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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지령 Oct 20. 2023

"누름이"

잊을 수 없는 음식

뜨거웠던 여름의 열기가 사그라들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나는 잠수를 했다가 수면 위로 나온 것처럼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조금 차가워진 공기에 내 피부는 오돌토돌 소름이 돋았지만 그 온도를 좋아했다. 여름과 가을의 중간 계절.

그 계절에 추석이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추석이 좋았다. 그 계절의 온도를 좋아하기도 했고, 며칠씩 연이어 쉬니 마음은 들떠 있었다. 추석 연휴 첫날에는 아침부터 고소한 냄새가 났다. 우리 집은 삼대가 사는 집이었다. 엄마와 할머니는 차례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아빠가 외아들인지라 우리 집에서 차례를 지냈기 때문에 손님이 많이 와서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누름이”였다. <아무튼, 할머니>의 신승은 작가가, 자신의 할머니는 참외를 “차미”라고 한다고.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할머니들만의 언어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할머니의 언어인 “누름이”가 있듯이.


내가 어느 정도 크고 나서 나는 “누름이”가 녹두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녹두전을 “누름이”라고 불렀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누름이”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누름이”였으니까. 아마도 할머니가 시집오기 전부터도 “누름이”는 쭉 “누름이”였을 것이다.

어릴 때는 그저 먹을 줄만 알았지, “누름이”에 정성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지 몰랐다. 우리 집에서 녹두전을 만드는 방식은 좀 특별했다. 녹두전 레시피를 검색해 보니 녹두를 갈아서 다진 돼지고기를 섞는데 우리 집은 부침가루도 섞지 않고, 100퍼센트 녹두로만 부쳤다. 그러다 보니 녹두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할머니는 녹두를 불리고, 녹두 피를 정성스레 걸러내었다. 녹두피가 물에 뜨기도 했지만, 녹두에 붙어있는 것도 많았다. 녹두 양이 많았기 때문에 녹두에 붙은 피를 하나하나 일일이 걸러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녹두를 맷돌에 갈았다. 지금 엄마는 믹서기에 갈지만 할머니는 꼭 맷돌에 갈았다. 할머니가 녹두를 갈 때면 나는 할머니 옆에서 맷돌이 돌아가는 것을 구경했다. 맷돌 구멍 속에 녹두를 넣으면, 녹두가 갈리면서 노란 콩물로 나오는 게 마냥 신기했다.

 "드륵 드륵" 맷돌이 돌아가는 소리도 좋았다. 돌과 돌이 맞닿아 돌아가는 소리는 기계음처럼 거슬리는 소리가 아니라 자연물이 마주치며 내는 화음 같았다. 너와 내가 조율하며 하나를 이루어 내는 듯이.


큰 다라에 녹두물이 차면 전 부치기에 돌입한다.

 바닥에 기름이 튀는 것을 방지할 요량으로 거실바닥에 전 부치기용 돗자리를 깔면 나는 잔치라도 벌어지는 듯, 기분이 들뜨곤 했다. 할머니가 달군 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국자로 녹두 반죽을 떠서 팬 가득히 두르면, 지글지글 소리에 나는 침이 꼴깍 넘어갔다. “누름이”에 들어가는 부재료도 신기한 형태였다. 부재료는 다시마, 김치, 고사리였는데, 부재료를 녹두 반죽에 섞는 게 아니라, 다시마, 김치, 고사리를 길게  준비해서 팬에 두른 녹두 반죽 위에 고명 올리듯 나란히 놓고 부쳤다. 고소한 냄새가 거실 가득 퍼지면, 할머니는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내어주듯이 바로 부쳐낸 것을 우리 삼 남매와 아빠에게 주었다.  아빠는 “누름이”에 막걸리 한잔을 했고, 우리 삼 남매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누름이”를 젓가락으로 푹 찢어서 먹었다.

집 안 가득했던 고소한 향이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겉은 노릇노릇 바삭하고, 속은 촉촉했다.

 

어느 날, 가족과 여행길에, 집에서 먹던 “누름이”가 생각나 식당에서 녹두전을 먹었는데, 녹두와 돼지고기, 다른 재료들이 섞인 맛이었다. 나는 먹으면서 아쉬운 마음을 내비치며 “100% 녹두로 만든 우리 할머니 누름이 먹고싶다.”고 중얼댔다.

먹고 자란 맛은 미각만이 아닌 오감에 새겨지는 건지 “누름이” 먹고 싶은 마음을 달래러 녹두전을 시켰는데, “누름이”에 대한 미련만 더  커졌다.


