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밤의 꿈 시작
몬트리올에 도착한 지 어느덧 일주일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어떻게 일주일을 보냈나 되돌아보면 눈앞이 번쩍번쩍하는 경험들이 가득해서 주의가 산만했던 것 같기도 하고, 차분하게 내 주변을 둘러본 것 같기도 한 느낌이다. 우선 모든 걸 캐나다에 도착해서로 미뤄둔 과거의 나에게 박수를 보내야 할 것 같다. 평생 동안 미래를 걱정하며 사소한 것까지 모두 계획하던 나에게 계획이 없어도 어떻게든 살게 되는 현실을 제대로 체감하게 해 줬다. 이게 되네? 싶은 순간들이 지난 일주일 동안 참 많았다.
입국일 밤, 여차저차 숙소까지 거대한 이민 가방 2개를 룸메이트의 도움을 받아 겨우 옮겼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안 구석구석을 소개받고 내 방에 겨우 짐을 놓았다. 몬트리올은 지금 서머타임이라 밤 9시가 넘었는데도 밖이 밝았다. 방에 들어와 잠시 쉬다가 목욕용품과 잠옷만 겨우 찾아내 씻자 12시를 조금 넘겼다. 고된 입국절차를 마치고 따뜻한 물로 씻고 나니 어찌나 잠이 잘 오던지. 그렇게 첫날부터 나는 시차적응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다음날 아침, 당장 동네구경이 하고 싶어 꽃단장을 하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어젯밤 우버를 타고 오는 길에 봤던 동네도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걸어 다니며 보는 거리가 참 예뻤다. 특히 몬트리올은 벽화 예술이 유명해서 길을 걷다 보면 각양각색의 벽화들을 마주친다. 덕분에 mural art라는 단어를 이곳에 와서 알게 됐다. 게다가 얼마 후 우연히 범블에서 mural artist 친구도 사귀었다. 이 얘긴 나중에 이어서 해야지.
어찌 되었든 첫 외출은 매우 즐거웠다. 집 근처 단골 카페에 대한 로망이 있었은데 집 바로 근처의 커피숍들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10분 거리에 있는 카페를 발견했는데 조금 걷긴 하지만 가게도 예쁘고 커피맛도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그리고 Can you speak English?라고 묻자 Sure.라고 답해준 친절한 바리스타분이 있는 곳이었다. 사실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생각해 보니 내가 주문할 때 영어를 해봤자 얼마나 어려운 말을 하겠다고 영어 할 줄 아냐고 물어봤을까 싶은 마음이 들어 조금 머쓱했다. 그렇지만 몬트리올은 프랑스어권이다 보니 English please라고 해야 하는 상황이 꽤 많다.
어쨌든 이 카페에서 일주일 동안 비염으로 고생하는 목을 달래기 위해 마셨던 유기농 호지차라떼가 최애메뉴가 됐다. 호지차는 여기에서 처음 마셔봤는데 카페인 함량도 낮고 고소한 향이 꽤 좋았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도 아쉽고, 슬슬 점심시간이 다가와서 근처에 베이커리를 찾아봤다. 빵이나 사서 근처 공원에 가볼 생각이었다. 카페 가까운 곳에 리뷰가 많은 곳이 있어 가게문을 여니 이국적인 향신료 향이 훅 끼쳤다. 프랑스식 빵집은 아닌 거 같고, 중동 쪽 느낌이 났다. 거기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또띠아를 닮은 라마준이라는 빵과 점원이 추천해 주는 빵 4개를 몽땅 포장했다. 이게 바로 다양성의 나라인가?! 싶어 나름 설레는 마음도 있었다.
일단 너무 배가 고파서 아까 산 라마준 빵을 벤치에 앉아서 먹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맛이었다. 라마준은 또띠아같이 얇은 반죽을 구워만든 빵에 각종 향신료로 만든 소스와 다진 고기볶음을 펴 바른 크레페처럼 생긴 빵이다. 식사 대용으로 괜찮은 요깃거리였다.
라마준을 먹고 나니 좀 기운이 돌아서 가까운 공원을 찾기 시작했다. 근데 20분 거리에 엄청나게 큰 공원이 있어 호기심이 생겼다. 빵봉지를 품에 안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착한 Jarry parc. 들어가는 길부터 동화 속 숲 속길 같아 정말 아름다웠다.
토요일 점심이라 그런지 피크닉 하는 사람들, 러닝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게다가 온갖 종류의 새들과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다람쥐들이 경계 심 없이 공원을 돌아다녔다. 나는 적당한 벤치에 앉아서 풍경과 사람들을 구경하며 빵을 하나씩 먹었다. 벌써부터 자리공원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다음에 올 땐 꼭 돗자리를 들고 와야지.
두 번째 날은 일요일이었다. 이상하게 아침에 일어날 때 기침이 더 심해졌고 밤새 기침을 했는지 배와 갈비 쪽에 근육통까지 생겼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은 들었지만 오늘 정말 몸을 철저하게 챙겨서 얼른 나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하루 종일 30도가 넘어가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스팀과 물을 마시고, 목에는 스카프, 얼굴엔 마스크 그리고 말은 최대한 안 했다. 한국에서 미리 타온 비염약이 있어 매 끼니마다 챙겨 먹었다. 오전에 호지차 라테를 한잔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니 금방 피곤해져서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또 기침이 심하게 났다.
