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葛藤)
갈 등 (葛藤)
매 원. 신 화 자
산비탈 좁은 길을 내려오는데 어디선가 향긋한 여인의 냄새가 진하게 후각을 자극한다. 도대체 무슨 냄새일까? 이렇게 호젓한 산길에서 누구를 유혹하는 젊은 여인의 체취인가? 두리번거리니 귀륭나무 가지를 감고 올라 간 칡덩굴에서 칡꽃이 보랏빛 얼굴을 내밀고 있다. “나 여기 있어요.” 하면서 반색을 한다. 칡은 콩과 식물이므로 칡꽃은 당연히 콩꽃을 닮았다. 보라색 칡꽃은 성숙한 여인의 유혹처럼 강렬한 향기로 지나가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8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하는 칡꽃은 위로 올라가면서 차례로 꽃을 피워 한 달 이상이나 짙은 꽃향기로 벌들을 불러 모은다.
칡은 뿌리에 녹말을 저장해서 칡뿌리를 두들겨 빨아내면 질이 좋은 녹말가루를 얻을 수 있기에 칡뿌리는 구황 식물이었다. 요즈음에도 칡 녹말로 만든 떡과 부침은 귀한 별식이다. 칡즙은 약으로 쓰기도 하고 말린 칡꽃을 달여서 차를 만들어 마시기도 한다. 알코올을 해독하는 작용을 해서 술을 마신 뒤에 칡즙이나 칡차를 마시기도 한다. 나일론이나 화학섬유가 없었던 옛날에는 질기고 강한 칡의 줄기는 질긴 끈으로 쓸모가 있었다. 밭가에 칡은 일찌감치 제거하지 않으면 질기고 강한 생명력으로 나무를 감아 오르고 밭으로 기어들어 와서 한 여름 잠깐 사이에 칡덩굴이 온 밭을 점령해 버리게 된다. 칡은 줄기를 벋어 기어 가다가 감아 올라갈 수 있는 나무를 찾아서 높은 곳으로 감아 올라가고 햇볕을 향해서 넓은 잎을 펼치고 뿌리에다 녹말을 저장한다. 줄기는 포복자세로 땅을 기어 가다가 영양분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뿌리를 박는다. 깊이 내려가 자리를 잡으면 잘 뽑히지도 않는다. 감당하기가 어려울 지경이 된다. 질기고 강한 힘을 자랑하는 칡은 그 힘 만큼이나 삶의 집념이 강하다. 씨앗을 바람에 날려 멀리 보내고 줄기는 식물을 감아 올라간다. 또 땅으로 기어가다가 중간 중간 거점을 확보해서 뿌리를 내리는 칡이야말로 다양한 전법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무서운 놈들이라고 하겠다.
갈등이란 무엇인가. 칡과 등나무가 서로 뒤 엉켜서 만드는 다툼인 것이다. 서로 닮은 구석이 있는가 하면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면서 서로 어긋나는 시각 때문에 사정이 뒤얽히고 화합하지 못하는 것이 갈등이다. 칡과 등나무는 같은 콩과 식물이면서 줄기가 서로 감아 올라가되 방향이 다르다. 칡은 시계방향으로 감아 올라가고 등나무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감아 올라가니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갈등이 되는 것이다. 보는 견해가 다르고 시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가까운 사이일수록 부딪치고 뒤얽혀 다툼이 커지는 것이다. 오히려 거리를 두고 사이가 떨어져있으면 스트레스는 줄어들 것이다. 아이들 끼리 다투어 싸움을 벌이면 어른들은 곧잘 타이르기를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 라고 싸움을 말리곤 했다. "지는 게 어째서 이기는 거야?" 강한 반발과 함께 억울함을 속으로 삭여야 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지는 척 이기는 방법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여유가 생겨야 하는 것이다. 한 두어 발짝 뒤로 물러나서야 보이는 방법인 것이다. 술수가 높아서 길을 닦아야 보이는 것을 어찌 쉽게 알 수 있겠는가.
고부간의 갈등이나 부부간의 갈등이 깊어지면 어느 쪽이거나 마음의 병이 된다. 노사 간의 갈등, 종교 간의 갈등, 단체나 모임에서 주류와 비주류의 갈등, 숱한 갈등의 문제들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는 척 이기는 것으로 묘수풀이를 하면 될 것을... 그러나 지는 척 이기는 묘수란 게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려운 것을 나는 안다. 우리 부부는 소일 삼아 농사일을 하면서 함께 밭일을 나가면 필경은 의견 차이로 주장이 달라서 싸움이 되곤 했다.
어느 해 참깨농사를 지으면서 벌어진 일이다. 가을이 되어 참깨를 베어 깻단을 세워놓았는데 비를 맞았다. 며칠 마르는 가 했더니 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깨를 털러 밭으로 갔다. 남편은 그냥 털어야 한다는 것이고, 나는 세워 놓은 묶음을 풀어 헤치고 펼쳐 널어서 젖은 속을 말리면서 털어야 한다고 우겼다. 우리는 서로의 주장이 팽팽해서 자기의 방법이 최선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내가 깻단을 풀어 헤치자 남편은 화를 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세워 놓은 깻단 주절은 엄청나게 많아서 하루 종일 혼자 깻단을 풀어 헤치고 말려가며 화풀이를 하듯 두들겨 댔다.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심사를 화풀이 하듯 깻단을 두들겨 패는 동안 저녁때가 되었다. 날이 어두워지려고 하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나마 다행인 것은 일이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고 빗방울은 굵어지기 시작했다. 깻 짚 사이에 함께 섞여 수북한 알곡들이 비를 맞아 젖고 있었다. 비에 젖고 있는 참깨를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끝까지 열은 차오르고 이 생각 저 생각 화풀이 할 궁리도 겸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그제야 어슬렁거리고 나타나는 남편을 보니 화를 낼 수도 없다. 고마운 건 더 더욱 아니다.
그날 일은 온 종일 깨가 쏟아지기는 했으나 깨가 쏟아지는 재미는 커녕 깨 그릇을 엎을 뻔 했다. 지는 척 이기는 묘수가 있는 것을 번번이 성질 급한 것만 앞세워 낭패를 보는 것이다. 주도권을 잡고 싶은 황소의 기질을 무시한 게 화근이라고 슬그머니 지는 척 이기는 묘수를 쓰지 않은 어리석음을 나중에야 깨닫는다.
“그래, 머슴은 고집 센 황소와 같아서 앞에서 끌면 안 된다. 잘 한다고, 잘 한다고 뒤에서 칭찬이나 하면 저절로 힘자랑하는 것을.
그 날 이후로 나는 더 많이 머슴을 존중하고 배려하기로 했다. 욕심을 많이 버렸고 고집 센 머슴님의 일거리는 더 많아졌다. 비에 젖으면 땅에게로, 새가 먹어도 자연의 뜻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너그럽고 편하다.
때로는 내 안에서도 갈등은 벌어지고 있다. 왼쪽으로 갈까 오른쪽으로 갈까. 네 라고 해야 하나 아니오 라고 해야 하나.
이리 저리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내 마음 안에도 갈등은 있다.
칡과 등나무의 다툼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그들이 시계방향과 반대방향으로 감아 올라가는 고집은 아무도 말릴 수 없을 것이다. 최선의 방법은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