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 1번을 충실히 완료한 우리는 리스트 2번이자 마지막 미션을 클리어할 차례였다. 미국땅을 처음 밟는 남편은 뉴욕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고 싶다 했다. 대학생시절 뉴욕 여행 때 청록색 그녀와 이미 구면이 된 나지만 남편의 소원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다시 갈 수 있었다.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인 이 동상을 볼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스태튼 아일랜드 거주민들의 통근을 위해 마련된 24시간 무료 운영하는 패리를 타고 스쳐 지나가듯 멀리서 바라보는 방법과 25달러 유료 크루즈에 탑승해 동상이 세워져 있는 리버티 섬까지 들어가 천천히 둘러보는 방법이 있다.
대학생 때 무료 페리를 탔노라며 24시간 운영이니 자유롭게 가면 된다 아는 척을 하려는데 남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잊고 있었네, 무엇이든 할 거면 제대로 하고싶어 하는 성향인 남편에게 멀리서 띄엄띄엄 보는 건안 본 거나 매한가지다!
그리하여 우리는 돈을 내고 리버티 섬에 들어가기로 결정했고 크루즈운행 시간은 정해져있기에 서둘러야 했다. 양볼 가득 알밤을 욱여넣은 다람쥐마냥 작은 손가방에 생수, 우유, 바나나, 초코칩 머핀까지 두둑이 챙겨 담고 호텔을 나섰다.
타임스퀘어에서 1호선을 타고 종착역 South Ferry에 내려 조금 걸으면 크루즈 선착장에 도착할 수 있다
Times Sq. 42 st 역에서 모닝 지하철을 탔다. 눈을 지긋히 감고 일상의 시작을 겸허히 맞이하는 직장인들, 자유로운 개성이 묻어나는 옷차림의 학생들, 무슨 대화 중인지 알아들을 순 없지만 여행의 설렘이 그대로 전달되는 말투의 여행객들. 이 모든 기운이 버무려져 지하철 안을 가득 채웠다.
종점 South Ferry에 도착한 우리는 크루즈 티켓을 판매 중인 배터리파크로 이동했다. 구매한 티켓을 보여주고 소지품 검사대를 통과하니 자유의 여신상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세계각국에서 모여든 엄청난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고불 고불 긴 줄의 제일 끝을 찾아 선 우리 뒤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대기줄은 계속 길어져갔다.
이른 아침에 분주하게 움직인 덕분에 크루즈 탑승까지 대기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고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머리를 흩날리는 시원한 바람까지 더해져 자유의 여신상 인증샷찍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무료한 삶을 살던 남편의 폰카메라는 나와의 연애가 시작되면서부터 생기를 찾았다. 한동안 남편의 검색어에는 인생샷 찍는 법, 여자친구 사진 예쁘게 찍어주는 방법 등이 점령했다. 남자친구에서 남편으로 발전하는동안 그의 사진 찍는 실력도 일취월장했음은 물론이다.
나는 사진을 적당히 찍어도 만족하는 성향이지만 남편은 각 포토스팟에서 맘에 드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시간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심지어 배고픔도 참아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배고픔 앞에서는 성난 토끼 한 마리가 된다).
많은 사진을 남기며 리버티 섬 투어를 마무리한 우리는 배가 살짝 고픈 상태로 크루즈 선착장에서 가까운 뉴욕금융가로 걸음을 옮겼다. 뉴욕 남부에 왔는데 월스트리트 구경이 빠지면 서운할 거 같았다. 'Charging Bull 돌진하는 황소'와 인증샷도남기고 점심을 먹자!
기다림 끝에 우리 차례가 왔고 황소 엉덩이 쪽에서 열심히 포즈를 잡았다. 얼굴 쪽에서도 찍고 싶으면 반대편에 줄을 서서 또 기다려야 한단 걸 알게 되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남편은 알고 있었다. 허기진 아내가 돌진하는 포악한 토끼가 되기 전에점심부터 먹어야 한다는 걸. 완벽함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늘 되어있는 남편이지만 날 위해 완벽을 포기하는 법도 배워간다.
