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명 Mar 07. 2016

여행 중입니다(4)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부엌으로 가 테이블 위에 사온 음식들을 펼쳐놨다. 키친룸 외 다른 곳에서는 음식물 섭취가 금지 돼 있었다. 꺼내놓고 보니 양이 꽤 많았다. 


휴지를 가져오겠다며 나갔던 로웬이 뜨거운 커피를 가지고 돌아왔다. 눈짓으로 어디서 났는지 물어보자 반대편을 가리켰다. 


그리로 가서 콧노래를 흥얼 거리며 찬장에서 큰 머그를 찾았다. 양손으로 잡아야 들릴 정도로 큰 머그에 커피를 가득 채웠다. 뜨겁고 진하게 내려진 커피 향을 맡자 딱딱하게 긴장하고 있던 몸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커피를 따르며 로웬이 앉은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술에 취한 외국인이 로웬 옆에 앉는 모습이 보였다. 호스텔 현관에서 스쳤던 사람이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남자는 반가워하며 로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커피가 쏟아질까 조심조심 테이블로 걸어갔다. 머그를 내려놓자 남자는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동행이 있었구나. 안녕, 난 존이고 호주에서 왔어. 넌?”
“아, 이 쪽은 한국에서 왔고 이름이....?”


아직까지 이름도 말하지 않고 있었다니. 내 이름을 들은 로웬은 눈을 크게 떠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음하기 쉬운 이름이야. 영어 같기도 하고.

옆에 앉은 존은 갈 생각이 없는지 손에 든 맥주캔을 홀짝이며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나는 아니고 로웬에게 집중된 관심이었다. 로웬은 내게 미안하다고 눈짓을 한 후 그 호주인과 대화를 이어갔다. 그 사이 나는 부스럭 소리를 내며 뜯은 샌드위치를 다 먹어 치웠고, 옆에 있던 초콜릿 포장지를 뜯었다. 


대화에 열중하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 허공을 바라보면서 무의식적으로 열심히 우물거렸다. 최선을 다해 음식을 씹어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고,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기를 바랐다. 그 때 로웬이 블루베리와 멜론이 든 과일 상자를 내밀었다. 


“음, 그럼 미안하지만 하나만 먹을게.” 

로웬은 내 말투와 몸짓을 따라하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침 술에 취한 호주인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했는지 자리를 떴다. 


“나도 호주에서 왔거든. 내 말투 때문에 호주 사람인 걸 알았대.” 

키친룸에는 로웬과 나, 또 단 둘만 남았다. 


20분쯤 지나 다시 커먼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던 로웬은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들을 보여주며 본격적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작년부터 물리 치료사로 일을 시작했고, 올 초에 캐나다에 살고 있는 친구가 좋은 자리가 있다며 제안을 해왔다고 했다. 여러 조건이 맞았고,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해 다음 달부터 한시적으로 캐나다에 머물 예정이었다. 


새 일을 시작하기 전에 4달 동안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샌디에고는 호주에서 시작된 많은 여행지 중 한 곳이었다. 다음은 샌프란시스코, 라스베가스, 텍사스, 아이슬랜드 순이었다. 그 중에서도 아이슬랜드에 대해 기대가 매우 크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슬랜드에 다녀 온 친구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이야길 해줬다며 살짝 흥분한 듯한 목소리를 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로웬이 한결 편해졌다. 낯설고 무섭기도 했던 마음이 어느새 친근함으로 변해 있었다. 그제서야 로웬을 하나씩 뜯어보기 시작했다. 


흰색 셔츠, 부분부분 물이 빠진 청바지는 발목이 살짝 보이도록 밑단을 접어 입었다. 그리고 요즘 한국에서 많이 팔린다는- 공항에 있던 잡지에서 읽었다- 것과 같은 디자인의 구두를 신고 있었다. 깔끔했다. 태어날 때부터 하얬을 피부는 반들거렸다. 


내 차림새는 어딘가 나이들어 보이고 조금 초라하기도 했지만 구석구석 내 흠을 찾아낼 만큼 가깝게 앉은 것은 아니니 다행이었다. 

“보여줄 게 있어.”

로웬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건....너무 가까웠다. 이 정도면 숨소리도 느낄 거리였다. 


‘초면인데...’ 

많은 생각이 동시에 머릿속을 휘저었다. 로웬은 내 가방에 달려있던 목 베개를 발견하곤 신기해하며 가져갔다.


“이런 것까지 챙겨왔어?”

로웬은 베개를 목에 끼우고는 앉아있던 소파에 몸을 더 깊이 집어넣었다. 


“좋다. 나 이거 줘.”
“그럼 나는? 난 3일 후에 다시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로웬이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오른팔을 쭉 뻗었다. 좀 전에 호스텔 직원의 말에 기계적으로 움직였던 것처럼 로웬의 유치한 장난에도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나는 몸에 힘을 빼고 로웬의 팔에 기댔다.


“나쁘지 않네. 그럼 이거 나 줘.”
“안 돼. 이건 많이 비싸거든.”

로웬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는 앞을 보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목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박동도 조금 빨라졌다. 오랜 만에 느껴지는 이 감정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생각지 못하게 찾아온 주체 못할 설렘이 싫지 않았다. 


로웬과 함께한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렀고, 조금 전의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3시가 됐다. 목베개를 벤 채로 여전히 소파에 누워 뒹굴거리는 로웬을 일으켜 세웠다. 직원을 만나러 가는 길에 비상용으로,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정말 비상인 경우에만 연락하자면서.


“난 여기 있는 24시간 내내 비상상황인데.”

내가 앓는 소리를 했다. 


“그럼 계속 전화를 하면 되지.”

처음처럼 로웬은 다정하고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작가의 이전글 여행 중입니다(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