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지인들은 갑작스럽게 변한 나를 보며 얼마 전까지도 음악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던 인간이 어쩌다 이 지경으로 음악에 미쳤는지 묻곤 했다.
그때부터였다. 정당성을 만들기로 했다. 나라 건국이나 정권교체에만 정당성이 필요한 게 아니다. 40대 중년의 여자가 일상을 내팽개치고 무언가 빠지는 데에도 필요하다. "지금 내 모습은 갑자기 엉뚱하게 나타나지 않았답니다. 저는 말이죠… 원래…"
음악에 대한 열정과 감수성의 원천을 찾아, 내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해왔는지 과거를 떠올려보았습니다. 왜 성인이 되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면, 어렸을 적 얼마나 음악에 관심이 있었는지를 일단 추적하면서 말하잖아요. 저도 그러려고 했죠. 그런데....그러나! 내가 찾아낸 건 얼마나 음악을 사랑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그건, 전혀 다른 기억들이었습니다.
새로운 기억이 줄줄이 딸려 올라왔다. 첫 번째로 떠오른 기억이 취미였 다면, 두 번째로 발견한 기억은 일종의 공감각이었다. 공간의 온도, 햇살과 가로등의 노란빛. 목덜미를 스치던 바람의 결, 아늑 하거나 축축한 냄새, 서늘함과 뜨거움, 숨결과 체온, 웅성거리거나 날카롭던 소리 그리고 외로움까지.
저는 기억력이 형편 없는데,완전히 잊고 있던 시간들이 음악을 계기로 떠오르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 나를 형성한 기원이 아니라 잠시, 나에게 머물렀다가 사라져버리곤 하던 어떤 열정을 기억해 냅니다.그건 박혜윤 작가님이 써준 추천사처럼 '혼란, 실수, 고난'에 관한 이야기이자 실패와 이별의 기억이기도 합니다.
"내가 가진 열정만큼 인정받거나 성과를 이루거나 무언가가 되는 건 보통의 능력으로는 매우 드물다. .....집중과 몰입과 쏠림으로 일상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감정 조절 실패로 끝까지 질질 매달리다가 내가 질리거나 몰입한 대상의 변심 또는 변화로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들 또는 그들은 난데없이 삶으로 쳐들어와 나를 온통 채웠지만 썰물처럼 급작스럽게 빠져나간다. 그럼 아무도 알지 못하는 애도를 호되게 치러야 한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 쓸모 없게 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걸까.
의미를 다시 만드는 것도 아니고, 교훈을 찾아내는 것도 아니며,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고통 서사도 아니고, 그때가 좋았지라고, 회상하는 것도 아닌 이야기.
그 이야기를 써보았습니다.
"어떤 대상에 온몸이 사로잡혀 현실과 나를 분리해버리는 마법 같은 이 기분이 익숙하다. 왜 이리도 기시감이 드는 것인지. 이 열정의 정체는 무엇인지."
<숲속의 자본주의자>, <도시인의 월든>을 쓴 박혜윤 작가님이 추천사를 써주셨습니다.
쓸모없고도 이상한 열정을 "신나고 즐거운 일이라서가 아니라 살면서 겪는 혼란, 고난, 실수처럼 꺼리고 싶은 경험들에 깊이 빠져드는 데에서 오는 재미"로 읽어주셨어요!
그토록 미워하던 누군가가, 그리고 최선을 다해 외면하거나 피하던 관계가, 멀어져버린 무언가가 자신을 알게 해준다. 부딪히지 않았으면 결코 모른다. 타인은 나에게, 우리는 서로에게 구원이 된다. 문제를 해결하거나 도와줘서가 아니라 내 모습을 직시하게 해주어서.
