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영화라는 걸 2년에 한 번 보기도 어려운데, 모처럼 부모님이 올라오셔서 밤에 아이를 맡겨두고 남편과 보고 왔다.
워낙 리뷰가 넘치는 시점이라 나도 보고서 뭐라도 써야만 할 거 같은데 결론부터 쓰면 나는 소설이 더 나았다.
소설을 읽지 않았던 남편은 잘 만들었다면서 좋다고 했지만 나는 무난한 가족영화가 되어버렸다고 기대만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소설을 읽을 땐 숨이 턱턱 막혀 몇 번을 쉬었다.
읽기엔 고통스러웠지만 그것이 82년생 김지영 소설의 매력이었고 지극히 평범하고 선량해 보이는 인물들의 의도 없던 악행들이 합쳐지는 것이 압권이라고 보았다.
영화에서는 등장인물 모두가 너무나 착하고 올발라서, 누군가는 많이 부드러워서 좋다고 하지만 나는 되려 어색했다. 그러나 나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대중적인 취향을 가진 남편은 아주 딱 좋다고 했다.
오히려 평가가 갈리는 공유가 연기한 정대현이라는 인물은, 나는 좀 긍정적으로 본다.
그건 바람직한 남편을 보여줘서 아니라 여전한 한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들 비현실적인 남편이라고 하지만 면면히 뜯어보면 영화 속 정대현은 말만 잘하고 정작 자기가 뭘 해야 할지 모르고 눈치 없고 수동적인 '착한데 이기적인 남편'이다.
내 남편, 보통의 남편들보다는 그래도 훌륭하지만, 그럼에도 뭔가 내 편인 듯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엔 사람 확 섭섭하게 하는, 머리 콱 쥐어박고 싶은 답답함이 느껴졌다.
공유가 그려낸 정대현은 결코 유니콘남이 아니다. 훌륭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공유가 연기한 정대현을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하는 이유가 뭘까. 외모는 차치하고서라도, 여자만 측은하게 바라봐 줘도 남자들은 이처럼 고평가를 받는다.
사람들이 잘 지적은 하지 않지만 공유가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자기가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정말 그랬다.
"이때 영화가 정대현이 무너지는 타이밍을 잡아내는 방식은 아주 절묘하다. 김지영이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 순간에 정대현이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랑 결혼해서 네가 아픈 걸까 봐”라고 웅얼거린다. 이토록 끈질긴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라니. 사과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그는, 미안함도 자신을 경유해서야 표현할 수 있다." - 손희정 문화 평론가 "79년생 정대현의 기막힌 타이밍" (경향신문)
손희정 평론가의 칼럼은 영화를 보며 '빡쳤던' 부분을 제대로 꼬집어줬다.
김지영이 아프다는데 "나랑 결혼해서 네가 아픈 걸까 봐'"라니. 나는 저 대사에서 '허!'하고 어이없는 실소를 내뱉었다. 공유가 울 땐 그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울어? 네가 뭔데 울어? 진정으로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 다.
어느 누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며 저런 말을 하는가?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는 자는 저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그걸 알 수 있었던 건 남편과 싸울 때마다 저런 방식의 말하기가 그에게 면피가 되고 있다는 걸 아주 자주 겪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는 말했었다.
"그래서 뭘 할 건데?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을 해!"
그런데 김지영은 개빡쳐서 화낼 타이밍에 전대현의 손을 살포시 잡아준다. 영화에서 김지영은 아픈 몸을 하고도 여전히 정대현을 위로해주는 위치에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에서 김지영이 차라리 화를 냈다면, 정대현이 김지영을 팔짱 끼고 벽에 기대어서 안타까운 눈빛으로 지켜만 보지 않고 단 한 번이라도 김지영을 위해 아침을 차리는 게 나왔다면. 그러나 그런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남성 입장에 대한 과도한 이해심과 연민, 기어이 그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줘야만 하는 것은 내가 글을 쓰면서도 자주 겪는 일이다. 사람들은 남자 입장이 안 들어간 글을 견디지 못한다.
