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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Mar 13. 2018

저녁 있는 삶을 위해 남편과 벼랑 끝에서 싸우다

'공동 육아 전선'은 인생을 건 싸움이었다  


 

 

1. 기다리는 사람, 마음 놓고 늦는 사람

 

차라리 처음부터 못 온다고 하지. 저녁 6시가 넘어 다시 물어봐서야 늦는다는 말이 돌아온다. 0.1%의 가능성에 기대를 건 내가 바보다. 여지를 남겨두고 시간 끌다 사람 실망시키는 패턴에 휘둘린다. 왜 망부석처럼 기다리는 사람이 됐나. 남편이 괘심하고 내가 한심하다.

 

다들 이렇게 산다니 원래 이런 거려니 하고 살자. 수 백 번 마음 먹었다. 그런데 억울했다. 누구 좋으라고. 참고 살면 죽을 때까지 모르겠지. 나는 끝까지 묻고 가능한 한 싸우기로 했다. 그 없이 못 살아서가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아이에 대해 아빠가 되라는 거, 우리가 이룬 가족이 가족답게 살기를 바라는 거다.

 

내가 더 힘들어라고 불행 배틀하며 아이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오만상 찌푸리며 사는 날들, 여기가 혹시 지옥인가 싶은 날들. 이렇게 우리가 늙어만 갈까 덜컥 겁이 났다. 남편과 대화가 간절했지만 남편은 늘 새벽에나 들어왔고 주말엔 잠만 자거나 가족 행사가 겹치면서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 어쩌다 퇴근 후 마주 앉으면 그는 눈을 감고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난 후 3년 넘게 이런 시간을 보냈다.

 

몇 년 전 어느 남성이 내게 해준 말이 떠올랐다. "강하게 나가야 해. 그냥 말해선 못 알아들어.“ 그때 이해하지 못한 걸 보면 살만 했나 보다. 이제야 알겠다. 남편만 벼랑으로 모는 게 아니라, 나 역시도 같이 벼랑에 서야 했다. 일찍 와 달라는 나의 요청에 확답 안 하는 남편에게 말을 던졌다. "지금 이야기 안 하면, 내일부턴 내가 없을 거야.”

 

 

2. 월급이란 쇠고랑을 차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남편은 9시 출근 6시 퇴근이 근로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2교대 근무도 , 응급상황이 수시로 발생하는 일도 아니며, 사업가도 아니다. 애초에 집에 올 수 없는 직장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는 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월급쟁이이다. 9시에 출근해서 자정 넘어 들어오는 14시간- 17시간 근무를 추가 수당 없이 상시적으로 한다.

 

그의 동료들은 모두 이렇게 일한다. 이번 프로젝트에 투입됐던 동료 두 명이 스트레스성 정신질환을 얻어 병가를 냈고, 집집마다 가정 파탄 직전, 누군가 과로사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를 탓할 수만은 없는 환경이란 걸 안다.

 

나 역시 퇴근이 늦고 밤샘을 수시로 하는 직종에 9년 간 근무했다. 남편과 업계는 달라도 근무 스타일이 비슷했기 때문에 프로젝트 마감이 닥쳐 2-3주 가량 늦게 퇴근하거나 밤을 샐 수 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유독 상시적으로 습관화된 야근, 프로젝트 시작부터 무조건 밤샘을 작정하며 몇 달씩 채찍질만 해대는 지옥 같은 근무를 시키는 곳이 있다.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일은 데드라인을 정해야 마무리 할 수 있지, 일이 될 때까지 하려면 매일 밤을 새도 모자란다. 원래 일이란 끝이 없기 때문이다. 일이 많다고 인력을 더 충원해도 근무시간이 줄지 않는 이유가 그렇다. 사장은 직원들이 군소리 없이 일하니 그리 부려도 되는 줄 안다. 이게 싫다면, 사회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던가, 회사를 나오는 수밖에 없다. 모두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한 채 월급이란 쇠고랑을 차고 죽도록 일만 한다.