나는 왕따
"어디에서부터 풀어야 할지 몰랐다. 우리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는 서걱거림을 감당할 수 없었다. 어색함은 언젠가는 희미 해지는 감정이고, 다시 만나면 쑥스럽게 웃으면서 어색했던 감 정도 과거로 슬그머니 보내고 모른 척하면 그만인데…. 그러나 나에게 윤은 지금 옆에 없더라도 한 번도 쉼이 없었던 관계였다. 그래서 어색함도 계속 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왕따 같은 건 당하지 않았고 늘상 붙어 다니는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지만, 윤을 내내 생각했다. 그 아이가 그리워서라기보다 마침표를 찍지 못해서였다. 우리의 이야기가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열일곱 살의 내가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것이 특별함이라면, 비밀은 확실히 그걸 보장했다. 비밀을 가진 자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누가 그랬던가. 부모에게 복수하는 가장 좋은 방법 은 부모가 모르는 비밀을 만드는 거라고. 부모에게 또는 학교에 복수하고 싶어서는 아니었지만 비밀은 누군가 나를 혼내도, 누군가 무시하거나 알아봐주지 않아도, ‘그래도 나에겐 무언가가 있어’라는 터무니없는 자신감을 줬다. 비밀 속에서 부쩍 성숙한 인간이 된 듯했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행동엔 제법 의연한 태도가 배어 나왔다. 이런 내 모습이 좋았다. "
애자로부터
"전쟁을 겪으며 화끈하게 몰락한 한 집안의 이야기는 매혹적이었다. 역사의 결과 값으로써 주어진 가난은 한 편의 잘 짜여진 서사처럼 꼭 들어맞았다. 그 불행은 너무도 정당하기에 개인적인 과오까지도 다 용서하고, 현재의 불행까지도 이해해줄 것처럼 보였다. ‘그때 사과 궤짝만 들지 않았더라면.’ 모든 지난한 세월을 한마디로 정리해주고 설명해주는 말.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우리 집안사람들은 그 말을 즐겨 썼다. 마치 그때가 이 집안의 새로운 시작이라도 되는 듯이."
Wise up
"대학에 입학한 후 모든 것에 핑계를 대고 있었다. 1년 내내 학과 공부를 하지 않고 학점을 2점대로 받는 것에 대해서도, 영화 동아리에 나가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런데 <매그놀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해주었다. 에이미 만의 목소리는 깨닫거나 알려고 하지 않을 거라면 포기하라고 다그치는 듯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무얼 알아야 할까.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을까. 어쩌면 그건 대단히 똑똑하고 실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건 실패를 예감하고도 감행할 때만 알 수 있는 건 아닐까. 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
오늘의 BGM
"밤 열두 시가 넘은 시각. 회사 근처 작은 공원에서 영과 조금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도 ‘페이크 트래블러’일까. 삶의 대부분이 되어버렸지만 온전히 나를 내던질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직장에서, 마음의 틈을 나누는 아주 작은 공간과 시간이 있다면 자신을 경멸하지 않을 수 있다. 훼손되어 가는 마음 한 구석에 손을 가만히 대며 나를 지킬 수 있다. 나는 맥주를 마셨고 그는 천천히 담배를 폈다."
책은 음악 에세이가 결코 아니지만, 각 에피소드를 써주게 한 음악들이 나옵니다. 이 음악들을 안다면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지만, 음악을 몰라도 전혀 글을 읽는데엔 큰 영향을 끼치진 않습니다.
다시, 피아노
"드디어 포기 당했다. 슬프거나 절망스러웠는가. 아니었다. 그토록 원하던 자유가 만들어졌다. 하고 싶은 일을 악착 같이 찾고 해내는 자유가 아니라 행복을 찾지 않아도 되는 자유. 화목한 가정이라는 판타지를 위해 낑낑대며 노력하지 않아도 될 자유. 배우자가 “내가 더 잘할게, 노력할게”라는 말을 하지 않아서 차라리 고마웠다. 희망고문은 끝났다. 아이에 대해서도 배우자에 대해서도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그러자 충만함을 애타게 찾던 빈 공간에 음악이 들어왔다. 음악은 쉼 없이 흘러 들어오고 다시 흘러나갔다. 무엇도 정체되지 않았다. 음악이 만든 흐름에 삶을 맡기기로 했다. 될 대로 되라지."
장마철과 휴가철에 한 숨 돌리며 읽기에 좋은 책이 될 거에요.
많이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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