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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 Mar 06. 2016

여행 중입니다(2)


“내가 있는데 무슨 호텔이야. 몸만 와. 오기만 하면 내가 제대로 모실테니까.”


인정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반가워해주는 모습에 고마워하며, 2일 후 샌디에고 공항 어딘가에 있을 내 모습을 떠올렸다. 집 앞 슈퍼마켓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는 것 같았다. 집에 가는 길에 환전을 했고, 여권을 챙겨 가방 앞주머니에 챙겨 넣고 나니 정말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이제 밤새 짐을 챙겨 내일 공항에 도착하면 됐다.


“왔어? 왔어? 어디야? 몇 번 게이트로 나왔어?”


휴대폰 전원을 켜자 부재 중 통화 알림 메시지가 주루룩 밀려 올라왔다. 인정이었다. 

“이제 내려. 입국심사 받고 나가면 그래도 1시간은 걸릴텐데. 어디 들어가 있어.”


빠르게 문자에 답을 하고 다시 휴대폰 전원을 껐다. 훅 밀려 들어오는 샌디에고의 공기,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들이 낯선 아시아 여자에게 보내는 시선, 하염없이 늘어서 있는 공항의 긴 줄이 이국에 왔음을 느끼게 해줬다. 


자다 깨 정신이 없던 나는 멍하게 입국심사관을 쳐다보며 얼른 줄이 줄어들길 바랐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에어콘이 작동되고 있었지만 뜨거운 햇살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심한 갈증이 느껴졌다. 나가자마자 시원한 아이스커피 한 잔을 사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공항 밖으로 나오기까지 1시간이 걸렸다. 


게이트 앞에 있던 인정이 폴짝폴짝 뛰면서 내게 사인을 보냈다.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 복장을 하고 와서는 양 손을 들어 휘휘 젓기까지 하니 모든 이들이 인정을 쳐다봤다. 피할 새도 없이 인정이 달려와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야야야, 내려 놔.”
“나 보러 온 거야?”
“겸사겸사. 그런데 너 옷 이렇게 입고 다니는 거 어머님도 아시니?”
“아니, 미국이잖아. 웰컴 투 샌디에고!”


인정이 나를 다시 한 번 꽉 끌어 안았다. 격렬한 환영인사는 여기까지.


차를 타고 인정의 집으로 향했다. 차창을 조금 열어 바람이 들어오게 했다. 공항에서와는 다르게 바람에 찬 기운이 배어 있었다. 긴 소매 옷을 입어도 반소매 옷을 입어도 상관 없는 날씨였다. 텅 빈 도로를 달리며 복작거리는 한국을 떠올렸다. 


쉴 새 없이 수다가 이어졌다. 둘 중 한 명이 숨만 쉬어도 눈물이 날 정도로 웃음이 났다. 20분쯤 후 인정의 집에 도착했다. 낑낑 거리며 캐리어를 옮겨놓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인정의 전화기에서 나는 소리였다. 

“당장 내일이요?”


인정이 지원서를 넣었던 디자인 회사에서 온 연락이었다. 친구는 이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지난해부터 정성을 들여 포트폴리오를 만들었고, 계획에 없던 대학원에도 진학해 학위를 받았다. 몇 달 동안 연락이 없어 낙담하고 있던 차에 전화가 온 것이었다. 


“미안해. 면접만 보고 올게. 그 동안 여기 있어. 아님 같이 뉴욕에 가보는 건 어때?”
“아냐, 시간도 별로 없고 그냥 여기 있을게.”
“그럼 룸메이트한테 말해 놓을게. 여기 있어.”
“아니! 마음 편하자고 온 건데 네 룸메이트 눈치보고 싶진 않다.”


분명 이건 기쁜 일이었지만, 아무 계획 없이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온 내겐 날벼락이었다. 인정은 내일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떠나야 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혼자 샌디에고에 머물겠다고 했다. 계획과 한참 멀어졌지만 초반부터 계획이랄 것이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달라진 것도 없었다.


지금 호텔을 잡는 건 무리였다. 싼 값에 나온 호스텔이 내 예산과 맞았다. 시내에 있는 호스텔에 묵으면 트램, 버스를 타고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 역시 계획에 없었지만 지금은 깊이 고민하고 결정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밤 늦게 마지막 한 자리가 남은 호스텔을 예약했다. 


이른 새벽 친구는  떠났다. 좋은 소식을 들고 오겠다며, 평소 입지 않아 옷장 구석아 박아놨던 정장까지 한 벌 챙겨서 떠났다.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해 있었다. 시차 때문에 새벽부터 몽롱한 상태로 깨 있었다. 인정을 보내고 나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어떻게 숙소까지 가야할지, 가서는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이 끝 없이 밀려들었다. 


머릿속이 터져버리기 일보 직전이 되자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배짱을 부렸다. 인정이 알려준 대로 집에서 5분 정도를 걸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막막한 샌디에고 한복판에 서 있는데 햇살은 눈물이 날 정도로 따뜻했다. 왜 인지 갑작스럽게 행복을 느꼈다. 저 멀리, 굼뜨게 올라오는 버스 한 대가 보였다. 내가 탈 버스였다.


헤맬 필요 것도 없었다. 내가 내릴 곳은 버스 종점이었다.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을 따라 내릴 준비를 했다. 옆에 앉아있던 진한 선글라스를 낀 흑인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여행 중인가 보네요?”


내 캐리어를 가리키며 물었다. 흑인 남자는 내가 이어폰을 끼고 안 들리는 척을 하자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어디에서 왔어요?”


의도를 알 수 없는 남자의 접근에 덜컥 겁이 났다. 무서웠다. 일단 경계했다. 

“영어 못 합니다.”
“일본? 한국? 중국?”
“한국.”
“오, 코리아. 잘 알죠. 도와줄게요.”


휘청대는 내가 딱했는지, 남자는 번쩍 가방을 들어 올렸다. 나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버스에서 내려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남자는 내가 들고 있든 지도를 들여다 보더니 자기와 반대 방향이라며 캐리어 손잡이를 내밀었다. 조심히 다니고 좋은 여행이 되길 바란다고 환한 미소를 보이면서. 


남자의 뒷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났다. '나 지금 여행 온 거 잖아!' 왜 겁을 먹었던 건지, 스스로 우스웠다. 그리고 내 무례함에 어이가 없었다. 한참을 자리에 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남자가 새끼 손가락 만하게 보일 때쯤 호스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달달달 바퀴 소리를 내며 캐리어를 끌고 천천히 샌디에고 거리를 둘러봤다. 날씨는 여전히 완벽했고, 인적을 찾기 힘든 거리거리가 낯설게 다가왔다. 시내가 아니라 한적한 산골 어딘가 와 있는 느낌이었다. 물론 사람이 있긴 있었다. 건물마다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홈리스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 노숙자와 눈이 마주쳤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남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오려는 몸짓을 보였다. 반갑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덕분에 주변 경치를 즐기는 건 여기까지였다. 캐리어 손잡이를 꽉 움켜 잡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10분쯤 지나 숙소 앞에 도착했다. 키를 훌쩍 넘는 압도적인 크기의 대문을 보자 안도가 됐다.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손바닥으로 찍어냈다. 호스텔 대문 옆에 있는 벨을 누르자, 육중한 버저음을 내며 게으르게 문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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