 

 

pixabay.com




3.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서로를 죽도록 미워했다

 

남편이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 나는 지난 몇 달 간 속에 담아 뒀던 최후통첩을 했다. 회사에 계속 그렇게 다니려면 가족을 포기하라고 했다. 어차피 못 보는 얼굴이니 그냥 따로 살자고 했다. 기러기 가족들이 왜 아빠 버리고 떠나는지 알겠다. 애초에 그 아빠는 집에서 없는 사람이고 현금인출기였을 뿐이니 그렇게 떠날 수 있었다고, 이해한다고 했다. 남편은 지난 3년간 내가 아무리 애원하고 사정해도 꿈쩍도 안하더니, 가족이 깨질 수 있음을 명시해주고, 자기가 가족에게서 지워지고 있음을 알려주자 그제야 심각성을 파악했다.

 

남편에게 대단한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일주일 간 아빠 얼굴 구경도 못하다 주말이 되어도 아빠가 낯설어 엄마에게만 들러붙는 아이를 위해, 한두 번만이라도 일찍 와서 시간을 보내라는 거다. 그 사이에 나는 설거지를 하고 식탁 정리를 하고, 또는 남편이 아이를 봐주는 동안 내가 밀린 일을 하는 것, 딱 그만큼이었다.

 

일주일 중 겨우 두세 시간 가량의 시간 확보를 위해, 이 소박한 실천을 우리 공동육아 전선에 넣기 위해, 인생을 걸고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야근 금지법을 만들어 모든 회사에서 저녁 6시면 건물 불을 강제로 다 끄지 않는 한, 저녁 있는 삶은 요원했고,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우리 부부는 서로만 죽도록 미워했다.

 

남편이 칼퇴하고 달려온 날, 우리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이렇게까지 일하며 돈을 모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더 큰 집, 더 좋은 차, 자식 교육을 위해, 현재를 저당 잡는 게 맞는 건지. 그전에 가족으로서 끝장나면 이 모든 노력에 의미가 있을지.

 

남편은 직속 상사에게 "왜 그렇게 일만 하세요" 라고 물었는데 "아이가 원하는 걸 다 해주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단다. 그런데 정작 아이는 아빠 얼굴도 못 보며 지내고 아내는 우울증을 앓고 있단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아내, 자식한테 다 버림받으면요."라고 물으니 "왠지 나도 그럴 거 같아" 라고 대답했다고. 남편은 그건 아니라고 했다. 우린 가족은, 서로는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4. 당신 인생은 변하면 안 되는 건가?

 

시킨 일만 잘하는 착실한 직원이었던 남편은 스스로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법을 전혀 몰랐다. 게다가 변화나 모험을 극도로 꺼려하는 성격 탓에 뭘 하든 불가능성에 골몰했다. 1) 지금 회사를 계속 다닌다, 2) 부서 이동을 한다. 3) 휴직을 한다. 4)이직을 한다, 5) 새로운 분야를 공부한다.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같이 따져보았는데 1번을 제외하고 모두 안 되는 이유만 찾았다

 

남편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내가 대신 이력서를 써주겠나.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를 지지하고, 나는 나대로 내 할 일 찾는 것 뿐이었다. 나는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하겠고, 나도 일을 찾아 벌면 된다고 말했지만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누려온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모험을 하자니 아찔했고, 철없는 투정을 부리는 걸까 갈팡질팡 확신이 없었다.

 

한쪽에선 일자리가 없어 난리이고, 한쪽에선 일하다 죽겠다고 난리. 요즘 같은 불경기에 남편이 직장 그만두고 재취업 하지 못할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 회사라도 꾸역꾸역 버티며 다니는 게 맞다. 그러나 지금 같은 과로를 이어가면 다른 동료들처럼 골병들어 병원을 전전할 게 뻔하고, 운 좋으면 쉰 살까지 버티다 퇴직당할까.

