 삐, 뿌. 


"이번에는 단어가 나올 거예요. 들리는 대로 따라서 말씀해 보세요~"

긴장해서 그런가, 첫 단어부터 들리지 않는다. 

뭐라고 말하는 것 같긴 한데, 무슨 말인지를 도통 모르겠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못 알아듣겠어요" 대답했다. 

그 후로 두 음절로 이루어진 단어들을 AI가 계속 얘기를 하고, 나는 들리는 대로 따라 말하고, 검사가 반복됐다. 


바람, 마음, 용기, 논밭 등등 

오른쪽 검사를 마치고 왼쪽을 검사하는데, 오른쪽보다 더 단어가 들리지 않는다. 

순간, 난청인가, 메니에르병은 아닐까, 돌발성 난청은 치료도 힘들다는데. 

온갖 걱정이 들이닥쳤고, 눈물이 차오르는 걸 겨우 참았다. 


대답을 마치고, 부스 밖으로 나와 고막 운동 검사를 했다. 

이번에는 이어폰처럼 생긴 것을 양쪽 귀에 번갈아 꽂고 침을 삼키기도 하고, 다양한 주파수의 시끄러운 소리들이 귀를 괴롭혔다. 

짜증도 나고, 왜 귀가 아픈 건지 원망도 되고, 자책도 되고, 오만가지 감정에 휩쓸려 휘청대다 검사가 종료되고 로비에 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진료실에 다시 들어갔다. 


그래프를 보여 주시며 설명해 주신다. 

고막은 정상이고, 기능상의 문제는 없습니다. 

청력도 일반적인 음파 범주 내에서 잘 들으실 수 있어요. 

다만, 왼쪽과 오른쪽 모두 고주파 소리는 현저히 못 들으시고, 

특히 왼쪽 귀는 아주 저음도 못 듣는 거로 나오시는데, 

고주파를 못 듣는 건 난청은 아닌 것 같고, 고음에 지속적으로 노출이 돼서 자극을 받아서 그런 것 같아 보입니다. 

오른쪽 귀가 아프다고 하셨는데 기능 검사 상으로는 오른쪽보다 왼쪽이 더 문제가 있어요. 

귀가 먹먹해진 지 얼마 안 됐으면 스테로이드로 며칠이면 잡힐 것 같긴 한데. 

일단, 5일간은 약을 좀 써볼게요. 5일 후에 증세가 잡히면 6일부터 약 줄여서 치료 완전히 받는 걸로 하고, 차도가 없으면 그 후는 다시 고민해 봐야겠어요. 

5일 동안 스테로이드 약이 좀 많이 나갈 겁니다. 약 꾸준히 드시고, 약 먹는 동안에는 푹 쉬세요. 


난청이나 이명은 아니라고 하니, 일면 안심이 되면서도, 그럼 도대체 나는 왜 아픈 것이고, 왜 귀가 먹먹한 것인지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과제. 

도대체 쉰다는 건 어떻게 해야 쉬는 걸까. 

주변에 물었더니 주말 내내 꼼짝 말고 침대에만 누워 있으라고 하는 사람, 맛있는 거 먹고 드라마 밀린 거 보면서 재미있게 보내라고 하는 사람 등 의견이 다양하다. 

대부분의 의견을 낸 사람들의 공통점은 내가 하고 있는, 해야 되는 일들을 모두 스탑 하고, 움직이지 말라는 거였다. 


와, 가만히 누워있는 게 세상 제일 힘든 사람이 바로 난데. 

토요일에 내가 해야 될 일과, 일요일에 하기로 계획했던 일들이 바인더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이걸 해야 나는 즐거운 사람인데, 이걸 안 하고 집에 있으라고? 

토요일 새벽에는 붙박이별 모임이 있고, 잠시 쉬었다가 챗으로 책 쓰기 강의가 있다. 

그리고 점심에는 큰엄마와 시언니들을 초대해 많이 늦은 집들이를 하기로 몇 달 전부터 약속이 되어 있었다. 

