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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인지’한답시고 기세를 죽이진 말 것

[신흥멘탈(申興Mental)]

이 글은 독립탐정언론 <신흥자경소>에 2025년 6월 20일(오후 7시 20분) 올라온 기사입니다→ 원문보기


메타인지 객관화 주눅.JPG (사진=픽사베이)

[신흥자경소] 몇 년 전, 필자가 복싱 체육관에 다닐 때 일이다.


당시 그 체육관을 운영하던 관장 A는 젊었다. 심지어 복싱·킥복싱 선수 생활을 관둔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와 훈련을 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한 가지 감명 깊게 들었던 얘기가 있다.


A는 선수 시절, 자신은 “효도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고 했다. 늘 ‘누가 와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품은 채 링에 올랐다고 했다. A가 선수 시절 때 격투기 선수 ‘효도르 예멜리야넨코’는 세계 최강으로 불렸다.


이와 비슷한 얘기를 유튜브에서도 접한 적 있다. 국내 격투기 선수 Y는 유튜브 방송에 나와 “격투기 선수들은 어떤 세계 유명 선수를 만나더라도 본인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링에 오른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비록 무명선수일지라도 프로라면 적어도 그러한 확고한 자기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선수로서 끝”이라고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국내엔 ‘메타인지(meta認知)’라는 용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인지 과정에 대해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발견·통제하는 정신 작용>이라는 국어사전(네이버) 설명 그대로다. 일견 ‘자기 객관화’라는 개념과도 비슷해 보인다.


단, 메타인지는 자신의 인지·사고 과정을 이해하고 점검·조절(통제)하는 데 방점을 두지만, 자기객관화는 자신을 외부에서 ‘바라보는(객관적으로 평가)’ 개념이라는 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두 개념이 비슷하게 쓰이기 때문에, 본 글에서는 딱히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겠다.



어쨌든 그렇게 ‘메타인지’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일각에선 <나름의 용기로 자신보다 체급이 높은 상대나 상황에 맞서려는 사람들>을 조롱하려거나 억압하려는 기류도 생겨났다. 마치 “주제넘게 설치지 말라”는 느낌이다. 나름의 기세와 용기·패기로 자신의 길에서 승부를 보려는 사람들을, ‘자기객관화’가 되지 못한 한심한 사람쯤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보자. 필자가 직접 마주쳤던 복싱 관장 A는, 과연 자기객관화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효도르도 이길 수 있다”는 마인드로 선수생활을 했던 걸까. A는 선수생활이 끝난 시점에도 늘 여러 복싱선수들의 경기를 보며 자세나 기술 등을 다각도로 분석하는 치밀한 사람이었다. 선수 시절엔 더했을 것이다. 자신과 상대의 기술, 습관 등을 철저하게 따지고 분석해서 시합 링에 올랐을 것이다. 일반인들보다 메타인지가 더 발달했으면 발달했지, 뒤처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누가 와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늘 링에 올랐다. 철저한 자기관리 및 자기객관화가 필수인 격투기 선수 Y도 마찬가지였다. 고로 좀 이상하게도 느껴진다. 가장 자기 객관화가 요구되는 프로 격투 선수들이 왜 자의식과잉 같은 생각을 품을까. 일반 대중이 볼 때, 효도르와 같은 세계 최강 격투가에게 세상에 덜 알려진 무명 선수들은 소위 잽도 안 될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므로, A와 Y가 품었던 ‘누가 와도 이길 수 있다’는 그 기세는 일반 대중으로부터 평가절하되거나 비웃음을 살 수도 있다. A와 Y가 품은 그 자기 확신과 기세는 과연 조롱받을만한 과대망상이나 자의식과잉에 불과할까.


필자는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싶다.


프로 격투가가 아니더라도, 우리들은 누구나 ‘삶’이라는 자기만의 링에 올라와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누군가 ‘메타인지’를 구실로 당신을 후려치려는 가스라이팅을 일삼으며 “주제 파악 하라”고 일갈한다면, 당신은 이를 곧이곧대로 수용하기만 할 것인가. 물론 메타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나 자신의 능력·기질·상황·재능 등을 종합적으로 점검하고 이를 토대로 인생을 살아야 보다 더 전략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길을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본능적인 투쟁의 ‘기세’나 발전하려는 ‘의지’를 지나치게 꺾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 주변에 넘쳐나는 ‘메타인지’·‘자기객관화’ 앵무새들의 고함에 움츠러들어 기세나 의지가 꺾여버리면, 설사 객관적으로 내가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기세를 죽이지 않고 덤벼들었다면 혹시 이겨냈을지도 모를 순간에서, 늘 스스로 100% 지는 쪽으로 선택하는 꼴이 돼버린다.


결국, 전략적으로 나를 객관화한 데이터를 늘 보고 내 약점과 강점 등을 두루 깨달아가되, 이를 발전의 자양분으로 삼으며 어떻게든 내 눈앞의 상황·상대들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 자기 확신이나 기세는 유지해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메타인지(or 자기객관화)’와 ‘세계 최강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걸 잘 안다. 내가 절대로 비빌 수 없는 현실에 무작정 덤벼드는 건 무모한 짓이다. 하지만, 메타인지한답시고 기세를 죽이는 게 우리네 삶에 마이너스(-)가 된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지나친 위축을 늘 경계해야 한다는 거다.


가령, 연애시장에서 “여자들이 남자들의 근거 없는 자신감(근자감)에 크게 매료된다”는 얘기는 거의 고전(古典)격 정설에 가깝다는 걸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여자들이 단순히 바보라서 남자들의 근자감에 넘어가는 걸까. 아니다. 설사 남자가 현재는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상태라 하더라도, 여자 마음속에선 남자가 당장 내보이는 기세·용기·자신감·패기 등이 미래에 언젠가 크게 비상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단서로 여겨질 수도 있는 거다.


이처럼, 자기객관화와 메타인지도 좋지만, 지나친 ‘자기검열’이나 ‘주제파악’이라는 함정에 빠져 너무 위축되거나 기세를 죽이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나를 최대한 객관화하여 바라보고 점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면서 자기 장점을 극대화하여 세상에 맞서는 기세와 용기·패기도 중요한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자기 장점과 약점을 모두 제대로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할 줄 아는 ‘자존감’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부당한 억압을 행하는 상대방이 나보다 종합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해서 그저 바보처럼 물러서기만 할 것인가. 현재 처한 상황이 극복하기 어렵다 하여 그냥 비실비실하게 포기만 할 것인가. 종합적인 데이터가 밀린다고 인생이라는 링에서 매일같이 ‘나 죽여줍쇼’라는 마인드로 굽신거릴 수만은 없다. 누구나 장점과 약점은 있다. 내 약점은 전략적으로 다른 장점으로 휘감는 등 방식으로 최소화하고, 장점을 극단적으로 살려 맞서면 된다.


나를 객관화하여 ‘주제 파악’을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를 토대로 내 모든 장점과 단점을 분석하고 상황·상대방에 맞춘 전략을 잘 발휘해 일격필살의 역전극을 향해 달려드는 기세도 무척 중요하다. 그게 없다면, 우리가 이 땅 위에 발 딛고 지지고 볶으며 살아갈 동력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신흥자경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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