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사설(申興社說)]
이 글은 독립탐정언론 <신흥자경소>에 2025년 7월 18일(오후 7시 20분) 올라온 기사입니다→ 원문보기
[신흥자경소] 내 아버지는 지방에서 가난하게 자랐으면서도, 1970년대 당시 ‘후기 법대’로 명성을 떨치던 한 법과대학을 졸업한 인걸(人傑)이었다. 특히 대중을 감화시키는 웅변 실력이 뛰어났다. 불의(不義)나 소인배(小人輩)적 행위를 보면 바로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열혈 사나이’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1970년대 당시 최고 여상(여자상업고등학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그림 등 예체능 재능까지 겸비한 재원(才媛)이었다.
‘청운의 뜻’을 품은 청년이었던 아버지는 집안 지원 없이 고학(苦學)해야 했기에 충분히 공부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러다 취직한 은행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장녀로 태어난 어머니는 교사였던 부친(필자 입장에선 외할아버지)이 일찍 돌아가시어 이른 나이부터 가족 생계를 도맡아야 했다. 충분히 대학을 갈 수 있었는데도 진학을 단념한 채 취직한 은행에서 운명처럼 아버지를 만났다.
그렇게 몇 년 뒤인 1986년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1남1녀 중 막내로 내가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딸과 아들이 생긴 이후 본인들의 꿈을 접고 자영업을 하며 더 험난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10대 때 필자는 늘 바쁘게 생활하는 부모님을 보고 자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난관을 적극적으로 타개해 나가며 누나와 나를 부족함 없이 키워냈다. 그렇게 책임감 강한 부모님 덕분에, 필자는 유년 시절을 어려움 없이 해맑게 자랄 수 있었다.
거기다 부모님은 학업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 자유로운 방식으로 누나와 나를 대했다. 필자의 ‘자유로운 기질’은 타고난 것에 더해, 자식을 억압하지 않고 자유롭게 키웠던 부모님 영향으로 완성된 셈이다. 한편으론 그 영향으로, 필자는 인간을 억압하는 각종 세상 시스템을 향한 ‘반골(反骨) 기질’도 강했다. ‘비주류 감성의 소년만화’, ‘자유로움의 가치를 설파하는 록(ROCK) 음악’ 등을 어릴 때부터 끼고 살았던 영향도 있을 거다. 그래선지 필자는 시스템 안에서 좋은 조건을 두른 사람들을 꼬아 보는 시선이 강했다. 엘리트들을 ‘시스템에 길들여졌다’는 시각으로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그런 세계관이었으면서도, 늘 아버지를 향한 관점만큼은 예외였다. 비록 학벌주의를 비롯한 제도권 시스템을 곱게 보지 못하는 반골 기질이 충만한 필자였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1970년대 당시 손에 꼽히는 법과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을, 공부를 상당히 잘하셨다는 걸 늘 주변에 은근히 자랑하고 다녔다. 이를 직접 아버지께 표현한 적은 거의 없지만, 늘 아버지의 총명함, 똑똑함을 마음속으로 자랑스러워했다.
초등학생 때는, 당시 40대였던 아버지가 키가 작고 배가 나온 걸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초등학생이던 필자를 마중하기 위해 학교 앞에서 기다리던 아버지를 외면했던 적도 있다. 친구가 옆에 있어 부끄러웠던 거다. 철이 들면서부터 그 일화는 필자 마음에 씻을 수 없는 ‘불효의 흔적’으로 남았다. 나이가 먹고 세상 속에서 갖은 고통과 역경을 겪으면서, 나보다 훨씬 작은 체구로 더 위풍당당하게 살아오신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달아갔다. 어머니와 함께 사업체를 운영한 아버지는, 영업장 건물 뒤편에서 담배를 피우던 10대 무리들에게 거침없이 다가가 훈계할 정도로 강인한 분이었다. 남자에게 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렇게 아버지를 통해 배웠다. 기상(氣像)과 호연지기(浩然之氣), 불의를 꾸짖는 아버지의 당당한 모습 자체가 그 어떠한 책이나 강의보다 내게 큰 깨우침을 줬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도 강인한 분이었다. 여성치고는 뼈대가 강했고 힘도 센 편이었다. 장녀였던지라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했기에 다재다능한 면면을 다 꽃 피우지 못한 사실이 자식으로서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처녀 때는 직장을 다니며 집안의 생계를 상당 부분 돕고 결혼 후에는 아버지와 함께 사업을 운영했던, 어머니의 그 모든 삶의 과정에서 여러 재능이 알게 모르게 골고루 쓰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어머니는 그렇게 거친 풍파 속에서도 늘 아버지 편이었다. 그 모습은 항상 내게 ‘훌륭한 아내상’의 표본처럼 여겨졌다. 그랬기에, 필자가 유년시절을 아름답게 보낼 수 있었던 거라고, 늘 생각해 왔다.
성인이 되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필자는 나름 많은 고통과 역경을 헤쳐 와야 했다. 그러던 중에 몇 해 전, 개명(改名)을 하기도 했다. 그전까지의 모든 삶의 고통을 끝내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시기였다. 하지만, 개명한 지 1년 여 만에 다시 원래 이름으로 돌아가기 위해 재개명 신청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가 지어주신 원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게 혈통의 의지를 제대로 잇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다행히도 재개명이 허가돼 원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독립적인 성격 때문에 성인이 되면서부터 부모님과 다툼도 있었고 따로 떨어져 산 기간도 꽤 되지만, 부모님의 헌신과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으로서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지키고 싶었던 거다.
나이가 들수록 나의 뿌리나 근본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혈통은? 조상은?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이를 파악하는 데 있어, 내게서 가장 가까운 뿌리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걸어가고 있는 필자 입장에서, 나름 한 번은 ‘나의 뿌리’를 되새기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젊은 시절의 부모님’에 대한 회고 글을 짧게 써보았다. 부모님은 여전히 건강하시다. 이에 항상 감사하며 살고 있다. 인생 역경에 허우적대며 자식 된 도리를 하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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