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기 한참 전 페미니스트 논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빌려다 읽었던 나혜석에 관한 책이 다시 읽고 싶어서 몇 년 전 도서관을 검색했으나 내가 읽고 싶었던 책(제목이 기억이 나지 않아서 애먹었다.)이 보이지 않아서 포기했었다. 최근에 다시 생각이 나서 도서관에서 검색을 해보았으나 내가 읽었던 두 권 중에 한 권으로 보이는 책이 서고에서 잠자고 있었고, 또 다른 한 권은 검색에 뜨지 않았다. 이웃 도시 도서관까지 검색을 해도 없다고 나와서 다음 이웃 도시 도서관까지 검색했는데도 뜨지 않았다. 대신 서고에 잠자고 있던 처음 보는 <첫사랑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가다>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도대체 어떤 여자이길래 결혼을 하면서 죽은 전남친의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가자고 했는지, 또 그걸 들어주는 남자는 도대체 뭔 심정이었는지 이게 궁금한 사항 중 하나라 읽으려던 건데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주말을 기다려 아침 일찍 식구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집을 나와 기차를 타고 가서 빌려다 읽었다.
결혼 전 읽었던 기억을 끄집어 내자면 나혜석에 대한 내 인상은 '금수저 집안에 태어나 오빠 덕을 보았던 운이 억세게 좋았던 여자'라는 점에서 페미니스트로 대접하는 거에 살짝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나혜석은 수원에서 '나 부잣집', '나 참판 댁'이라고 불리는 집에 태어나 시흥, 용인의 군수를 지낸 개화관료인 아버지 밑에서 수원의 삼일여학교와 서울의 진명여학교를 나왔다. 나혜석의 아버지는 개화관료라고 언급되고 있긴 하지만, 나혜석이 유학 중에도 나이 찼다고 시집이나 가라고 학비를 대주지 않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시대 분위기를 무시하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여자아이를 밖으로 내돌리면 큰일 난다며 학교도 보내지 않던 시절에, 다행히 여자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는 생각했던 부모님 덕분에 두 살 아래 여동생 지석과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졸업한 학생수가 7명이었다니 당시 여성의 교육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개명한 오빠 나경석이 딸에게는 유학이 필요없다는 아버지를 설득해 나혜석의 일본 유학을 추진한 덕분에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나혜석이랑 동생 지석은 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이름이 없었다. 나혜석은 '아기(兒只)'가 이름이었고, 지석은 '간난(看蘭)'이 이름이었다. 학교에 입학하면서 '혜석은 '명순(明順)'이란 이름을 얻었고, 동생 지석은 '양순(良順)'이란 이름을 얻었다가 졸업할 때 비로소 '나혜석', '나지석'이 되었다. <인간으로 살고 싶다>의 저자는 '아이가 태어나도 언제 죽을지 몰라 이름도 짓지 않고 돌이 지날 때까지 기다리던 시절이었다. 여자는 끝내 공식적인 이름을 얻지 못하고 ∼'라고 쓰고 있는데, 이런 식이었다면 그 시대 남자 아이들도 해당되는 얘기가 된다. 여자 아이들만 일찍 죽지는 않았을텐데 왜 여자 아이들만 이름이 없었을까? 더구나, 호적에도 그대로 올라갔고, 학교 입학할 때까지도 그 이름 그대로였다. 나혜석은 1896년에 태어나 1906년에 학교에 입학했다. 10년을 이름없이 살았는데 '언제 죽을지 몰라'는 이름 없음에 대한 이유로 납득이 가는 설명이 아니다.
나혜석의 첫째 오빠 나홍석은 둘째 큰아버지의 양자로 갔고, 13살 차이 나는 언니 계석은 신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고 이른 나이에 출가를 했다. 나혜석이 살던 시대는 남자들이 첩을 여러 명 두고 살던 축첩이라는 제도가 있던 때다. 나혜석의 아버지 역시 첩을 여럿 두었고 그 중에는 나혜석보다 겨우 1살 많았던 여자도 있었다. 오빠 나경석이 여자를 설득해 따로 살림을 차려 내보냈을 정도라고 한다. 나혜석의 엄마 최시의는 기생이었던 나기정의 첩이 남편 나기정의 총애만 믿고 갑질하는 거까지 참아내었다. 나기정이 첩과의 사이에서 낳은 나혜석보다 13살 많은 딸 계석(호적에는 올라 있지 않았다고 한다.)은 나혜석이 태어날 즈음 13살의 나이로 조혼을 했다. 그런 시대 분위기, 집안 분위기를 보고 자란 나혜석은 가부장제하에서의 여성의 삶에 눈을 뜬 데다가 일본에서 읽은 여성잡지를 통해 여성 계몽에 관심을 갖게 되어 그림을 그리는 틈틈이 남성중심사회 분위기 비판과 여권 신장에 관한 주장이 담긴 글을 발표했다.