우리 집 “누름이”가 정성이 많이 들어간 것이라는 걸 알고 난 후부터 나는 “누름이” 부치는 정성만큼만 산다면 못해낼 것도, 못 이룰 것도 없을 것 같다. 삶에  누름이 같은 고소한 냄새가 날 것 같다.

콩을 불리고, 불려지기를 기다렸다가 하나하나 껍질을 벗기고 맷돌에 갈아서 하루는 꼬박 “누름이” 재료를 준비한다. 이튿날엔 허리를 필 새도 없이 반나절을 부쳐 낸 누름이를  집에 온 손님들 싸주고, 동네이웃들과  면 우리에게 남는 건 두어쪽. 우리에게 남는 게 두어쪽  뿐이어도 나누어서  마음은 더 넉넉했고, 넉넉해진 마음으로 우리는 행복했다. 정성껏 음식을 마련하고 나누는 행복과 즐거움을 보고 자라던 그 시간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을 부적처럼 품고 살게 한다.

 

이번 추석에도 “누름이”를 부쳤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부친 “누름이”를 먹을 때마다 어릴 적 명절의 풍경이 떠올랐다. 공기의 촉감, 고소한 냄새, 전이 기름에 부쳐지는 소리, 분주했던 집안풍경과 할머니.

엄마와 할머니가 함께 부쳤던 “누름이”를 이제는 엄마와 엄마의 며느리가 부친다. 엄마는 할머니가 그랬듯이 지금 막 부쳐낸 것이 맛있다며 뜨끈뜨끈한 것을  손주들에게 준다. “와 누름이다!” 둘러앉아 먹는 우리 집 아이들에게도 녹두전은 “누름이”다. “누름이” 속에 엄마의 시간이, 이제는 만날 수 없는 할머니의 시간과 어릴 적 내 시간과 경험이 조카들과 내 아이에게 연결되었다. 겹겹의 시간이 “누름이” 안에 있었다. 지층처럼 쌓인 그 겹겹의 시간은 사랑의 퇴적과 다름없다. 





*  엄마의 그림책

그림책은 삶과 죽음에 대해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할머니가 죽음을 유예하면서 할머니만의 비법으로  디저트를 만드는 것에 주목해서 소개하고 싶어요.

크리스마스에 먹을 디저트를 만드는 할머니에게 죽음의 사신이 찾아옵니다. 할머니는  크리스마스 빵에 들어갈 소를 완성하느라, 누가반죽을 식히느라 죽음의 사신에게 기다려달라고 하죠. 디저트를 완성한 할머니는 죽음의 사신을 따라가면서 할머니만의 레시피를 찰다 속에 숨겨두어요.  죽음을 유예하면서까지 할머니가 정성을 다한  팡도르의 맛은 어떤 맛이었을까요?

힘든 순간에도 삶을 반짝이게 할 만큼 달콤한 맛이었겠죠?^^


우리가 무심코 먹는 음식 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을까요? 이 그림책의 글작가인 <에밀리 젠킨스>는 "디저트라는 소재를 통해 어른과 어린이 독자 모두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다"고 작가노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 그림책에는 "과일 크림봉봉"(fruit fool) 이라는 디저트에 담긴  시대적  역사가 들어있어요. "fruit  fool"은  미국일부지역에서 후식으로 먹었던 디저트로 딸기류를 으깨어 생크림과 섞어 차게 식힌 디저트예요.

"산딸기 크림봉봉"을  여자들이 만들고도, 집안의 남자들만 먹는 모습, 인종차별, 성차별, 그리고 냉장고와 조리도구의 변화모습까지 시대의 흐름별로 다양한 차별이 변화하는 과정을 <소피 블랙올>은 그림으로 섬세하게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할 거리도, 봐야 할 그림도 많은 그림책이라 저희집에서는 너무 사랑하는 그림책인데요~^^

저희 집 "누름이"에도 들여다보면 여성의

삶이 보이거든요. 할머니와 엄마가 꼬박 준비하고 만들면서도 아빠와 저희에게 접시에  담아 먼저 주셨거든요. 할머니가 엄마에게, 엄마에서 딸이 아닌 며느리에게 물려지는 "누름이"레시피도 아들이 제사를 물려받는 풍습 때문이었겠지요.

원서제목은  "A  FINE  DESSERT"인데, 번역을 "산딸기 크림봉봉"으로해서 입맛을 살렸어요.^^

무척 근사한 번역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손으로 찍어먹으면 크림이 입속에서 봉봉 부풀었다가 사르르 녹을 것 같은 맛이 저절로 느껴집니다. 양푼을 핥아 먹을 정도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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