아이 미술학원도 보내야 하고, 태권도장 레크리에이션 행사도 챙겨 보내야 하고, 

일요일에는 황톳길에 가서 맨발 걷기도 해 보려고 거창하게 계획을 세워놨는데 모두 하지 말라니. 

사형 집행 선고를 받은 사형수가 이런 기분일까. 청천벽력이 따로 없다. 


올 초에 붙박이별 첫 모임에서 100% 출석을 하겠노라고 당찬 포부를 밝히며 첫인사를 나눴는데, 결석은 죽어도 안된다며, 무거운 몸을 일으켜 컴퓨터를 켰다. 

약 기운에 자꾸 늘어져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8시도 안돼 나왔다. 

아, 이래서 약 먹고 누워만 있으라고 했던 거였나. 

오늘 계획된 일들이 모두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라 아예 취소할 수는 없어서 줌 회의에 참가는 하되 

힘들면 수시로 화면을 껐다 켰다 반복하며 어찌어찌 두 시간 강의를 마쳤다. 


큰엄마와 시언니들과 함께 하기로 한 점심 식사는 편백찜만 준비하고, 나머지는 남편이 트레이더스에서 밀키트를 사 오기로 한 터라 부담이 없었다. 

좀 전까지 피곤했던 몸이 음식을 하다 보니 온몸의 세포가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래 맞아. 나 요리하는 거 좋아하는데. 

편백찜기에 낙지, 새우, 가리비로 1층 탑을 쌓고, 2층에는 숙주를 바닥에 깔고 청경채, 우삼겹, 팽이버섯, 느타리버섯, 배추로 채소 탑을 쌓아 주었다. 내가 했지만 모양 참 예쁘네 ㅎㅎ

큰엄마, 시언니들, 시언니의 남편들, 우리 가족까지 총 10명 대가족의 점심시간이 시작됐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고, 올케가 똑 부러져서 OO가 복 받았다며 언니들의 칭찬도 듣고, 떠들썩한 시간이 지났다. 

모두 집으로 가신 후, 남편과 아이, 나만 있는 집이 왜 이리도 썰렁하고 심심한지. 

내일은 남편도 없는데 아이마저 친구 집에 가면 난 뭘 하며 쉬어야 하는 걸까, 앞이 캄캄했다. 


저녁을 먹고, 남편을 쿡쿡 찔러 "산책 갈까?" 테스트를 해보았다. 

남편이 흔쾌히 아파트만 한 바퀴 돌자며 같이 나가 주어서, 남편과 걷는 틈틈이 동네 친구들에게 급벙을 제안하는 나란 인간. 

편백찜 해줄게, 나랑 놀아줘.

다들 스케줄이 있다 하고, 다행히 한 친구가 나의 간절함에 응답을 해주었다. 

스테로이드가 다행히 바로 효과가 있는 것 같으니, 내일 오전에 누워 있다가 점심 같이 먹고 수다 기분 좋게 떨면서 놀다 보면 금방 나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팍. 


E형 인간, 관종은 가만히 누워 쉬는 게 제일 어렵다. 

일하면서 잘 쉬어 주는 것도 중요한데, 그 쉼이 어떻게 쉬어야 잘 쉬었다고 하는 걸까?

열심히 살고 있다는 기준도 각자 다르듯, 쉼의 기준 또한 다를 것이다. 


나의 쉼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음식을 준비하며 설레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걷고, 웃는 것이 쉼이다. 

내일 오전은 잠깐이라도 남의 기준에 맞춰 침대에 잠깐 누워 있어 보려고 한다. 

의사 선생님이 혹시라도 제대로 쉰 거 맞냐고 혼내실까 봐... 정 안 되면 잠이라도 푹 자 봐야지. 

아까 산책할 때 아주 잠시 침 삼키는데 귀에서 딸깍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주 아주 잠시. 


괜스레 기분이 설렌다. 내일은 좀 더 나아지고, 5일 후에는 제발 아무 이상 없이 돌아와 주기를. 

나의 평온한 일상, 치열함 속에 즐거움과 설렘이 있던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며. 

내일은 오전 10시까지 한 번 푹 자 보겠습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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