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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동안 밀려 있던 청구서를 받았습니다

by 매실 Mar 23. 2025




10년 동안 밀려 있던 청구서를 받았습니다 


-미니린  





오후 4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오후다. 아파트 뒤 오솔길을 5분 정도 걷다가 숲길에 난 지름길을 통과하면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유치원이 보인다. 물웅덩이를 철벅거리며 뛰어다니기도 하고 처마 밑에 웅크리고 앉아서 빗물을 모으고 있는 아이도 있다. 노란 우비를 입은 조그만 여자 아이가 빗물을 삽으로 떠서 옆에 앉은 친구에게 내민다. 친구는 시원하게 쭉 들이키더니 끄덕이며 웃는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빗물을 마시는 건 익숙한 장면이다. 


유치원 담을 따라 돌면 낮은 유치원 정문이 있다. 문 앞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놀이터로 들어선다. 손이 너무 작아서 방수 장갑이 팔꿈치까지 올라와 있는 한 살배기와 눈이 마주쳤다. 웅덩이에 쪼그려 앉아 흙탕물을 참방참방거리더니 진흙 한 움큼을 쥐고 입을 벌리려던 그 순간이다. 나는 다가가서 온갖 표정과 손짓으로 “Nei, Nei 나이, 나이” (아니야, 아니야)라고 말한다. 멀찍이 선 유치원 직원들이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어깨를 들썩인다. 


‘계속 말려도 어쩔 수 없어요. 그러면서 크는 거죠 뭐.’



브런치 글 이미지 1



나는 한 살배기를 뒤로 하고 유치원 건물 주변을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첫째가 나를 알아 보고 뛰어온다. 비옷은 이미 진흙 범벅이고,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 있다. ‘안에 옷도 다 젖었겠는데’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아이의 표정을 보는 순간 나도 웃었다.


“오늘 뭐 하고 놀았어?”

“목욕 놀이했어!”

"재미있었어?"

“응!!”


첫째의 손을 잡고 둘째도 찾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다들 비슷한 비옷에 모자까지 덮어쓰고 있어서 어디에서 놀고 있는지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유치원 놀이터 구석, 키 큰 나무들 사이에서 동생을 발견한 첫째가 달려간다. 둘째를 찾는 미션의 승자는 늘 첫째다. 큰 바위를 사뿐히 올라타더니 자연스럽게 뛰어내리고 다시 달린다. 첫째는 동생을 보자마자 기겁하면서 다시 돌아온다.


“엄마, 지렁이가 엄청 많아!” 

“오늘도 지렁이야?”


 둘째가 나를 보더니 납작한 플라스틱 통을 들고 뛰어온다. 열댓 마리나 되는 지렁이가 동시에 꿈틀거린다.

 “엄마, 이거 봐. 내가 다 찾았어.”

 “많이 찾았네. 하루 종일 찾았어?" 

“응, 친구랑 같이. 지렁이 보내주고 올게.” 


우비를 입고 나란히 서 있는 두 딸을 보니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여동생 메이가 떠오른다. 귀여운 것들. 잠시 기다리라고 이야기하고 유치원 안으로 들어가서 아이들의 사물함을 확인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밖에서 놀기 때문에 여분의 옷과 속옷, 양말을 항상 준비해 두어야 한다. 오늘 젖은 옷가지와 도시락을 챙겨서 서둘러 챙겨 나왔다. 벽에 붙은 게시판에는 한 문장이 적혀 있다.


"오늘은 물웅덩이에서 놀았어요. 즐거운 하루였어요! 젖은 비옷과 장화는 잘 말려 주세요.” 


하원하는 길. 지렁이를 보면 둥글게 돌아가는 첫째와 지렁이를 맨손으로 집어서 숲에 놔주는 둘째를 옆에 꼭 붙들고 당부를 한다. 


“비 오는 날 물놀이를 하면 너무 재미있지. 그런데 빗물이나 흙탕물을 마시면 안 돼.”

 “왜? 유치원 애들 다 마시는데?” 

“음···. 그건 엄마랑 약속이야. 그리고 어린 아가들이 흙탕물을 마시면 말려. 많이 마시면 배 아프거든”

“응!” 


