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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 Aug 17. 2018

사물의 시선

사물을 통해 사람을 봅니다.

[사물의 시선] 네 번째 인터뷰이

나_초보 혼술러



혼술하는 시간을 이렇게나 사랑하게 될 줄 몰랐다. 알코올 한방울만 들어가도 온 몸에 세포들이 무섭게 봉기했던,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할 뻔 했던 지난날을 딛고 이렇게 진화할 줄이야. 마치 어떤 촉촉한 생각거리를 두눈에 품은 채, 차분하고 고독스런 분위기에 작은 바에 앉아 조용히 한잔을 들이키는 지적인 분위기의 여성의 느낌이 나에게도 나타나기를 희망하며 혼술에 빠져버린 오늘 날의 나.


아가시절(?)엔 칵테일로 접근했다. 피나콜라다, 모히또, 핸드릭스. 어느순간에 한잔이 두잔되고, 두잔이 세잔이 되니 이건 그냥 비싼 음료수에 불과하다, 이정도 금액이면 훅-빠져드는 무언가를 마시고 딥슬립 해버리는 것이 낫겠다 싶어 위스키의 세계에 빠지기 시작했다. 조니워커, 맥켈란, 글렌모렌지, 발베니...나의 종착역은 발베니로 정해졌다.  



분위기 있고 힙하다는 청담동에 어느 바에 가면, 한껏 멋을 부린 여자애들은 달달구리한 칵테일을 시키고는 한나절이 가도록 나긋나긋이 웃어보이며 여러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는데, 어제의 나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느순간부터 왜인지 모르게 그런게 꼴배기 싫어졌다. 츄리닝에 후드티. 주머니에 카드 하나와 핸드폰만 들고 화려한 사람들 사이에 자리잡고 앉아 스트레이트로 들입다 붓는다. 2-3잔 정도 연거푸 들이키면 힘들고 괴로운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행복한 기분이 벅차 오르면서 잠이 엄청나게 쏟아진다. 그렇게 짧고 굵게(?)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깊게 잠든다. 아침이 오면 몽롱한 기운에 샤워를 하고 두 눈을 부릅뜨고 출근할 준비를 한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또다시 혼술 생각에 마음이 들떠오른다. 뫼비우스의 띠.


사실 ‘나’라는 사람은 언제나 신나있었고, 신난 나의 모습에 더욱이 부흥하고자 꾸준히 노력해왔기에 기본기와 노력이 일궈낸 프로 신남러라고 해도 전혀 더하거나 덜어낸 표현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의 긍정 아우라 또는 화수분을, 용케도 잘 뽑아 먹는 음울한 블랙홀들이 내 안에 생겨나는 것 같았고, 그것들의 증폭을 적응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디폴트값인 줄 알았던 프로 신남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었고, 그저 갑옷처럼 나를 지켜주는 수단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녹슨 갑옷을 조여왔던 나사들이 느슨해지니 장마 한가운데, 창문 밖을 가만히 바라보는 또다른 내가 그 안에 있더라.



감정이 이렇게 상반될 수 있는 건가 문득 겁이 났다. 일하던 곳에서 나름 정신 쪽으로 유명하다는 교수님께 간단히 나의 상황을 이야기 했다. 교수님 왈, “세상 복잡한게 사람 마음이란다, 우리 사회는 이분법적인 사고관에 익숙해져버렸기 때문에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무의식적으로 그것들을 강요할 필요가 없단다.” 오. 다행, 다행이다. 세상에서 가장 신난 외면의 모습과 무섭도록 차분한 내면이 공존하는 나란 인간은 매우 입체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 역시나, 멋진 사람이었구만. 다행이니까 이런날 또 한잔 해야지.


내가 세상 멋진 사람이라는 걸 아는 이는 역시나 나 밖에 없고, 그러기에 그 고독감을 달래줄 사람도 나 뿐이므로 이것은 서두에 열거했던, 차분하고 고독스런 분위기의 작은 바에 어울릴만한 감성이니까 고독은 한남동에 살포시 두고 와야된다며 간판 없는 스몰 바에 가기로 한다. 역시나 발베니 한잔, 그러다 또 발베니 한잔. 깔끔하게 마시고는 바텐더와 의미없는 수다를 떨다가 다시 집으로. 신나버린 마음을 감출 길이 없어, 아무 멜로디를 진심을 다해 흥얼거리다가, 지난 일기장을 꺼내 읽다가, 받았던 편지들을 한참 정리하다가 알아서 조용하게 깊은 잠에 빠진다. 그리고 다시 아침, 회사로 버프. 그리고 또다시 술잔 앞으로 버프. 고독을 들고 갔다가, 웃음을 들고 나오는 술잔 앞으로. 고독한 버프 인생. 발베니 만세. 괜찮아. 인생 다 그래.





사물의 시선 네 번째 인터뷰이 : 나

조각글을 쓰는 것과 낙서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머슴살이를 하더라도 대감집에서. 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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