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한 하루하루를 분주히 살아내느라 나도 한동안 미국에 가지 못했고 출산과 육아를 시작한 첫째 언니도 한국에 나올 엄두를 못 내었다. 급하게 찾아온 아빠의 장례식을 치르러 강산이 변한 10년 만에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우리.
슬픔을 비롯한 복잡한 감정들을 다 소화해 내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지만 선물처럼 찾아온 자매로써 함께 할 수 있는 이 시간을 잘 활용해 보기로 했다. 우리는 슬펐지만 또 행복했다. 이렇게라도 한자리에 모였으니까. 아기새를 위해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오는 어미새처럼 근거리에서 열리는 행사정보를 요일별로 브리핑해주는 언니의 정성에 코끝이 찡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밀린 빨래를 하려고 한 주동안 비닐에 대충 모아둔 빨랫감을 꺼내 세탁기가 있는 주방으로 향하다 마주친 언니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물었다.
"금요일 사운드오브뮤직 아웃도어콘서트를 하는데 여기 가볼래? 버지니아 쪽에서 하는 거야."
"오 재밌겠다. 완전 좋아!"
나의 긍정적인 반응에 반색하며 더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려 폰을 내미는 언니. 받아 든 폰 액정에 익숙한 주황빛이 감돌고 있었다. 정확히 3년 전 휴대폰 배터리이슈로 삼성서비스센터에 갔을 때 내 폰에 내려졌던 진단이 불현듯떠올랐다. 수리기사는 폰이 너무 오래되어 배터리문제는 극복불가니 폰을 새로 장만하라 했다.
"그런데... 배터리보다도.. 불편해서 그동안 어떻게 쓰셨어요? 버닝현상이 너무 심해서 눈이 많이 아프셨을 건데."
그때 난 처음으로 인지했다. 내 폰 액정에 반투명의 주황색 얼룩이 있단 걸... 타고난 성향도 있을 테지만 늘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희생을 강조했던 부모님 가르침의 영향도 컸을까 나 스스로의 필요를 알아차리고 채워주는 일은 늘 제일 후순위로 밀려났고 난 자신을 돌보는데 서툴렀다.
바꿀 시기를 한참 넘겨 주황빛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슬픈 언니의 폰을 돌려주며 괜히 더 씩씩한 목소리로 물었다.
"김밥도 싸서 갈까?"
"응응! 그러자. 스카일러도 야외콘서트는 처음이라 너무 좋아할 거 같아."
언니가 웃었다.
"참 언니, 폰 안 불편해? 내 폰도 그랬거든. 오래 쓰면 생기는 현상인데 눈에 안 좋데~ 꼭 바꿔."
아몬드 눈에 짙은 눈썹, 튼튼한 하체가 판박이인 우리는 극악의 폰 컨디션으로 자매 인증을 완성했다.
고등학생 때 합창부에서 반주를 맡고 있던 첫째 언니는 합창부 담당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색 공연 소식을 종종 가져왔다. 그렇게 우리는 연주회에 불꽃놀이를 곁들인 여름밤 지역 피크닉이 1년에 한 번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엄마 직장 옆에 있어 접하게 된 아미시(전통을 유지하며 생활하는 종교적·문화적 생활 공동체) 마켓의 주력상품인 갓 튀긴 후라이드 치킨과 신선한레모네이드를 사서 들뜬 맘으로 행사에 참여하곤 했었다.
이제 한 아이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만난 우리가 어릴적 추억을 회상하며 야외콘서트에 갈 수 있다니. 더구나 다른 것도 아니고 '사운드 오브 뮤직' 이라니!
추석특집명화로 매년 보는 것으로 모자라 비디오로 녹화해 테이프가 다 늘어져 더는 볼 수 없을 때까지 보고 또 봤던 우리 가족의 최애영화가 아닌가. 너무나 완벽한 전개였다. 콘서트의 진짜 정체가 드러나기 전 까지는...
언니, 스카일러, 남편과 나 이렇게 피크닉 메이트가 된 우리 넷은 도시락과 돗자리, 겉옷까지 챙겨 부지런히 출발했다. 개장시간을 앞서 도착했으나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는 가족단위의 사람들로 공원은 이미 북적이고 있었다. 곧 입장이 시작되고 티켓을 점검하는 직원이 키를 낮춰 스카일러와 눈을 맞추고 즐거운 시간이 되라며 친절한 인사를 건네주었다.