빗물도 마시고 눈도 먹으면서 자라는 것이 당연한 나라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내 아이는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한 시절이었다.






벌써 6년 전의 일이다. 두 살 터울인 딸들은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오슬로 근교의 공립 유치원을 졸업했다. 3세부터 6세까지 아이들 15명 정도가 한 반에서 함께 지냈는데 근무하는 어른은 하루에 3명에서 4명 사이였다.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한 사람인 리더는 한 명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시스턴트였다. 내가 아이들을 픽업하는 오후 4시면 한 반에 2명 정도만 남고 다른 직원들은 모두 퇴근을 한 후였기 때문에 리더와 직접 이야기 할 수 있는 날은 많지 않았다. 리더이건 어시스턴트이건 아이들을 픽업할 때마다 내가 묻는 질문은 늘 같았다.


“오늘 잘 놀았나요?”

“네, 잘 놀았어요” 


대화는 늘 짧았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하는 편인데 우리 아이들 반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하필 영어에 서툴렀다. 그들은 영어가 낯설고, 나는 노르웨이어도 영어도 잘 못하니 서로 멋쩍은 미소만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다치 않고, 아프지 않아서 근무자들과 크게 대화할 상황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유치원에 적응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오늘은 누구와 무엇을 하면서 놀았는지, 도시락은 잘 먹었는지 사소한 것들이 궁금했다. 다른 노르웨이 엄마들처럼 육아에 관해서 묻고 조언을 구하고 싶기도 했고, 근무하는 사람들과 친숙해지려는 노력의 하나로 나의 일상적인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 한국이나 노르웨이나 다정한 부모의 아이는 우유도 한 모금 더 주게 되는 것이 사람 마음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유치원에서는 한 학기에 한 번씩 그룹 리더와 부모의 상담 시간이 있다. 우리 부부는 영어로 상담을 진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남편은 노르웨이어를 몰랐고, 나는 노르웨이어보다는 그나마 영어가 나았다. 원어민 앞에서 어설픈 노르웨이어를 하는 것보다는 양쪽이 모두 제2 언어인 영어를 쓰는 것이 확실히 부담이 덜했다. 그래서 나도 시간이 있으면 노르웨이어보다는 영어를 공부했다. 


문제는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마지막 상담을 진행할 때였다. 리더의 손에 든 건 언어 테스트 결과지였다. 


“언어 발달 테스트 결과는 대부분은 괜찮은데요. 집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을 잘 몰라요. 예를 들면 '침대'라는 단어를 몰라요."

“아, 그래요?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까요?”

“언어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기 때문에 괜찮아요. 집에서는 한국어만 사용하는 거죠?”

“네. 그렇죠” 


유치원에서 노르웨이어를 배워오니까 걱정하지 말고 했던 주변의 조언들이 와르르 쿠당탕, 한 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말로 상담은 끝났지만 ‘신경을 좀 쓰시는 것이 어떨까요’라는 말로 들렸다. 


첫째의 유치원 상담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우리 부부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국제학교에 보낼 학비는 감당이 되지 않았고, 로컬 학교에 보내려고 1년 전에 대출을 크게 받아 이사까지 한 상황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을 먹은 후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노르웨이어 코스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한 학기 등록금이 24,000크로네. 당시 한화로는 430만 원이 넘는 등록비가 필요했다. [하루 4시간 수업, 주 4일. 과제 아주 많음. 언어 실습 과정 포함. 쓰기와 말하기 테스트를 통과해야 수강할 수 있음] 아는 언니가 다녀서 귀담아들어 두었던 언어 코스다. 


큰 아이가 태어난 후, 나름 노르웨이어를 공부하려고 시도하기는 했었다. 적십자에서 운영하는 무료 코스에 가보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외국인을 위한 언어 카페에도 갔었다. 꼭 돈을 내고 코스를 다니지 않아도 ‘나’는 언어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사실 코스비를 감당할 여력도 없었다. 노르웨이에서 외벌이로 4인 가족이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생존 챌린지였다. 높은 세금과 물가 때문에 맞벌이 가정도 월급날 일주일 전에는 ‘냉동 피자’만 먹는다는 말이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우리도 줄일 건 식비밖에 없다는 말을 늘 달고 살았으니 말이다.