여성들은 언제나 남성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기를 기대받는다. 스스로 화자가 되는 순간조차.
소설이 좋았던 건 남편이 철저히 대상화되어 그려져서였다. 그의 입장을 애써 헤아리고 서술하지 않아서였다. 이런 방식의 서술은 한국 문학이며 영화에서도 거의 없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점이 소설 김지영이 어떤 성별에게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편향되게 느껴진 이유였고, 그것이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가치 중 하나였다. 언제나 주인공이었던 남성을 철저히 주변부로, 그리고 타자로 그려낸 것.
그런데 영화에서는 형평성을 고려해서 이런 설정들을 넣었다. 영화의 정대현은 현실의 남편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배려와 공감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여전히 그는 팔짱 끼고 김지영을 지켜만 본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삑사리가 난다.
이만한 남자도 없다고 하지만 딱 저 정도인 것이다.
이건 제작진의 의도일까. 아니면 제작진 스스로가 드러낸 한계일까.
그래서 희망적인 결론이 더 나아간 걸 보여주기보다는 지나치게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우리들의 지향점을 그려내 보았지만, 그럼에도 답답했다.
이 영화를 공격하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내 취향에서 보기엔 너무나 건전하다. 이 영화가 불편한 사람들은 어린이 동화책만 읽어야 한다.
그런데 이 정도만 보여줘도 그동안 보이지 않고 보려 하지 않았던 평범한 여자, 주부, 엄마의 삶에 사람들이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보는 사람들은 알 거다. 현실은 김지영 영화보다 열 배쯤 전쟁이라는 걸.
현실을 보여주면 그건 호러영화가 될까.
영화를 보면서 다들 그랬겠지만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고 매일 생각했던 예전이 떠올랐다. 영화 리뷰를 읽을 때마다 눈물이 줄줄 났는데(사실 정작 영화 보면서는 다소 지루했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내가 가엽고 불쌍하다. 그렇게 책으로 340페이지나 썼지만 (fea.t 엄마 되기의 민낯) 그렇다고 기억이 각색되지는 않는다.
출구가 없다는 김지영 말처럼 나에게도 출구가 없었다. 심지어 나에게는 공감해주는 남편도 나에게 뭐든 다하라고 하는 가족도 없었다.
남편이 일찍 오거나 휴직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내가 울부짖으면 남편. 가족. 가끔 친구들조차도 돈 버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는 말부터 했다. 네가 버텨야 한다고만 했다.
그때 나는 그 말에 깊은 상처를 받았고 지금도 속이 부글거리고 울컥한다. 나는 정말 출구가 없었다. 내가 내 손으로 박박 긁어가며 파내야 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혼자 싸워나갔다. 김지영처럼 정신이 분열되는 대신에 내 주변 사람을 적으로 두고 벼랑 끝으로 멱살 잡고 끌고 갔다. 나의 남편은 자발적인 육아 휴직이 아닌, 그 벼랑 끝에서,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다.
영화 보고 걸어오면서 남편에게 장난치며 말했다. 내가 빙의를 한다면 했을 말이다.
"이 서방. 내 딸은 자네보다 공부도 잘했고 좋은 회사 다녔네. 자네만 돈 벌 수 있는 거 아니야. 내 딸 무시하지 마! 지금 돈 버는 유세 하나? "
물론 우리 엄마는 나에게 이런 말 안 했다. 이서방 힘드니까 아침 차려주라는 말이 어찌나 섭섭하던지. 엄마는 나를 끔찍하게 사랑하시고 챙겨주시지만 사위가 대접 못 받을까 봐 걱정하셨다.
김지영 엄마 같은 엄마가 얼마나 있을까도 의문이었다. 딸을 챙겨주는 것을 넘어 같이 분노해주는 엄마. 은유 작가가 썼듯이 내가 아는 대부분의 엄마들은 자기 딸이 가부장제에 순응하며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때는 2014년이고 지금은 2019년이 되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영화 김지영은 여전한 미래를 그렸다.
현실을 그리려면 더 날카롭고 아팠어야 했고 가능성을 보여주려면 더 전투적이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