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은 일도 하게 만드는 나 사용법

by 화혜

별안간 아이 울음소리로 온 동네가 시끄러웠다.


귀를 찌르는 울음소리는 닫힌 창문마저 뚫고 들어왔다.


'누가 저렇게 우는 거지?'


문득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지금 치료에 오는 우리 아이일까?'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 문이 열리며 딸랑이는 방울 소리가 났을 때 설마는 사실이 되었다.

아이는 문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안 들어오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안 가! 안 가!"


듣자 하니 센터에 올 때마다 빵집에 들르는데,

오늘은 시간이 촉박한 바람에 들르지 못했다는 거다.

하지만 아이가 평소 루틴대로 자꾸 빵집에 가자고 보채서

엄마가 화를 내자 소리를 지르며 떼를 썼다는 거였다.


겨우 끌고 센터 앞까지는 왔는데 어머니는 두손 두발 다 드신 듯한 표정이셨다.


"선생님, 오늘 수업 못 할 것 같죠..."


아이는 엘레베이터 앞에 서서 엄마 보고 다시 나오라며 손짓을 하고 있었다.

한껏 흥분한 상태와 반항적인 태도를 보니 호락호락 쉽게 들어올 것 같진 않았다.


'하는 수 없지.'


나는 조용히 치료실에 가서 비장의 무기를 들고 나왔다.


.

.

.


비장의 무기,


주차 타워!



이 아이템으로 말하자면 아이들이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성의 장난감이다.


나는 주차 타워와 자동차를 들고 나와, 입구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혼자 놀기 시작했다.

세상 재미있는 장난감인 것처럼 과장된 리액션을 하며 자동차를 줄 세워 미끄럼틀을 태웠다.

아이가 충분히 내 모습을 관찰할 수 있지만, 주차 타워는 약 절반 정도만 보이게 배치해서

궁금증을 배로 증폭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평소에 자동차를 좋아하니 아마 못 이기는 척 들어올 거라고 기대했다.

'주차 타워 카드를 꺼내 들었는데, 설마 안 들어오진 않겠지.'


고개를 들었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건 이미 신발을 벗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주차 타워는 못 참지.






언어치료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아이들의 투정에 대처하는 일이었다.

떼 쓰는 아이를 다루는 법은 이론보다는 실전으로 몸소 익혀야 했다.

치료는 늘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았고, 아이들은 언제나 나의 예상을 벗어나곤 했다.


초임 때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보며 시행착오를 거쳤다.

애를 붙잡고 설명도 해보고, 어르고 달래 보기도 하고, 부탁을 해보기도 하고,

언성을 높여 무섭게 해보기도 하고, 자꾸 떼 쓰면 혼난다고 겁을 주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식으로 떼 쓰는 아이를 협조시킨다고 해서 치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단 걸 안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아이에게는 아무리 알려주어도 학습이 잘 되기가 힘들다.

어떻게든 통제해서 치료를 진행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치료에 참여하게끔 이끌어야 한다.

만약 그게 어렵다면 그날의 목표를 '떼 쓰지 않고 적절히 의사표현하는 법 배우기'로 바꾸는 게 낫다.




우리 일상에서도 언짢거나 싫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다만 주차 타워에 마음을 바꾸고 스스로 입장한 아이의 케이스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싫은 일도 하게 만들려면,

바로 '당근'을 먼저 제시해서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행동을 촉구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원치 않는 결과, 즉 '처벌'을 상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족스러운 결과, 즉 '보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수업'은 대체로 '하기 싫은 일'이다.

세상 하기 싫은 일을 열심히 하게 만들려면

"수업 안 들으면 게임 못해" 또는 "자꾸 그러면 엄마한테 혼나"라는 처벌을 활용할 수도 있지만,

"수업 끝나면 주차 타워 줄게"라고 보상을 강조할 수 있다.

대부분 처벌보다는 보상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엄마의 불호령에도 꿈쩍 않다가 주차 타워에 바로 넘어온 아이처럼 말이다.




언어치료를 하면서 떼 쓰는 아이들을 다루는 법을 익히게 된 것은 무척 행운이다.


사실 나도 애들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대하는 방법을 그대로 나 자신을 다루는 데 적용할 수가 있다.


예를 들자면, 나는 글을 쓰는 게 소원이었지만, 막상 글을 쓰기 싫어서 오래 도망다녔다.

어느 작가가 말했듯 '유전자 오작동'이랄까, 여러 가지 심리적 기제가 작용한 것 같다.


내가 이렇게까지 회피형 인간인지 몰랐다.

그렇게 나는 주변에 '글을 쓰겠다'라고 선언을 해놓고서 미루고 미루며 몇 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내 인생이 후회로 마감될지 모르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글 써볼 걸', '그냥 할 걸', '늦더라도 해볼 걸'

껄무새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하던 방법을 나 자신에게 써먹기 시작했다.


나는 못난 나를 인정해주었다.

막상 하려니까 잘 해내지 못할까봐 두려운 거구나.


시작하기 전에는 결과를 알 수 없으니 '잘할 수 있을 거다'는 희망이라도 있지만,

했는데 결과가 안 좋으면 더는 핑계거리도 없이 꼼짝없이 실패자가 될까봐 피하고 싶은 거구나.


나의 부족한 자아를 들추고 나니, 뜻밖에 위로하는 자아가 나타나서 나를 격려했다.

당연히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지. 실력을 높인다는 생각으로 그냥 써봐.


'감정'을 재우니 비로소 '이성'이 깨어나 문제의 본질을 직시할 수 있었다.

문제를 직시하니 해결책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나라는 인간에게 해야 할 일을 하게 만들 '당근'은 무엇일까.


나는 스스로에게 출근하기 전 오전 시간, 근사한 카페에 가서 글을 쓰는 시간을 허락해주었다.


주말이면 북적북적한 핫플이라도 평일 오전에는 대체로 한가하다.

명당을 차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혼자 전세낸 것 마냥 온전히 즐길 수도 있다.

이것이 내가 글을 쓸 수 있게 한 '당근'이었다.


평일 오전 카페는 못 참지.


물론 지금도 앞서 했던 다짐이 속절없이 실패할 때도 있다.

못난 자아가 튀어올라서 일을 그르칠 때도 있다.


그럼에도 계속 상기하려 노력한다.


싫은 것을 하라고 다그치면 안 된다.

좋은 것을 하자고 구슬러야 한다.


이것이 아이들을 가르치며 터득한 '나 사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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