다행히 남편은 내 결심에 토를 달지 않았고, 카드 단기 대출을 받아서 학비를 결제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부모 둘 중 대표의 자격으로 노르웨이어를 배우는 역할을 맡았다. 앞으로 아이들의 학교 숙제, 학부모 모임, 친구 모임 등을 모두 내가 맡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분명 육아의 연장선이지만 돈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게 했다. 






인텐시브 코스는 말 그대로 집중과 열정이 필요했다. 유럽 사람들이나 영어를 잘 하는 동양인들은 확실히 습득이 빠르고 수월해 보였는데 그들에 대한 질투나 부러움에 마음이 흔들릴 여유는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의무와 400만 원이 넘는 코스비만 생각했다. 육아 퇴근 후 남편의 예능과 드라마 공격을 막아내면서 매일 10시간 가까이 공부한 덕분에 4개월 만에 B1레벨의 언어 시험(Norskprøve B1) 합격 통지를 받았다. B1 레벨은 노르웨이의 영주권 자격 요건이면서 외국인으로서 일부 직업군에 종사하려면 필요한 최소 언어 능력 기준이기도 하다. 이 시험에서 통과하면 일상적인 대화, 직장 내 기본적인 소통, 공공기관에서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의 언어가 갖춰졌다는 의미다. 


하지만 리얼한 삶은 현장은 언제나 시험 성적과 무관한 법이다. 실제 사람들이 사용하는 일상적인 표현은 언어 교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 사람들과 부대끼며 대화해야만 익힐 수 있다. 예를 들어 엄마들이 자주 사용하는 “옷을 뒤집어서 입었네. 신발 끈이 풀렸네. 지퍼 올려줄까?”라는 문장은 언어 교재에 나오지 않는다.  


오슬로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때 나는 학생들의 일상적인 표현을 자주 고쳐주었다. "나는 학교에 가고 있어요"라는 말을 노르웨이 사람들은 "나는 지금 학교에 오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르웨이 표현인 "Jeg kommer til skolen."(야이 콤메르 틸 스콜른, 나는 학교에 오고 있어요.)라는 표현을 직역해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모국어가 개입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국어의 개입이 늘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학생들이 반복하는는 오류에 늘 용기를 주곤 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노르웨이어를 배우고 익히는 상황이 되니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꽤 컸다. “Jeg går til skolen.” (야기 고르 틸 스콜른, 나는 학교로 가고 있어요.)”라고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아차, 오고 있다고 해야지. 또 실수했군.’ 글은 수정할 수 있어도 말은 수정할 기회가 없다. 실수를 극히 부끄러워하는 나는 때마다 얼굴에 열감을 느껴야 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부끄러움을 참고 용기 내서 대화를 시도하더라도 한 단어의 발음 때문에 대화가 가로막히는 일도 많았다. 한 번은 옆집 할머니와 마주쳐서 주말에 뭐 할지를 이야기 나눈 적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토요일에 스웨덴으로 장을 보러 갈 거라고 말했는데 대화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한 시간 거리인 스웨덴 국경 마트로 장을 보러 가는 것인 드문 일도 아닌데 자꾸 되묻는 것이었다. 스~웨덴, 스웨!덴, 스웨덴~! 억양과 어조를 다르게 해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할머니가 “스위든(Sweden)? 스바리에(Sverige)?”라고 말하자 그제야 나도 눈치를 챘다. ‘아, 노르웨이 사람들은 스웨덴을 스위든이라고 발음하는구나, 스바리에는 또 뭐지?’ 노르웨이에서 사용하는 영어식 발음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달랐다. 게다가 노르웨이 사람들은 노르웨이를 노르게(Norge)라고 하고 스웨덴도 스바리에(Sverige)라고 한다는 것도 이때 알게 되었다.


