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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 Mar 07. 2016

여행 중입니다(3)

체크인 시간은 오후 3시. 지금은 12시 반이었다. 어린 티가 많이 나는 호스텔 직원은 휴게실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짐은 여기 보관할 수 있어요. 다른 계획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저 쪽 커먼룸에서 좀 쉬고 있어요.” 


그 앳된 청년에게 짐을 맡긴 후 커먼룸으로 향했다. 


달달 거리며 천장에 달린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고, 보는 이 없는 텔레비전에서는 한껏 흥분한 캐스터가 축구경기를 중계 중이었다. 몸을 돌려가며 방 안을 크게 한 바퀴 둘러봤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소파 위로 털썩 쓰러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세 블럭을 걸어오면서 만난 수 많은 노숙자들로 인해 온 몸이 굳어 있었다. 


절대 쳐다보지 말고, 미소는 더더욱 지어서는 안 된다. 지갑을 만지작 거린다든가 담배 가치라도 내주어서는 안 된다고 인정이 주의를 줬었다. 그래서 캐리어 손잡이를 꽉 쥐고 앞만 보고 빠른 속도로 걸었지만 내 신경은 터질 만큼 예민해져 있었다. 


잠이라도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소파 손잡이 위에 다리를 올리고 세로로 누워봤지만 불안함이 가시질 않았다. 잠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자세를 고쳐 앉은 후 가방에 있던 책을 꺼냈다. 여행을 갈 때면 습관처럼 챙기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이다. 


내가 읽은 몇 권의 사강의 책들에는 높은 사회적 지위와 능력을 갖춘 중년 여성이 있었고, 

그녀의 곁을 맴도는 더 매력적인 연하 남성과의 연애라는- 내게는 몹시 솔깃한- 플롯이 흥미롭게 그려졌다. 두껍지 않은 책의 굵기와 이에 반비례한 세밀한 감정 표현은 어떤 여행지와도 잘 어울렸다. 


마흔이 가까운 폴, 다른 여인과의 사랑을 숨기지 않는 연인 로제에 지쳐갈 때쯤 기적 같은 남자 시몽이 나타난다.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시몽은 언제 봐도 매력적이었지만 폴은 로제의 품을 찾는다. 이 탐탁지 않은 러브스토리는 오로지 내게 대리만족을 갖게 하는 폴 때문에 여행 필수품이 됐다. 


간 밤에 표시해 뒀던 페이지를 찾아 책장을 넘기는데 휴게실 문이 열렸다. 한 백인 남자가 통화를 하며 걸어 들어왔다. 황급히 책을 덮었다. 이 곳에서의 짧은 경험 상 이 남자는 아무 이유 없이 내게 말을 걸 게 뻔했다. 심지어 남자는 내 맞은 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대화를 나눌 최적의 위치였다. 나는 간절함을 담아 두 눈을 꼭 감았다. 


눈치 없이 전화가 울렸다. 도저히 자는 척을 할 수 없었다. 인정이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했다며 내 안부를 궁금해 했다. 때 마침 백인 남자는 전화를 끊었고, 내가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래, 잘 왔다고. 평소에는 전화 한 번 안하다 갑자기 웬 전화야. 아니 아니, 잠깐 끊지 마. 그렇다고 바로 끊을 건 또 뭐야. 지금 내 앞에 백인 남자애가 앉아 있는데 전화 끊으면 바로 말 걸 기세야. 얘네들은 천성적으로 낯 안 가리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나봐?”
“누가 그러게 사서 고생을 하래? 내 방에서 자라니까.”
“말도 안 통하는 네 룸메이트 얼굴 보면서 잘도 잠을 자겠다.”
“그건 그렇네. 남자애는 잘 생겼어?”
“잘이야 생겼지.”
“그럼 나쁜 애는 아닐거야. 잘 놀아봐.”
“그런 식으로 사람 판단하는 게 어딨어! 면접은 잘 봤어?”


인정은 지금 내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혼자 깔깔 거리더니 묻는 말에 대답도 안하고 뚝 전화를 끊어버렸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안녕.”

인사를 해버렸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어.”

대화를 잘라야했다.


“응. 3시간이나 기다리라고 하더라. 그런데 저기... 미안한데 난 영어를 못해서 네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다 알아 들었는데? 어디서 왔어? 휴가?”
“응....휴가. 한국에서...”


걸려 들었다. 더듬거리며 건넨 처참한 영어에도 남자는 반색을 했다. 나는 토익 시험을 보듯 그와 이야기를 나눠야했다. 다양한 종류의 이야깃거리들이 나왔던 것 같지만 기억에 남는 건 없었다. 아무리 크고 중요한 시험이라고 해도 끝날 때 쯤에는 긴장이 풀리고 졸리기도 한 것처럼, 다행히도 2시간 쯤 지나자 낯선 외국인과의 대화도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대화의 질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분위기는 분명히 편안해지고 있었다. 


남자 이후로 커먼룸에 들어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우린 마치 한 팀처럼 움직였다. 일단 근처 마트에 가서 간단하게 먹을거리를 사오기로 했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배가 몹시 고팠다. 식당에 가기는 부담스럽고 굶기는 아쉬웠다. 남자는 호스텔 뒤편으로 대형 마트가 있는 걸 봤다며 알은 체를 했다. 호스텔 문을 열고 나오자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건물 벽에 기댄 홈리스들이 눈에 띄었다. 친하진 않아도 동행인이 있으니 마음이 놓였다. 남자가 봤다는 마트는 호스텔 이용객들이 많이 가는 곳이었다. 일회용 생필품들은 물론, 혼자 먹을 양만큼 포장된 음식들이 종류별로 갖춰져 있었다. 일단 각자 흩어져서 장을 보기로 했다. 


나는 과자, 탄산음료, 샌드위치, 초콜릿까지 쉽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샀다. 스트링치즈, 초콜릿 푸딩, 1kg가 넘는 대용량 감자칩이 사고 싶었지만 먹을 자신이 없어 만지작거리다 포기했다. 계산대 앞에서 만난 남자는 블루베리, 요거트, 아몬드, 바나나를 바구니에 담아 왔다. 그가 잡은 음료수에는 오가닉 티라고 써 있었다. 음식 취향이 매우 달랐다. 우리는 서로의 장바구니를 들여다보고 웃었다. 


“과일은 너무 셔” 

내 말에 그는 먹기 좋게 손질돼 있는 멜론을 하나 집어 들었다.

“이건 괜찮을 거야. 그리고 내 이름은 로웬이야. r.o.w.a.n. 로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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