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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편견의 잣대로 본 건 아닐까

[신흥사설(申興社說)]

이 글은 독립탐정언론 <신흥자경소>에 2025년 5월 30일(오후 7시 20분) 올라온 기사입니다→ 원문보기


편견 대문용 로고 포함.JPG

[신흥자경소] 과거 30살 즈음이던 필자가 록밴드 동료를 모으던 시절의 얘기다. 당시 필자는 음악 사이트 구인구직 게시판에 ‘동료 모집’ 글을 올리며 같이 밴드음악할 사람을 구하고 다녔다. 결과적으로 그 시기의 동료 모집 작업은 실패로 끝났지만, 어쨌든 그 당시는 직장을 다니다 퇴사한 후 다시 음악을 하기 위해 나름 노력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즈음 나이가 엇비슷한 어떤 남자(A)와 연락이 닿아 직접 만나게 됐다. 먼저, 당시 필자의 모습을 설명하자면, 왠지 땀내가 날 듯한 노가다 근육이 장착돼 있던 데다 편하게 입던 옷마저 허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직장을 관두고 일용직 노가다로 생활비를 벌면서 록밴드 결성을 추진 중이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나름 자유롭지만, 한편으론 위태롭고도 더러운 흙바닥 기운이 A에게 풍겼을 수 있다.


A는 처음엔 필자를 직접 대면하곤 흠칫 놀랐던 듯싶다. 면전에선 필자의 ‘자유로움’과 ‘야생성’을 좋게 보는 듯 표현했지만, 그의 얼굴 근육 중 일부는 불쾌한 느낌을 반영한 듯 부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직접 만난 자리에서 별일 없이 서로 헤어졌다. 하지만, 이후 전화 통화 및 문자 메시지 등을 통해 서로 간에 약간의 고성 및 의견 불합치 등이 여과 없이 표출됐다. 그 과정에서 A가 필자를 보고 느꼈던 인상도 가감 없이 드러났다. A는 전화로 필자를 향해


“그렇게 살다간 도태될 거예요”


라는 말까지 했다. 거기다


“노가다는 정말 아니에요”


라는 말도 덧붙였다. 노가다하는 사람하고는 음악을 같이 할 수 없다는 거였다. 어안이 벙벙하게 한방 맞은 필자는, 직접 만날 때완 달리 공격적인 상대방에게 문자 상으로 다시 직접 만나 얘기를 해보자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왜 직접 보자는 거죠?”라는 경계성 문자로 답할 뿐이었다. 아마 막 나갈 것 같은 노가다꾼이 막말한 자신을 실제로 만나면 물리적 폭행을 가할지 모른다는 공포심을 느꼈던 것 같다. 필자는 그럴 의사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당시 A는 본인을 중소기업을 다니는 월급 생활자라고 했다. 나름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한 인텔리로서의 자부심도 언뜻 내비쳤던 기억이 난다. 그랬던 만큼, 직접 만난 자리에서 “노가다를 뛴다”고 당당히 말하던 필자를 보고 당혹스러워하던 그의 얼굴 근육 떨림은, 결국 자기 입으로 “내(A) 친구들은 서울대 대학원, 연고대 대학원에 진학해서 음악을 한다”는 등 얼토당토않은 말까지 내뱉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결국, A는 노가다를 뛰던 허름한 차림의 당시 필자가 학력(배움)도 짧고 단순무식하다고 느껴져서 같이 엮이기 싫었던 것이다. 이 말을 직접 만난 자리에서 하긴 부담이 되니, 이후 전화나 문자로 이를 더 직설적으로 표현했던 거다.


필자는 나름 상대방을 학력이나 직장 등 세속적 조건으로 평가하기 싫어하는 반골 기질이 강한 인간이다. 그리고 당시 필자는, 단지 이 기질을 ‘노가다’ 등 형태로 온몸에 휘감아 자기 멋에 취해 돌아다니던 거에 불과했을 수 있다. 단지 그뿐인데, 상대는 이 내심을 정확히 파악하기보단 마치 필자를 사회적으로 뒤떨어진 도태 부류로만 여긴 거였다. 실상 학력이나 과거 직장 이력 등 그 대단하다는 세속적 스펙으로만 보자면, 필자가 A에게 딱히 밀리지 않았을 텐데도, 상대방은 당시 필자의 옷차림, 하는 일 등에 기초해 사회적 편견으로만 필자를 재단한 것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당시 필자는 독특한 자기 세계관 속에서 자기만의 뽕에 한껏 취해 천둥벌거숭이처럼 나다니다, 보기 좋게 사회적 잣대에 한방 얻어맞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당시 그 사건을 필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여기고 넘어가려 했지만, 실상은 지나고 보면 그 일은 필자 마음에 상흔을 남겼다. 쉽지 않은 경제난 속에서 나름 상황을 돌파하려 노력하는 가운데, 하고 싶은 일을 용기 있게 추진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세상은 나의 진짜 모습을 알아봐 주지 않고, 세속적 잣대로 현재 처한 상황과 상태만 보고 판단한다는 걸 더 뼈저리게 느꼈던 사건이기도 하다.