우리는 파릇파릇 드넓은 잔디밭 위 적당히 비탈진 자리에 돗자리를 펼치고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음료수를 판매하러 나왔다 해도 믿을만한 크기의 아이스박스에 3일은 족히 먹을만한 양의 음식으로 채워온 가족, 무늬가 화려한 캠핑용 커플 의자와 와인잔을 고정시킬 수 있는 미니 상까지 잊지 않은 섬세한 커플, 초록 스카프를 맞춰 두른 한 무리의 친구들 뒤로 수녀님 두 명이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광판에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과 관련된 퀴즈문제가 나오고 있었다. 그 문제를 남편과 함께 풀다가 아참, 아까 입장할 때 주최 측에서 나누어준 파란 에코백 속을 확인하지 않았단 게 생각났다. 와츠인마이백 브이로그를 촬영하는 크리에이터처럼 백의 내용물을 돗자리 위에 조심스럽게 쏟아냈다.
비눗방울, 컨페티폭죽, 그리고 이 두 물건을 언제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지 친절하게 적힌 설명서가 있었다.
여주인공 마리아가 남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장면에서 비눗방울을 불고 첫째 딸 리즐이 남자친구에게 배신당하는 장면에선 "우~~"하고
야유할 것.
잠시만... 콘서트를 하면서 영화장면을 같이 틀어주는 건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그러고 보니 아직도 왜 악기 세팅이 안 돼있는 거지? 오케스트라는 어디 있지? 잔디밭에서 도시락도 먹고 정신없이 구경하느라 이제야 눈에 들어온 광활한 무대에 오늘의 사회자가 나타났다.
"Sing Along (노래를 따라 부르다)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를 틀기 전에 주의 사항을 몇 가지 나누겠습니다."
이제야 상황이 파악된 언니와 나는 눈이 마주쳐 '풉'하고 웃어버렸다. 대충 봤던 공원 이벤트 안내페이지를 다시 살펴보니 작은 글씨로 '함께 자유롭게 노래 부르며 영화를 보는 상영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여러분 애코백에 담긴 비눗방울과 컨페티가 있지요? 컨페티는 지금 터트리시면 안 됩니다. 영화에 한 장면에서 같이 터트릴 거예요."
아직 육아경험은 전무하지만 학교에서 다년간 일한 경험으로 예감할 수 있었다. 분명히 지금 터트리는 아이들이 있을 거다. 이 생각을 마치 기도 전에 바로 내 앞에 앉아있는 스카일러 손에서 황금색 컨패티가 "펑"하고 터진다. 뒤쳐질세라 왼편 앞쪽 돗자리 위로 또 "펑" 진보라색 컨패티가 낮게 날아오른다.
컨패티 파도타기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은 사회자는 안내를 이어갔다.
"자, 이제 여러분이 기다리셨던 사운드 오브 뮤직을 연상시키는 의상을 뽐낼 수 있는 미니 퍼레이드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특별히 의상을 준비한 분들은 제 옆으로 나오셔서 줄 서 주세요."
객석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는 드레스코드로 단장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일어나 무대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의상준비를 못했더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무대를 걷고 싶은 누구나 환영입니다. 어서 오세요!"
원장수녀님, 본 트랩 대령 막내딸, 외로운 목동, 염소, 갈색 종이로 포장한 선물상자 등등 주연과 조연 소품까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것으로 재치 있게 분장한 사람들.
악당의 차에서 엔진을 떼어낸 용감한 수녀 1, 수녀 2를 표현한 유쾌한 여성들 뒤를 이어 "그냥 나오고 싶었다."는 남자아이가 당당히 무대를 가로질렀다. 다음은 두 갈래로 예쁘게 머리를 땋은 여자아이였고 몸이 불편한 지체장애가 있다는 걸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천천히 성실하게 걸음을 옮겨 사회자 옆자리에 도달한 소녀는 마이크를 들고 있는 사회자 팔에 살짝 기대어 말했다. "저는 주인공 마리아입니다."
청중은 완벽하게 준비해 온 참가자에게도, 아무것도 준비 안 했지만 그저 참석하고 싶은 참가자에게도, 장애를 가진 참가자에게도 온도 차이가 없었다. 모두를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맞아줬다. 맞다. 미국이란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요소는 이런 포용력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상영이 시작되고 관객들은 영화의 주인공들과 하나되어 비누방울을 불었고 컨패티를 터트리며 환호했으며 마음 모아 야유했다. 감미롭게 에델바이스를 연주하는 기타 선율에 따라 폰 후레쉬를 흔들다가 사이좋게 베개를 베고 잔디밭를 침대 삼고 하늘을 이불 삼아 잠든 아이들. 그런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어른들.
깊은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편에게 오늘 행사가 어땠는지 물었다. 평소 효율성과 가성비를 꼼꼼히 살피는 남편에겐한사람에 29달러나 내고영화를 보러 왔다는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날은 돈내고 노숙한 듯 살짝 억울한 그런 사건이었다고.
그렇다면 내 소감은? 그리 많지 않았던 가족 나들이의 기억을 꺼내볼 수 있던 밤, 네살이 되어서야 처음 만나게 된 조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줄 수 있던 이 밤, 다양함이 존중받고 받아들여지는 이 밤 사람들의 모습이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