말을 꺼낼 때마다 겪어야 하는 당황스러움, 부끄러움, 한심함. 두 언어의 차이를 발견할수록 사소한 오해를 만들까 봐, 너무 무지해 보일까 봐, 말을 뱉는 것이 점점 더 신중해졌다. 지금도 안타까운 것은 아이가 어렸을 때 노르웨이어를 배우고 사용할 기회가 더 많았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거리 두기가 기본 옵션인 북유럽 사람들이지만, 아이가 있을 땐 말을 걸고, 대화를 하는 것이 한 결 수월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버스에 타고 내릴 때 유모차를 들어주는 것은 기본이고, 문을 열어주거나 순서를 양보해 주기도 한다. 유모차를 끌고 다니면 이방인이기보다 육아를 하는 부모로 봐주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노르웨이어 코스에서 만난 중동 친구는 읽기와 쓰기는 참 못하는데 말을 정말 잘했다. 어떻게 말을 그렇게 잘하냐고 했더니 아이들이 어릴 때 유모차를 끌고 하루 종일 쇼핑센터를 돌아다니면서 노르웨이어를 배웠다고 했다. 쇼핑몰 의자에는 은퇴한 할머니들이 많은데 그들이 진짜 리얼 노르웨이어를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용기 낼 수 있었을까?


B1 시험 합격 이후엔 언어 공부에 대한 번아웃과 코로나 팬데믹으로 집에 갇혀 지냈고, 그 후에도 여러 해가 지났다. 큰 아이가 벌써 6학년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학부모 모임에서 미소 담당을 맡고 있다. 학부모 토론이 시작되면 주로 반론보다는 동의를 하고 눈치 없이 발표를 시키는 선생님이나 다른 부모들이 있을까 봐 늘 조마조마하게 앉아있다. 병원이나 관공서 예약을 잡으면 번역 앱의 도움으로 얻은 문장들을 미리 메모하고 연습해야 한다.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말들은 대충 분위기와 눈치를 통해 해결한다. 외국인들끼리는 괜찮지만 원어민 앞에만 서면 쪼그라드는 심장을 어찌할 수가 없다.  언제쯤 이 일상적인 긴장을 놓을 수 있을까. 



브런치 글 이미지 3



그리하여 노르웨이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곳은 우리 집이고 행복의 원천은 우리 가족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 음식 냄새가 나는 부엌, 한국어 책이 가득한 우리 집 거실은 포근하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놀고, 공부하는 것까지도 재미있다고 말해주는 아이들의 삶은 나에게도 행복이다. 동네 산책길과 언덕에 눈이 쌓이면 공짜로 스키와 썰매를 타고, 해가 지지 않는 북유럽의 여름 피오르에서 즐길 때는 깨끗하고 평화로운 이 나라가 사랑스럽다. 


그러나 여행을 하듯 잠시 살아 보기로 한 노르웨이 생활이 길어지면서 지난 10년간의 시간을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노르웨이에 도착한 지 1년이 되었다고 하면 “노르웨이어를 잘하네요”라고 말해주지만 10년이 되었다고 하면 “아. 그래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지금 겪는 부끄러움, 무너지는 자존감은 결국 내 선택들의 답장임을 안다. 육아 퇴근 후에는 남편과 함께 드라마를 보고, 한국인 가족들과 식사 모임을 가지고, 여행을 하며 지냈던 시간 후에 받은 청구서다.


아이들은 10년 내에 독립을 할 것이고, 남편은 좋은 직장을 다니면서 지금까지 두둑하게 세금을 냈으니 자기가 알아서 살 길이 있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장기간의 돌봄 노동 후에 내가 맞닥뜨린 것은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초라한 내 모습이다. 나에게는 ‘이주 여성’이라는 꼬리표가 여전히 붙어 있다.


빈 종이를 꺼내 끄적여 본다. 남편 떼고, 아이들 떼고, 나 혼자 세워놓고 셈을 해본다. 나는 이 나라에서 혼자, 독립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주 여성’이란 꼬리표를 떼고, 당당하게 나에게 만족스러운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 사회심리학자 타지펠(Henri Tajfel)는 인간의 언어는 단순한 소통 도구를 넘어 개인의 자아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언어 능력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한 인간의 존재감이며, 자존감이며, 나와 같은 이들에게는 처절한 생존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빈 종이에 끄적인 것들을 다시 바라본다.


줄줄이 적힌 나의  희망 사항들이 촉촉한 땅을 찾는 지렁이마냥 꿈틀거린다. 





- 미니린 / 퇴고로 완성하는 글쓰기 캠프, 2025,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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