이런 비슷한 일들은 또 있었다. 30대 중반 즈음, 필자는 스타트업들이 입주해 있는 공유오피스에서 청소 일을 하고 있었다. 정규직 직장을 다니다 건강이 나빠져 퇴사하고 이것저것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배달, 청소 등 비정규직 일을 간신히 하고 있던 때였다.


공유오피스는 여러 작은 회사(스타트업)들이 입주해 있다. 따라서 그 공간을 왔다 갔다 하며 청소 일을 하다 보면 얼굴이 익어 인사를 나누게 되는 사람도 간혹 생긴다. 그런데 그 공유오피스에 입주한 한 작은 회사에 다니던 30대 남성 B는, 우리 청소 스태프들을 향해 가끔씩 경멸하는 눈빛과 태도를 보였다. 청소 스태프들이 쉬고 있는 공간에 와서 “저기 OO(더러운 곳) 좀 치워주세요”라고 다소 쏘아붙이듯 말하며(이런 지시는 공유오피스 매니저들만 할 수 있다) 경멸스러운 눈빛을 보내기 일쑤였다.


공유오피스에 입주한 회사들의 사무실을 거의 전부 청소하고 다녔던 만큼, 필자는 B가 다니고 있던 회사의 규모 등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B가 딱히 필자보다 세속적 스펙이 확연히 뛰어나진 않을 거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오히려 필자가 더 나았을 수도 있었다. (물론 이 역시 세속적 편견의 잣대긴 하다) 하지만, B의 눈에는 청소 스태프들이 사회적인 스펙 경쟁에서 실패해 청소나 하고 있는 도태 무리로밖에 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B는 할 일을 다 하고 쉬고 있는 청소 스태프들에게 굳이 와서 고압적인 태도로 ‘쉬는 꼬락서니’가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갑질을 해댄 것이다.


배달을 뛸 때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필자는 코로나19 시절 특히 많은 건의 배달 일을 수행했기에 주로 ‘비대면 배달’에 익숙하다. 그만큼 사람을 직접 마주할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직접 배달음식을 받는 고객이 없지는 않았다. 그 경우에 배달원인 필자를 하대하는 사람들을 간혹 마주할 수 있었다. 무시와 경멸의 눈빛이나 하대하는 말투를 배달원에게 매우 노골적으로 행하는 식이다.




이렇듯 인간들은 상대방의 겉모습이나 사회적 지위 등 현 상황만 보고 사회적 편견이나 잣대를 적용해 거기에 맞춰 대하는 경우가 많다. 만일 사회적으로 하급으로 치부되는 일을 한다면, 하대 받을 확률도 올라가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사회적으로 밑바닥이라고 치부되는 일을 많이 해봐서 그런 하대를 종종 받아본 필자는, 당해본 만큼 적어도 나 자신은 상대를 대할 때 그 자의 현재 위치나 상황만으로 판단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최근 그 믿음을 시험할 일이 생겼다. 조선족 3명과의 대치 사건(→관련 기사)이다. 물론, 그 일은 애초에 조선족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 일어난 일이고, 필자가 그들의 겉모습이나 사회적 지위(이미지가 좋지 않은 ‘조선족’이라는 사실)만으로 하대했다고 보긴 어려우니 궤가 좀 다른 사안이긴 하다. 그저 술에 취해 쪽수를 믿고 설친 조선족들에 필자가 대항한 사건이므로 필자 스스로의 신념을 저버릴 짓을 했다고도 볼 수 없다.


하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필자가 조선족들의 행동거지 및 옷차림 등을 보고 사회적 편견에 입각해 대하진 않았는가, 자기 검열을 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긴 했다.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을 더 크게 벌인 요인이 필자에게도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회적 잣대가 편견이라기보다는 통계학적으로 정답에 근사한 경우가 많다”고 말이다. 사람들이 사회적 편견의 잣대로 보는 이유가 애초에 빠르게 흘러가는 우리네 삶 속에서 눈앞의 모든 인간을 깊이 있게 판단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는 해도, 만일 필자가 조선족들을 편견으로 대한 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과거 내게 세속적 잣대만으로 어림짐작하고 하대해 마음에 상흔을 남긴 사람들을 비판하는 일도 우스운 ‘내로남불’ 꼴이 돼 버린다.


여러모로 최근 일은 필자로 하여금 다시 자신을 검열해 보게 만들었다. 과연 나는 잠시잠깐 마주친 상대방의 현 모습만으로 그 자를 다 안다고 착각하며 혹시 모를 편견의 잣대로 대하지는 않는가. 과거의 나를 ‘겉모습’과 ‘하는 일’만 보고 하대했던 인간들이, 어쩌면 다른 시공간 속에서 ‘나’라는 형태로 또 다르게 변주되고 있는 건 아닐까.


<신흥자경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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