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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화자 Sep 16. 2021

글 쓰는 할머니의 이야기 46

목화꽃을 보면서

목화꽃을 보면서


매원.신화자



  우리들이 어렸을 때, 그 시절의 겨울은 지금보다 훨씬 더 추웠던 것 같다. 개울에는 얼음이 겨우내 두껍게 얼어붙어 있고 찬바람은 코를 베어갈 것처럼 휘몰아쳤다. 고드름은 처마 밑에서 녹아내릴 줄 몰랐다. 추운 겨울날이면 나는 할머니와 실랑이를 벌였다. 할머니는 솜바지를 입어야 한다고 하셨고, 예닐곱 살쯤 된 손녀는 안 입겠다고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였다. 목화솜을 넣어서 만든 아이들의 ‘풍채 바지’는 양쪽 어깨에다 조끼처럼 어깨끈을 걸쳐서 입는 위아래가 붙은 합체형 속바지다. 서 있으면 자동으로 뒤가 여미어지고 앉으면 뒤가 열려서 용변을 볼 수 있도록 만든 자동 개폐식이다. 보온용 솜바지는 목화솜을 넣어서 따뜻하지만 무거웠다. 분홍색 물을 들인 무명 솜바지는 부피가 크고 몸을 움직이기도 거북할 만큼 불편했다.  치마 속에 솜바지라니 얼마나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차림새인가. 입어야 춥지 않다고 하시는 할머니와 실랑이를 벌였던 기억은 지나간 옛날 추억이다. 

  화학섬유라고는 구경할 수도 없었던 옛날이야기다. 목화를 심어서 솜을 만들어 옷감을 만들고 침구를 만들어 몸을 따뜻하게 하던 그 시절의 섬유는 비단과 베와 무명이었다. 문익점이 중국에서 목화를 들여오기 전에는 삼 껍질을 벗겨서 실을 만들고 옷감을 짜서 베옷을 입었으리라. 완전 가내 수제품이던 베와 무명과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살던 옛날의 겨울은 얼마나 추웠을까. 무명과 베는 여름 한 철은 시원했으나 겨울에는 보온이 되지 않으므로 추위를 막기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목화솜은 무명과 솜옷과 솜이불로 보온재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비단은 빛이 곱고 가볍고 따뜻한 옷감이지만 상류층의 사람들이 나들이옷으로나 입을 수 있는 고급 옷감이다. 염색이 아름답고 가볍고 따뜻한 천연섬유인 이것-실크의 단점은 물이 닿으면 얼룩이 생기고 잘 치여서 섬유가 잘 상하고 값이 비싼 것이 흠이다. 무명은 따뜻하고 실용적인 옷감이다. 솜과 무명은 목화 꽃의 열매 씨앗을 감싸고 있는 하얀 섬유들이다. 무명에서 광목, 옥양목, 포플린, 그리고 더 가느다란 실로 진화 과정을 거쳐 짜여진 면섬유들은 투박하고 소박하던 무명의 변신이다. 면섬유는 직조기술이 좋아서 60수 120수 가늘고 질긴 실로 모양도 곱고 질기고 통기성, 흡습성, 감촉이 좋은 고급 천연 옷감이다. 한 동안 신소재라고 각광을 받았던 화학섬유는 질기고 신축성이 좋고 염색이 잘 되고 다양한 쓰임새 때문에 한 때 옷감의 혁명이라고 여겼으나 단점이 많다. 불에 닿으면 녹아서 오그라들고 정전기가 생겨서 먼지를 빨아들이고 통기성이 나쁘고 비위생적이다. 언제부터인지 슬그머니 천연섬유인 면섬유가 단연 최고의 우수한 옷감이라고 목화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cotton 100%인가? 우리는 이제 옷을 사면서, 아이들의 옷과 속옷에서 반드시 라벨을 확인한다. 제품들은 60수, 6000번, 천연 원면을 사용한 고급 제품임을 강조한다. 


  봄부터 목화 몇 포기 심고 가꿨더니 꽃이 피었다.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꽃말이 일러주는 것처럼 따스하고 포근하고 순결한 꽃이다. 꽃봉오리가 열린 첫날은 뽀얀 우윳빛이다. 하룻밤 자고 나면 분홍색 꽃이 되었다가 사흘째는 살포시 분홍색 꽃잎을 접기 시작한다. 꽃은 수정이 되면 색깔을 바꾸고 분홍색이 된다. 열매가 자라서 씨앗이 여물면 씨앗을 감싼 섬유들이 껍질을 열고 하얗게 꽃으로 다시 피어난다. 잘 익은 꼬투리열매에서 하얗게 솜으로 피어나는 하얀 솜꽃들- 그래서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

솜꽃을 보면 미안해진다. 목화솜이불은 반세기가 가까워지는 옛날 그 시절 새댁의 새 살림 중에 가장 중요한 혼수품목 1호였다. 희고 폭신폭신한 새 솜으로 새 살림을 시작하고 흘러간 시간들이 얼마인가. 어느새 거의 반세기를 함께 살아오면서 가족이 늘었고 아이들은 솜이불을 덮으면서 자라서 어느새 어른이 되고 새 살림을 차렸다. 다시 오래전으로 돌아간 듯 낡은 둥지에는 두 식구만 남아서 남아도는 이불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볕이 좋은 날, 뽀송뽀송 햇볕에 습기를 거두면 묵은 솜들은 세포가 살아나듯 가벼워진다. 그래도 솜이불은 해를 거듭할수록 나이만큼 무겁기만 하다. 그동안 난방이 좋아질 때마다 몇 번에 걸쳐서 두꺼운 솜이불을 둘로 나누고, 이불 두 채를 셋으로 나눠 조금씩 얇고 가벼워졌으나 요즘 새로운 소재의 가볍고 화려한 화학섬유와 양모 이불에 밀려서 구박을 받는다. 무겁고 손질이 버겁다고 구박 감이 되고 있다. 무거운 것을 탓함은 몸이 늙어가는 탓이기도 하리라. 솜은 반세기가 지났어도 얼룩 한 점 없이 곱다. 이 구박데기들을 어찌해야 하는지 요즘 쓸쓸한 고민을 한다. 

 목화꽃은 뽀얗게 우윳빛이더니 삼사일쯤 지나서 분홍색으로 변한 꽃잎을 접는다. 씨방이 자라서 열매가 되고 열매가 자라면 두 번째 꽃이 필 것이다. 솜꽃으로 다시 피어나는 목화 꽃. 어머니의 사랑처럼 포근하고 따스한 목화, 그의 두 번째 꽃이 피는 것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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