둘째 오빠인 나경석이 나혜석의 인생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들을 주도했고 책을 읽다 보니 나혜석은 그 중요한 결정들을 오빠의 뜻에 따랐다. 일본 유학 자체가 오빠의 후원과 보호 속에 이루어졌다. 일본 유학생 학우회에서 발행하는 학회지 '학지광'에 나혜석이 쓴 글을 실을 때도 오빠의 후원이 있었다. '학지광'은 오빠의 친구들이 편집인, 인쇄인으로 있었던 터라 오빠의 영향력이 작용했던 걸로 보는 거 같다. 여자 유학생들은 학우회 회원이 아니었기에 글을 실을 수 없었지만 사적인 인간관계를 통해 글을 실을 수 있었는데, 여자 유학생의 글이 실린 게 다섯 편이었고 그 중에 세 편이 나혜석의 글이란다. 물론, 여자 유학생들도 '여자계'라는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잡지 혹은 학회지를 만들었고 나혜석도 거기에 글을 실었다.
나혜석은 일본의 '사립여자미술학교'에 다니면서 오빠 나경석의 친구인 게이오대학에 다니는 최승구와 사귀게 된다. 나혜석의 최초의 글인 <이상적 부인>이 실렸을 때 최승구는 '학지광'의 인쇄인이었다. 최승구는 폐결핵으로 25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최승구가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흥 군수이던 둘째형의 집에서 요양을 할 때 최승구의 가족들이 나혜석에게 다녀가라는 연락을 취했고, 일본인 복장으로 귀국해 최승구를 방문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다음 날 최승구가 사망하자 나혜석은 한때 발광상태에 이를 정도였다. 나혜석이 안정을 찾고 일본에서 보호자로서 나혜석의 사생활을 관리했던 오빠의 주선으로 '김우영'과 약혼을 하지만, 나혜석은 사랑과 예술을 논할 수 있는 동반자 춘원 이광수와 가까워졌다. 하지만, 오빠의 반대로 이광수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김우영은 이전부터 나혜석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친구 나경석의 주선으로 기회를 잡았다.
나혜석은 이광수와 김우영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가 예술을 논할 수 있는 이광수에게 마음이 기울었지만 문벌도 없고 병까지 있는 그와 일생을 함께할 용기는 없어서 오빠의 개입과 의학도인 허영숙(오빠 나경석이 나혜석의 친구인 허영숙에게도 일본 유학을 권유했다.)이 이광수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걸 알고 이광수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김우영은 한 번 결혼했지만 조혼한 아내와 사별한 상태였고, 예술을 살리고 생활의 안전과 보장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 작용해 나경석의 응원을 받았다.
나혜석이 처음에 좋아했던 최승구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 김우영도 그랬고, 이광수도 그랬고,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도 그랬다. 일본 유학생은 고향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조혼한 아내와의 이혼이었다고 한다. 반면, 신여성들이 만나는 결혼하고 싶은 남자는 예외 없이 이미 결혼하여 아내가 있는 처지였고, 총각 유학생이 없을 정도였단다. 최승구는 보성중학교 졸업 후 집안의 강요로 충주 색시와 결혼한 몸이었다. 식만 올렸을 뿐 몇 해를 신부의 방에 들어가본 일이 없단다. 신부집에서 이 사실 때문에 신부의 오빠가 신부를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는데 최승구의 숙부(최승구의 부모는 최승구가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가 이혼은 절대 못한다고 반대를 했고, 나혜석을 두고도 첩으로 들이는 것은 몰라도 충주 색시와 이혼은 절대 안 된다고 했을 정도였다.
나경석이 친구였음에도 이광수와의 관계를 반대한 건 이광수가 기혼남이라는 사실보다 문벌도 없고 재산도 없는 고아라는 사실 때문에 반대를 했을 것이란다. 동생 나혜석이 재주를 꽃피우며 살기를 원했던 오빠는 이광수가 나혜석의 예술적 자질을 살려줄 수 있는 매부감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이광수가 기혼남이라 안 된다고 반대를 했고 김우영을 밀었다. 최승구는 같은 기혼남 처지였음에도 생활에 압박을 받지 않고 예술적 자질을 꽃피우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최승구와의 관계를 장려했었지만, 이광수는 기혼남이어서 안 된다고 퇴짜를 놓았는데, 나혜석은 오빠의 이중잣대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1916년 나혜석은 최승구와 사별했고, 김우영은 아내와 사별했다. 나혜석은 김우영이 마음에 차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 제약과 계산 때문에 김우영을 결정적으로 내치지는 못하고 질질 끌고 있는 상태였다. 어머니마저 1919년 세상을 떠나자 보호자 없이 혼자 남겨진 나혜석은 오빠를 비롯한 주위의 권유와 압박에 못이겨,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걸고 1920년 김우영과 결혼을 감행한다.
