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혼자다.
좁은 왕복 1차선. 좌, 우에 서 있는 나무가 편백나무인지 비자나무인지 뭔지 알 수 없을 만큼 캄캄한 저녁. 나는 달과 함께 제주의 도로를 달리고 있다. 오늘은 때마침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 붉게 변한 달이 푸른 행성인 천왕성을 다시 가리는 희귀한 천문현상이 나타나는 날이라고 한다. 오늘 이후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는 200여 년 동안 볼 수 없다고 한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과 같은 달은 200년에 한 번 볼 수 있다는 거다. 나는 행운의 여신.
렌터카를 몰고 숙소에서 마실 와인을 사기 위해 마트에 들렀다. 마트 영수증으로 주차비 정산을 해야 하는데 마트 영수증을 습관적으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 역시 처음부터 이런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마트 진입 후 30분이 지나지 않으면 무료. 비록 30분을 넘기지 않으려고 주차된 차를 찾으려 와인 2병과 제주 감귤 술 1병을 양손에 들고 온 주차장을 뛰어다녔지만. 어쨌든 나는야 행운의 여신.
여행 싫어하는 내가 퇴사 1년이 지나, 이혼을 앞두고 혼자 제주도 9박 10일 여행을 왔다. 혼자 하는 여행도 처음이고 이렇게 길게 여행하는 것도 처음이다. 고난은 기회라더니 정말 그렇다.
1시간 30분을 달려 도착한 숙소는 아고다 최저가로 10분도 검토하지 않고 골랐던 탓에 tv도 냉장고도 없는 방이다. 순간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멍하게 침대에 앉아있었다. 나는 조용히 바이브 이용권을 결제하고 두 달 동안 듣지 않았던 음악을 듣기로 한다. 역시 고난은 기회다.
작은 방의 화장실 겸 욕실은 전면이 투명 유리로 되어있어 침대에서 씻는 모습을 훤히 볼 수 있었다. 물론 나는 혼자라 거리낌 없이 훌렁훌렁 옷을 벗고 샤워를 했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누군가 내가 씻는 모습을 보고 있어도 좋겠다고. 그런데 앞으로 내게 그런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함께. 나는 이제 혼자다. 앞으로도 영원히 혼자일 것만 같다. 이 방처럼.
‘길을 잃어버린 나. 가도 가도 끝없는’ 언제나 이 가사에서 울컥한다. 생각해보면 오래전부터 그랬다. 그래, 나는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tv도 냉장고도 없는 이 방에 오게 된 것은 어쩌면 원래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그리고 내가 이혼하는 것 또한 원래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그렇게 생각하면, 원래부터 넌 그렇게 살아가게 되어 있었어. 그리고 다음엔 이렇게 살아가게 될 거야.라고 누군가 내게 말해준다면 나는 그럭저럭 잘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내게 지시해준다면 나는 그대로 충실하게 그가 말한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학교와 회사가 그렇게 진저리 나게 싫었던 이유는 내 뜻대로 할 수 없었던 시간들 때문이었는데 지금,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시간들이 이토록 펼쳐져 있는데, 나는 그냥 남이 지시하는 대로 살고만 싶어 진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내 앞에 펼쳐진 이 시간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