다시 거실로 나와 따뜻한 물을 마시고, 얼마 없는 재료로 부드러운 음식을 만들어 식사를 챙겼다. 열이 나거나 다른 증상이 있는 건 아니라 혼몽하거나 그러진 않았는데, 기침 가래가 너무 심하니 그게 참 힘들었다. 그래도 점심까지 챙겨 먹으니 기침도 많이 줄고 내일이면 많이 좋아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또 시작된 기침을 뜨거운 물을 마시며 누르고 노트북으로 은행 예약과 온라인 쇼핑을 했다. 얼른 내 방에 침대랑 가구를 채워 넣어야 내 생활도 안정될 것 같았다. 그런데 한국에서 가져온 마스터카드로 결제가 안돼서 결국 장바구니에 담아두기만 하고 내일 은행 계좌를 만들 때까지 구매는 보류하기로 했다.
그리거 오후가 되니 다시 피곤해져서 방에 들어가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아무래도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기침하다가 잠에서 깼고 화장실로 달려가 코를 풀고 기침 때문에 목이 부었는지 숨이 쉬어지지 않아 어떻게든 숨을 쉬려고 노력했다. 뭔가 이상했다. 이 정도면 알러지 반응인데, 내가 한 건 방에서 낮잠을 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면 방이 문제인가? 룸메이트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내가 입주하기 하루 이틀 전에 천장공사를 끝냈다고 했다. 그 이후로 깨끗하게 청소해서 이상이 없을 줄 알았는데 나에게는 하필 분진이나 먼지 알러지가 있어서 방에서 잘 때마다 기침이 심해졌던 거였다. 결국 그때부터 방에 창문을 열고 실링팬을 작동시켜 환기를 하고 임시침대를 거실로 빼서 거실에서 자기 시작했다. (10일째인 지금, 나는 아직도 거실에서 생활 중이다 ㅋㅋ)
거실에서 자고 일어난 아침, 기침이 많이 줄었다. 그러나 어김없이 화장실에 가서 가래를 뱉고 코를 풀고 입안을 헹궜다. 세면대에 뱉은 가래 색이 갈색빛과 분홍빛이 돌아 걱정되어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심한 기침으로 인한 출혈과 염증성 가래로 의심됐다. 역시 비염이 심해졌구나. 그래도 어제 방에서 잘 때보단 기침이 훨씬 약해진 기분이었다. 어제 특히 기침을 너무 심하게 했더니 오늘 아침부터는 목이 쉬고 목구멍이 쓰라리기 시작했다. 말을 더 줄여야 했다.
그러나 오늘은 월요일. 모든 기관들이 문을 여는 시간이다. 어제 그렇게 기침을 하는 와중에도 예약한 은행을 가려고 준비하는데 룸메이트에게서 SIN을 먼저 발행받아야 계좌개설이 된다는 사실을 듣고 은행 예약을 취소하려고 했다. 당일 노쇼가 될 순 없으니 홈페이지에 가봤으나, 예약을 취소하려면 예약확인 메일에 있는 레퍼런스 코드를 입력하라고 한다. 근데 나는 예약을 완료하고 받은 메일이 없었다. 결국 예약 지점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자동 ARS로 연결되고 상담원 연결이 되지 않아 결국 포기했다. 노쇼만큼은 하고 싶지 않아 다시 인터넷에서 방법을 찾다가 고객센터 이메일을 발견했다. 챗지피티의 도움을 받아 정중하게 오늘 오후 예약을 취소하는 메일을 보냈다. 제 시간 안에 확인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SIN 발급 예약을 마치고 나니 졸지에 오늘 일정이 붕 떠버렸다. 기침의 원인이 집 안 공기였으니 가능하면 밖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엊그제 갔던 자리 공원에 다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핸드폰과 공책, 돗자리 등을 챙겨 외출했다. 오늘은 월요일이니 사람들도 많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는 길에 단골 카페에 들러 호지차라떼를 테이크아웃했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월요일이라 사람도 적어서 마치 그림 속 공원에서 나 혼자 피크닉 하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주는 먹이에 익숙해진 다람쥐와 새들이 주변에 자꾸 모여드는 것도 동화 속 백설공주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해 줬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일기를 쓰고 비디오를 찍다가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졌다. 한국의 공중화장실을 생각했던 나는 캐나다에서 공중 화장실 찾기가 하늘에 별따기와 같은 난이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까운 곳에 스타디움 건물이 있길래 그곳으로 향했는데 출입구에 떡하니 스타디움 이용객을 위한 화장실이라며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다른 화장실을 찾다가 20분 거리에 공원 공중화장실이 있다고 해서 땀을 흘리며 찾아갔더니 웬 펜스가 둘러쳐져서 입장이 불가능했다. 바로 코앞에서 화장실을 들어가지 못하게 되니 미칠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거의 30분을 참게 된 방광이 탈출 신호를 보냈다. 급해진 내 눈에 공원을 돌아다니면서 간간이 보이던 파란 간이부스가 눈에 띄었다. 왠지 저게 간이 화장실인 것 같은데 정말 정말 이용하기 싫은 생김새였다. 그렇지만 내 방광은 열심히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었고 나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공원 나들이는 최악의 경험으로 마무리되었다. 당분간 공원에서 물을 마시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캐나다에서 공중화장실을 찾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나는 오늘 이렇게 새로운 차이점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