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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Jan 05. 2018

엄마에겐 글쓰기가 필요하다  

[위기의 주부] 나의 언어가 생긴다는 것  




육아일기를 쓰는 이유 
  


오래된 상자를 열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대학시절까지 써오던 일기장, 편지, 스케치북, 빛바랜 사진이 들어 있었다. 날씨 좋던 어느 날 다 태우려 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 종이에 불이 붙지 않았다. 석유라도 구해와 부어야만 했다. 엄지손톱이 빨개지도록 라이터에 불을 붙이다 결국 포기했다. 추억상자 정리는 하지 않기로. 불이 붙지 않았다는 이유였지만 써온 글, 편지, 모두 아직 보낼 수 없었다. 마음이 울렁거렸다.      


고등학교 때 쓴 일기장을 열어보았다. 사춘기 소녀의 나풀대고 얄팍한 감성의 향연. 한껏 진지하고 사뭇 비장하게 썼지만 손발이 오그라들어 한 페이지조차 읽을 수 없었다. 다 지우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였지만 없앨 수 없었다. 당시엔 진실이었을테니.      






지금 쓰는 글도 그렇다. 수 십 년 지나 읽으면 한심할지도. 예쁜 자기 새끼 키우며 왜이리 죽는 소리를 해댔을까. 일이년 전 쓴 글도 낯설다. 아이 수면 습관이나 이유식 식단에 대해 왜 그리 진지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글은 기억을 소환하지만 감정을 재현해주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고만고만한 젖먹이들을 보면, 초보 엄마로서 겪은 숱한 시련은 사그리 잊고, "그 땐 힘든 것도 아닌데." 라며 막말한다.      


그러니 더 써야했다. 유아기가 끝나기 전에. 비록 고단한 하루의 기록이라 해도 행복하지만은 않은 기록이라고 해도. 훗날 조금이라도 겸손하기 위해. '나 때는 지금보다 더 힘들게 키웠어.' 라며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기 위해.      


유아기 기록이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아이에게 엄마가 온 세상의 전부인 시절.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루만지고, 엉덩이와 땀이 밴 손바닥, 정수리에 코를 박고 냄새 맡아도 되는 시절. 혀 짧은 한 마디 한 마디에 히죽히죽 웃고, 발걸음 하나에 인류의 진화 과정을 발견한 듯 열광하는 시절. 사람이기 전에 여자이기 전에 한 새끼의 어미로 짐승처럼 살아가는 시절. 이 시절을 잊고 싶지 않다.      


이제 네 살. 툭하면 안아달라해서, 쉴 새 없이 엄마를 불러 대서, 지긋지긋하다는 소리가 하루에 수 십 번 나오지만 이 시절이 나에게도 머지않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기록한다. 지금의 감각이 옅어지기 전에. 이 조그만 생명체와 겪는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슬픔과 분노까지도. 








*나를 드러내는 글쓰기 


  아이 낳고 2년 넘게 글쓰기를 손 놓았다. SNS에 새끼자랑하고 ‘좋아요’ 횟수 증가에 만족했다. 속엔 말이 쌓여갔지만 찬찬이 털어놓을 시간이 부족했다. 이사를 하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적응하고 나서야 시간이 생겨 틈틈이 글을 써 블로그에 올렸다.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 터라 어디까지 쓰고 어디까지 감추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모르는 사람들만 보면 차라리 편하겠는데 지인들도 보는 터라 젖가슴의 흉터 하나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이를 낳기 전 나는 서평을 주로 썼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가리고 객관적으로 치장한 해석을 내세웠다. 이제 치부를 까발리며 글을 쓴다. 나라고 타인의 시선이 두렵지 않겠냐마는 분만실에서 가랑이를 벌린 채 굴욕 삼종 세트를 겪은 후, 머리가 홱 돌아 여리고 작은 아이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같이 엉엉 운 후, 태어나서 처음으로 불행하다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어 본 후, 내려놨다. 누군가에게 잘 보여 평가받고 승진할 직장도 없겠다. 출산과 육아를 겪으며 인간관계는 쪼그라들었겠다. 그 덕에 누가 어떻게 나를 생각하든 그다지 신경 쓸 필요 없는 자유를 얻었다.      


