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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Sep 16. 2019

귀신과의 동거



  내가 사는 집 거실에는 100kg에 육박하는 소파 귀신이 있다. 그 귀신은 주로 8시에 활동을 시작하는데,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휴대폰으로 열정의 쇼핑을 시작한다. 밤 10시가 되면 그 행위는 절정에 달해 휴대폰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형상을 띈다. 몹시 귀신 다운 모습이다.



  처음에는 내 집의 집안 용품을 하나둘씩 사 모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나도 모르는 집안 용품들이 곳곳에 생기는 걸 보고 내가 드디어 헛것을 보는구나 생각했다. 그때가 귀신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때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설거지를 하던 어느 날 아침, 귀신은 소리 없이 내 뒤에 쓱 다가와 귀신답지 않게 분홍빛 혈색이 도는 통통한 손으로 택배 박스 하나를 건넸다. 그 안에는 그릇 속에 물과 함께 뿌려놓으면 거품이 일면서 세정 효과가 있는 가루 세제가 들어있었다. 그자는 ‘귀신이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가 떨어진다’는 말에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이는 자라 세제만 내 손에 쥐여준 채 유유히 부엌을 빠져나갔다. 또 어떤 날은 특이하게 생긴 밀대 걸레를 구입해 소파에 앉아 조립을 하더니 조용히 낮은 목소리로 사용 방법을 내 귀에 읊조려 나를 소름 돋게 하였다.



  그자가 택배만으로 나를 놀래는 건 아니다. 그자는 술을 못 먹어 죽은 귀신들의 모임에 자주 참석하는데, 그곳에서 귀가하는 밤이면 귀신답지 않게 통통한 손에 비닐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나타난다. 그 안에는 편의점에서 산 맥주와 과자가 가득이다. 또 사 왔냐 물으면 다른 귀신들이 사줬다고 자주 둘러대는데 그 자 주변에는 왜 이렇게 술 마실 때마다 편의점 장을 봐주는 귀신이 많은지 모르겠다. 귀신들이 돈도 많다.



  토요일 아침이면 그자는 귀신들의 필수품인 플레이스테이션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가장 즐겨하는 'GTA5' 를 할 때 보다도 게임 구매 할인 창을 켜고 사고싶은 게임을 뒤질 때, 귀신들에게서 볼 수 없는 총기 어린 눈을 띈다. 뭐 하나라도 득템하고 나면 그자는 어느 귀신보다 가장 현란한 손가락 기술로 조이스틱을 돌린다.  



  나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 아니, 신(神)정이 많은 사람이다. 소파 귀신을 위해 내 신발장보다 1.5배는 넓은 신발장을 마련해주었을 때 깨달았다. 보통은 사람이 귀신보다 신발이 훨씬 많을 텐데 우리 집은 다르다. 귀신은 자신의 신발장이 더 넓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그 신발장은 금세 고가의 운동화들로 채워졌는데 며칠 전 나이키 사카이를 2개나 응모했다는 그자의 말을 듣고 나는 뒷목을 잡았다.



  시간이 흐르자 점점 그자와의 동거가 익숙해지고 있다. 소파가 아닌 컴퓨터 방에서 쇼핑을 하고 있으면 조용히 다가가 문을 닫아드리고, 조상들이 부엌 신에게 정안수를 바치셨듯 나는 그를 위해 네스프레소 한잔 얼음 동동 띄워 책상 위에 올려드린다. 나는 그렇게 귀신은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다는 웃어른들의 말씀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다.



  오늘은 밤 11시에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더니 역시나 귀신이 소파에 앉아 택배 박스를 뜯으며 나를 맞이했다. 그는 무언가 들킨 듯 움찔했다. 가만히 서서 이번엔 무얼 샀나 구경을 했다. 귀신의 거친 손에 황톳빛 박스가 뜯겨지고 그 안에 검은 상자가 눈에 띈다. 실눈을 뜨고 멀리서 지켜보았다. 로봇 같다. 귀신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블랙 팬서란다.  



  오늘은 진지하게 고민이 된다. 굿이라도 한 판 벌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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