빨간 벽돌로 만들어진 예쁜 골목길에 자리 잡은 이탈리안 음식점. 실패할 수 없는 아주 클래식한 맛의 쫄깃한 피자와 여름 끝자락의 더위를 식혀주는 청량한 레모네이드로 뉴욕에서의 마지막 오후를 마무리했다.
나와 남편은 비슷하지만 또 다르다. MBTI로 말하자면 나는 INFP 남편은 INTJ이다. 내향적임과 직관성을 공유하지만 사고형와 감정형, 계획적임과 즉흥적임으로 갈린다. 남편의 완벽을 추구함이 내게 벅차게 느껴질 때마다 나의 설렁설렁함 역시 남편을 난처하게 할 거란 걸 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노력한다. 남편은 많은 계획과 완벽의 기준을 낮추어보려고 나는 좀 더 계획을 세우고 완벽에 다가서 보려고 말이다. 결국 사랑이란 서쪽 저 끝과 동쪽 제일 오른편에 서있던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한 발자국씩 옮겨 걷는 그 걸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제껏 큰 숲의 웅장함에 "멋지다~"하며 쓰윽 지나가는 삶을 살아왔다면 섬세한 남편 덕분에 숲 속 한켠에 있는 줄도 몰랐던 오솔길을 발견하는 삶이 되었다. 천천히 걸으며 키 작은 들꽃에 눈도 맞추고 향도 음미하면서 걷다 보니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오솔길이 소중해진다.
그동안 나는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맛의 차이도 잘 모른 채 '고기가 다 고기지 뭐.'라는 심드렁한 포식자였다. 육류의 등급이 어떻게 나누어지는지 그에 따른 맛의 차이에도 크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미식가 남편을 만나고 최고등급 소고기를 먹으러 갔던 날 고기가 다 고기가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하루는 선물 받은 소고기를 앞에 두고 어떻게 구워야 할지 고민 중이던 남편은 집에서 구워보는 건 처음이라며 나에게 구울줄 아냐고 물었다. 난 구울 수 있다며 방긋 웃어 보였다. 화장실에 다녀온 남편은 난도질 당해 구워진 스테이크용 고기를 보고 적지 않게 당황했다. "앞으로 고기 굽는 건 내가 담당할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저항 없이 그렇게 주방에서 정중하게 퇴출당했다.
"아침에 잡은 소"라는 간판 문구를 보면 아침에 희생된 소가 너무 안쓰럽고그걸 맛있게 먹는 스스로가 야속한감정형인 내 영향을 받아남편 역시 변화하고 있다. 단호하고 논리적인 전략가 INTJ인 그는 상대가 느끼는 감정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공감력이 꾸준히 상승 중이다.
뉴욕여행을 마치고 미국에 있는 동안 신세를 지고 있는 첫째 언니집으로 복귀했다.
"어땠어? 사진 좀 보여줘~~"
여행 다녀온 사람에게 마땅히 보여야 할 예의상의 궁금함이 아니었다. 뉴욕얘기에 언니의 두 눈은 반짝였다. 북적이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 에너지가 충전되는 뉴욕은 매년 방문하고 싶은 언니의최애 여행지라 했다.
이 얘길 듣는 형부는 뉴욕은 정신없다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드라마 전원일기 OST가 들려올 것만 같은 한적한 시골에 가줘야 충전이 되는거란다.
누군가에겐 따뜻한 추억의 도시, 누군가에겐 생동감 넘치는 충전의 도시, 누군가에겐 정신사나운 도시인 뉴욕 뉴욕
서로 함께하면서 다름의 간극을 좁혀오던 10년 차 부부는 사랑스러운 딸의 탄생 앞에서 기적 같은 진화를 거쳐 아주 새로운 모습이 된다. 언니도 형부도 더 이상 스스로의 호불호를 어필하지 않았다. 스카일러에게 좋은 경험이 된다면 대동단결해 그게 어디이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새로운 종류의 MBTI를 LOVE라 부르기로 했다.
난 누군가에겐 봄 누군가에게는 겨울 누군가에겐 끝 누군가에게는 처음 난 누군가에겐 행복 누군가에겐 넋 누군가에겐 자장가이자 때때로는 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