 최대한 중립적으로가 아니라, 최대한 날 것 그대로. 세상의 진실을 파헤치진 못해도 나의 진실을 대면하며, 타인을 판단하기보다 자신에게만큼 있는 힘껏 정직하게 쓰려한다. 그것들이 시시콜콜 구구절절한 변명처럼 보이더라도, 비뚤어진 가치관이 드러나더라도, 한계와 능력의 바닥을 글쓰기로 드러내기로 했다. 
  
  







*쓰고 싶어 쓰는 건 아니다
  

‘글을 쓴다’ 는 자의식도 없었다. 글이라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걸로는 지워져가는 나를 붙들 수 없었고, 텅비어가는 정체성을 채울 수 없었다. 결심하고 썼다거나 쓰고 싶어 쓰지 않았다. 그저 써야만 했다. 답답할 때마다 갈증과 허기가 질 때마다 쌓인 말을 쏟아냈다. 기어코 토해내면 후련해졌다.      


속에 말이 차오를 때가 바로 글 쓰는 시점이지, 작정하고 쓴다 해서 써지는 건 아니었다. 하루 종일 글 쓰고 싶다며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나온 주말, 한 페이지도 쓰지 못하고 뱅뱅 돌았다. 분명 글쓰기엔 조용한 몰입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하루 종일 혹은 몇날 며칠의 시간이 주어진다 해서 써지는 건 아니었다. 군더더기 붙은 글만 쓰며 헛발질 하곤 했다.       


나는 서재가 없다. 이사 오며 내 책 오백여 권, 책장과 책상을 없앴다. 주방 싱크대 한 켠에 노트북을 펴놓고 방 청소하다 아이와 놀아주다 국을 끓이다가 문득 문장이 떠오를 때 다다다다 적는다. 단상들이 모이면 아이가 어린이집 가 있는 시간이나 잠든 시간, 얼개를 짜고 다듬어간다. 막간의 시간 그래서 더없이 달콤한 시간에 하는 감질나고 빠듯한 글쓰기가 팽팽한 긴장감과 간절함을 만들어줬다. 멍석 깔아주고 시간 주면 못했을 일. 툭하면 한없이 게을러지는 나는 한정된 시간, 불편한 자리에 갇혀 글을 쓴다. 

  
  


  




*엄마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놀이에 열중한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어찌 저런게 나왔을까,’ 감격스럽다가도, 돌연 떼쓰며 들러붙으면 ‘나보고 어쩌라고.’ 한숨 푹푹 나왔다. 이럴 때마다  감정의 실마리를 잡을 수 없어 무력감을 느꼈다.      


엄마들이 겪는 육아경험은 비슷한듯 보여도 저마다 깊이도 색깔도 다른데 그걸 표현하고 해석한 언어는 한정적이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다른 이들이 추상화한 언어를 받아 적고 있었다. "육아는 위대한 경험, 시간이 약, 인내하는 수 밖에, 모든 게 엄마 탓, 엄마가 행복해야....." 등.       


나는 보편적이라 믿어지는 거친 말들을 소화해내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듣고 읽을 때마다 속이 꽉 얹혔다. 그 말들은 나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았다. 내가 겪어내는 경험과 감정을 다른이의 판단과 해석에 맡기지 않고 나의 언어로 써보고 싶었다. 뻔한 소리로 맺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며 고치고 다시 쓰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면 눈 앞에 끼어 있던 안개가 걷히고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리고 얼어붙던 마음이 녹았다. 나의 언어로 쓴 문장은 나를 휘청거리지 않게 해줄 무기였다. 무겁기만 하던 엄마노릇도 글쓰기를 하며 많이 가벼워졌다.      


   단조롭고 지루하지만 쉴 새 없이 허덕이던 하루. 어서 밤이 찾아와 잠자리에 등 붙이기만을 바라던 하루에 글쓰기가 들어오며 기다림과 의욕이 생겨났다. 은밀하고 사치스러운 시간이 만들어졌다. 글쓰기는 구원일까. 모르겠다. 다만 쓰면서 이전 삶과 조금 달라진 건 알겠다. 사는 방편이 하나 생겼다. 그래서 전보다 조금은 수월해졌고 풍요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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