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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 Mar 06. 2016

여행 중입니다(1)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바로 지금.

30분째 볼펜 꼭지를 정신 사납게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고 있다. 


정확히 24분 후에 나는 사장, 이사진까지 참석한 회의에 들어가 기업 브랜드 이미지 제고를 위해 벌여왔던 태스크포스 팀 운영 결과 보고를 해야 한다. 설상가상이다. 여섯 달 내내 쉬지 않고 야근을 하게 만든 이 프로젝트는 마지막까지 내 속을 쥐어뜯어 놓고 있다. 


지난봄, 거물급 정치인의 비자금 조성에 연루된 인물로 회사 대표의 이름이 거론되면서 회사는 쑥대밭이 됐다. 뉴스에서는 곧 회사 주요 부서를 압수 수색할 것이라고 보도했고, 주가는 연일 바닥을 쳤다. 급하게 비상대책위원회가 소집됐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리고 다음 날 여론을 잠 재울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하겠다는 공고가 회사 인트라넷에  올라왔다. 


차출 기준은 아무도 몰랐다. 위에서 “너 본사로 출근해.”라고 통보하면 다음 날부터 광화문 어딘가에 있다는 건물로 출근해야 했다. 회사에서는 반년 간 한시적으로 운영될 부서라고 설명했다. 


대대적인 변화가 있다는 사실은 감지했지만, 나는 이 모든 상황에 시큰둥했다. 회사에 입사할 때부터 나에겐 야심 찬 포부라든가 계획이랄 것이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대로 운 좋게 집 근처에 있는 회사에 입사를 했고, 그럭저럭 버티면  먹고사는 데에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나의  필요조건에  맞아떨어지는 이 회사의 존재는 몹시 고마웠지만 거기까지 였다.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인재라는 목적의식은 최종면접이 끝난 후 탈탈 털어내버렸다.


그런 내가 첫 타자로 광화문에 불려 왔다. 찜찜했지만 이미 본사에는 내 이름으로 된 테이블, 개인 컴퓨터까지 마련돼 있다고 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많은 일들이 벌어져 있었다. 


그렇게 지나온 6개월은 정말 정신없이 바빴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내 관심대상이 아니었던-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했다. 


어제부터 아랫배가 간질간질했다. 수면제를 5알이나 털어 넣었지만 잠들지 못했다. 알람 소리에 몸을 일으켰을 때는, 수면제 기운이 아직 남아 있어서 머리가 무겁고 몽롱했다. 어떻게 회사까지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엄지손톱을 이로 잘근잘근 씹으면서 발표 자료를 뒤적거렸다.


서류파일 앞면 하단에 ‘2040이 선호하는 젊은 감각의 트렌드 리더’라는 회사 구호가 적혀 있었다. 글씨 위에 손을 놓고 여러 번 따라 썼다. 초조했다. 김밥, 샌드위치, 빵 등을 사와 내 테이블에 올리는 후배의 호의가 눈에 거슬렸다. 아무 말도, 숨도 쉬지 말고 내 시야에서 사라져주길 바랐다. 나는 내 기분을 살피는 후배를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선배님, 심호흡 크게 하세요. 그리고 이거 커피, 한 잔 드세요.”
“아니, 화장실 먼저 다녀와야겠다.”


왜 화장실에 가려고 했는지, 의자에서 몸을 떼는 순간 잊어버렸다. 일단 일어났으니 화장실에 들어갔고, 세면대 앞에 서서 차가운 물로 뽀득 소리가 날 때까지 손을 씻었다. 이때부터 벌어진 일은, 매우 어렴풋하게 간유리에 비친 풍경처럼 남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회의 30분 전, 팀원들은 테이블 위에 준비한 서류들을 한 부 씩 철해 올려놓았다. 5분 전, 모든 참석 인원이 착석했다. 나는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발표석에 자리했다. 그리고 숨 가쁘게 우리의 치적을 알려나갔다. 고개를 끄덕이는 임원들의 모습을 보며 큰 실수는 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준비한 발표 서류가 마지막 페이지로 넘어가자, 나는 단상에서 내려와 섰다.  정신없는 와중에 문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무리 인사를 하는 것도 까먹고, 엄마 품을 찾는  어린아이처럼 무언가에 홀린 듯 회의실을 나왔다. 


분주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물끄러미 바라봤다. 시끌벅적, 회의실을 나서는 이들로 한바탕 소란스러웠다. 난 눕듯 의자에 몸을 기댔고, 후배들은 회의실 뒷정리를 하느라 여전히 분주했다. 끝났다. 이제 나는 내일 다시 상암동 사무실로 출근을 하면 됐다. 끝나고 보니 별 일 아니었다. 매우 간단하게, 준비된 파일을 읽는 것으로 내 일은  마무리됐다. 그래, 별 일 아니었다. 아직 여운이 남아 손 끝이 떨리고 있지만, 나는 이십 년 같았던 이틀 간의  마음고생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내일부터 다시 쳇바퀴 같은 일상을 이어나가면 됐다. 


분명히 마음으로는 그랬는데 이상했다. 이대로는 아니었다. 내일 가장 먼저 사무실에 출근해 앉아 있을 내 모습을 떠올리자 발 끝이 움찔거렸다. 떠나고 싶었다. 아니, 떠나야 했다. 차곡차곡 쌓아 놓은 연차를 쓸 합당한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만에 하나 내 책상이 다음 날 바로 빠진다고 해도 생각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급하게 상암동에서 땀 냄새를 풍기고 있을 부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여름휴가를 좀 당겨서 쓰고 싶습니다. 갑작스럽게 말씀드려 정말 죄송합니다만, 개인 사정입니다. 다녀와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광화문은 좀 어떻던가?”
“가능할까요?”
“뭐, 안될 건 없을 거 같은데. 어차피 지금 사무실로 복귀한다고 해도 애매해서 말이야.”


상사들은 늘 자신의 깊은 배려심을 드러내기 위해 안달이 나 있다. 이번에도 부장은 자신의 사려 깊음에 스스로 크게 감동한 듯 여러 차례 남 이야기를 하듯 자신의 성품을 칭찬했다. 신입 때부터 공을 채가던 상사들의 몰염치함에 학을 떼고, 자기는 언제나 부하 직원들의 입장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그런 내용이다. 부서 이전 후부터 매일 두세 번은 듣다 보니 눈 감고도 욀 수준이었다. 


큰 고비를 넘겼으니, 이제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전화기를 손에 든 채로 항공권 예약 사이트에 접속했다. 싼 값에 항공권이 제법 나와 있었다. 시애틀, 방콕, 오키나와, 멜버른, 샌디에이고 등등. 내 몸 하나 태울 비행기는 넘쳐났고, 가격대를 높이면 세계 어느 호텔이든 갈 수 있었다. 이제부터 내키는 대로다. 


나는 1년 내내 화창한 날씨로 유명한 샌디에이고에 가기로 했다. 무엇보다 샌디에이고에는 절친한 친구인 인정이 있었다. 머리 아프게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믿고 비빌 구석이 있는 곳이었다. 문자를 넣었다.


“나  내일모레 가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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