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머리 제이슨 Jul 20. 2023

언젠가 누군가가 로터리에서 노래를 부른다면

제주살이를 결심한 것은 2018년 여름이었다.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그 무렵 집사부일체 프로그램에 가수 강산에 선생님이 사부로 나온 적이 있었다. 방송이 나올 즈음에 이미 3년 넘게 제주 성산에 사는 중이었다고. 약간은 기이한 사부로, 자연과 벗 삼은 제주 라이프를 보여주는 강산에 사부의 모습이 재미있었던 방송이다.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깊은 밤중에 사부는 멤버들(이승기, 양세형, 육성재, 이상윤)을 데리고 나간다. '일드클럽'이라는 이름의 멋진 클럽으로 데려가 준다며. 멤버들은 늦은 밤 시골 한 복판에 클럽이 있다는 이야기에 의아해하며 따라나선다. 


하지만 차를 타고 가도 가도 인적도 없고 가로등도 없다.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만 펼쳐진다. 멤버들은 점점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강산에 사부는 약간은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길을 달렸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아무것도 없는, 2차선 도로 중간에 놓인 로터리였다. 로터리 가운데는 '양보(Yield)'라고 표기된 표지판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일드클럽의 일드는 Yield를 말하는 것이었다.


강산에 사부는 제주살이 초기, 연습실이 없을 때 그곳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조용한 시골이라 시끄럽게 노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늦은 밤, 인적이 전혀 없는 로터리에서 암흑을 벗 삼아 마음껏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진정한 자유 영혼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생각해 보면 제주는 한 인간의 자유로운 야성을 깨워 주는 면이 있다. '공백'의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 아닐까? 사실 제주의 밤길은 그렇게 안전한 곳은 아니다. 조명도 많지 않고 자연도 험하다. 하지만 원초적인 자아를 만날 수 있다. 정말 정말 아무도 없고 인간이라곤 나 혼자만 있는 경험. 인구밀도가 높은 우리나라에서 자주 하는 경험은 아니다. 


새벽 2시면 아무도 다니지 않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시골길의 로터리. 

'Yield' 표지판 하나를 벗 삼아. 

암흑 속에서 목청껏 노래를 부른다면.

가슴속에 무엇이 끓어오를지 상상이 가시는지? 


나는 야행성 인간은 아니고 얼리버드 타입이다. 하지만 새벽 산책을 나가 보면 비슷한 고립감. 그 고립감에서 오는 자유를 경험한다. 올레길 몇 군데만 가 봐도 비슷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이른 아침의 새소리, 파도가 찰랑이는 소리, 풀벌레 소리, 시원한 바람이 귀를 스치는 소리, 그런 소리를 유쾌하게 방해하는 내 발걸음 소리. 


그렇게 걷다가 해가 뜨며 하늘이 붉게 물드는 모습을 보면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정말 집중하면 해가 뜨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서, 다른 인간의 방해를 받지 않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깨닫는다. 위를 올려다보면 너무나도 큰 하늘 밖에 남지 않는다. 


내 짧은 글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느낌이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인생의 진짜 의미일 수도 있는. 그런 걸 느끼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자네는 이 땅의 기운을 버틸 수 있겠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