 

한편 그는 자신이 변화를 모색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자주 토로했다. 남편이 처한 상황을 이해 못하진 않지만, 아이를 낳고, 커리어가 다 날아갔고, 모든 걸 다시 맨땅에서 시작해야 하는 내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다. 내 인생은 완벽하게 변해도 괜찮은 거고, 당신 인생은 변하면 안 되는 건가? 우린 같이 변해야만 한다.

 

매우 신중하고 보수적인 남편은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고 천천히 내디뎌갔다. "에잇, 더러워서 그만둬!" 하는 성격이 아닌 건 천만 다행일지 몰라도 나는 내내 속 터져 죽는 줄 알았다. 그리고 반 년 후, 그는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우리에게는 도움이 될만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타협해왔다.

 

회사 상사와 면담 끝에 부득이한 야근 대신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야간 재택근무'로 대체하겠다고 협상을 본 것이다. 야근을 성과지표로 여기는 조직에서 장차 승진과 연봉에 불이익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우린 같이 감내하기로 했다. 또 이직을 준비할 시간도, 아니 자기 삶에 무엇이 우선인지 숙고할 시간 조차 없던 남편은 리프레시를 위한 휴직을 두 세 달 내보겠다고 했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시도해보기로 하고 휴직 후 다시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pixabay.com


 

5. 서로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계속 싸우겠다

 

남편은 조금씩 그리고 확실히 달라졌다. 역시 그동안 못해서가 아니라 안 한 거다. 부탁하거나 잔소리하는 말은 잘 먹히지 않았다. 내가 끝없이 잔소리를 할수록, 울먹거릴수록 남편은 귀를 막고 듣지 않았다. 구구절절 시키기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해야만 하는 거였다.

 

삼 년 간 독박 육아하다 골병든 내가 수시로 아프면서 남편은 피할 수 없는 궁지로 종종 몰렸다. 어느 주말 아침. 몸을 꼼짝할 수 없어 두 눈 딱 감고 누워 있었다. 예전 남편이라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내가 밥 차려먹으라고 할 때까지, 내가 일어나 밥 안칠 때까지 아이에게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같이 쫄쫄 굶었을 거다. 하나 닥치니 하게 되었다. 이제 알아서 밥 안치고 아이 반찬 (비록 소시지볶음과 김자반이라도) 챙겨준다.

 

남편은 이른 아침이나 저녁, 하루 한 시간은 아이와 시간을 보내려 노력한다. 소파와 티비가 없는 우리 집에서 안타깝게도 남편은 도망칠 구석이 없다. 혼자 노는 법이 없는 아이는 발광하며 아빠에게 매달렸다. 아이가 아빠와 노는 동안 나는 설거지를 조금 여유롭게 마친다. 한 명이 아이를 씻기는 동안 한 명은 거실 장난감을 정리하고 남편이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동안 나는 못 다한 일을 마저 한다.

 

현대 사회에서 피치 못하게 핵가족을 이루었고, 그 작은 가족이 살아남아 가려면, 남편과 아내 둘이서 그들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둘이 상호 협조하지 않고 어느 한 사람의 덕을 통해 이루어내는 수월함은 일시적이다. 서로 같이 살기, 무엇보다 어울려 살기는 온갖 귀찮음과 번거로움을 같이 감당하는 일이 아닐까.

 

우리 부부에게 닥친 문제를 속 시원히 해결한 건 아니다. 일시적인 휴전 일지 몰라도 앞으로의 날들에 덮인 컴컴하고 암담하던 안개는 조금 걷어졌다. 서로 곪아가던 상처를 덮지 않고 드러내고 후벼 팠다. 고름은 아무리 아파도 짜내야 하는 거였다.우린 또 부딪힐 테고 절망할 테고 상처를 줄 테다. 하지만 힘이 닿는 한, 포기하지 않고 싸우기로 한다. 아늑한 포기 속에 살기보다 팽팽한 불화를 견뎌내며 살기로 했다. 원망하거나 후회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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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에 썼던 글인데 다소 수정해서 <직썰>에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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