1.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주시오.
2.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3.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주시오.
당시는 첩을 두는 게 불법도 아니고 오히려 재력의 척도가 되기도 했던 시절이었는데, 첩을 두지 말고 자신만을 사랑해달라는 주문에다 작품 제작 활동 보장과 시집살이의 거부까지 선언을 했으니 이 모두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 세 가지 조건은 당시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김우영을 말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김우영은 주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나혜석은 이 조건에 더해서 신혼여행도 전라남도 고흥군에 있는 최승구의 무덤으로 이끌었고 김우영은 나혜석의 뜻을 받들어 최승구의 무덤에 비석까지 세워주었다.
인터넷상에는 나혜석이 김우영에게 4가지 조건을 제시했다는 글이 많은데, 내가 읽은 책들은 네 번째 조건인 최승구의 무덤에 비석을 세워달라는 말이 빠진 세 개의 사항만 쓰여 있다. <첫사랑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가다>라는 책에서는 나혜석이 신혼여행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했고, 김우영은 나혜석의 뜻에 따라 전라도로 가던 중 최승구의 무덤으로 가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고, 비석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얘기하고 있는데, 이 책은 나혜석이 최승구한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여 있는 책이라 이게 작가의 주관인지 실제 확인한 객관적 사실인지 헷갈린다. 책을 읽으면서 보니 나혜석의 생각인지 저자의 생각인지 헷갈리는 부분이 꽤 있었고, 이 내용 역시 작가가 '그랬을 것이다'라는 추측을 쓴 건지 진짜 그랬다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던 건 다른 책에서도 확인이 되는 부분이다. <인간으로 살고 싶다>에는 '신혼여행 대신 최승구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온 것'이라는 표현도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나혜석이 3·1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을 때 변호사 김우영이 변론을 해줬다는 글도 있는데, 김우영이 나혜석을 변론하러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나혜석은 이미 풀려나 있을 때였다. 김우영이 변호를 해줬고 그 고마움에 김우영과 결혼했다는 글까지 봤다.
나혜석은 조선에 살면서 어차피 결혼은 피하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최승구는 세상을 떠났고 최승구에 버금가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남겨진 가족들과 주변의 압박에 못이겨 자신의 예술 활동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조건이 맞았던 김우영과 결혼을 추진한 거고, 김우영은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던 여자를 자기 옆에 두고 싶었던 욕심의 발로에서 둘의 결혼 조건이 맞아떨어졌던 거다. 그러니 나혜석은 매달리는 김우영한테 최승구의 무덤에 비석을 세워달라는 조건을 제시할 수 있던 거고, 김우영은 나혜석이 자신의 여자만 된다면이야 이런 생각으로 자신에게는 유학생 친구였던 최승구의 무덤에 비석을 세워주는 일까지도 감수했던 거다. 나혜석이 얼마나 언론의 주목을 받았냐면 김우영과 구미 유람 중 복장을 양장으로 하기 위한 준비로 머리를 단발로 잘랐던 거까지 기사화될 정도였다.
결혼한 다음 해 4월 첫째 아이 '나열'을 낳고, 9월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단둥(만주 안동현)으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주했고, 1927년 봄 남편의 만주 근무를 마치고 부산 동래로 돌아와 아이 셋을 시댁에 맡겨놓고 일본 외무성에서 벽지 근무자에게 주는 혜택으로 출장을 가장한 구미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부부동반 구미 유람을 떠난다. 남편 김우영이 파리에서 독일로 떠나 법을 공부하는 동안 나혜석은 파리에 남아서 그림 공부를 하는 도중 독립운동가 33인 중 한 명이었던 최린과 소위 말하는 바람을 피우게 된다. 나혜석은 남편 김우영이 성실한 모범남편이고 자신의 그림을 응원하긴 하지만(김우영은 전시회에 출품해 상을 받고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걸 좋아했다. 나혜석이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살짝 재촉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별다른 취미도 없고 예술에 대한 대화도 나눌 수 없는 점을 아쉬워하던 차에 박식함에 다양한 취미까지 겸비한 최린과는 서로 공명되는 부분이 많아 친해지게 된다.
(글이 길어서 여기서 자릅니다. 지난번처럼, 이어지는 글은 14시로 예약해 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