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 일출봉-> 세화 해변-> 월정리 해변-> 따라비오름-> 표선 해변
내가 묵고 있는 숙소의 콘셉트는 아무래도 죄수의 방인 듯. 사방이 노출 콘크리트 스타일로 모든 배관이 밖으로 드러나 있다. 덕분에 투숙객들이 언제 배변을 하고 씻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주로 밤 12시에서 새벽 1시 사이에 샤워를 한다.
첫날에 와인만 퍼마시고 잠들었기 때문에 야멸찬 하루를 보내기로 한 나는 아침부터 ‘성산 일출봉’에 갔다. 말로만 들었던 성산 일출봉은 정말 줏대 있게 생긴 모습이었다. 주변 모든 풍경을 압살해 버리는 존재감. 나도 모르게 ‘우와 이것이 성산 일출보~옹?!’ 이라고 소리쳤다.
입장권을 끊고 성산 일출봉을 올랐다. 그의 정수리는 신비로웠고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분화구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어볼까도 했지만 이내 그만뒀다. 사실 나는 당혹스러웠다.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을 향한 내 마음이 생각보다 훨씬 더 쓸쓸한 것에 대해서 말이다.
‘세화 해변’으로 향했다. 해운대 해변에 익숙해서 그런지 세화는 해변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 힘들 정도로 작았다. 주변의 식당은 성큼 들어갈 만한 곳이 없었고 나는 조미료 맛 가득한 프랜차이즈 순두부찌개를 먹었다.
옆 테이블의 아줌마와 아저씨는 막걸리를 3병째 마시고 있다. 그들의 대화 주제는 필라테스를 할 때 단백질을 섭취하면 근육 돼지가 된다는 것이었는데, 아저씨의 그 믿음은 아주 확고했고 아줌마는 고개를 끄덕했다. 순두부를 다 먹어갈 때까지 단백질의 돼지력에 대해 말하던 아저씨는 ‘그래서 돈은 언제 줄 건데?’라는 아줌마의 질문에 말을 멈춘다. 그리곤 ‘술 한잔 사줬더니 또 시작이네’ 라며 자리를 피한다.
그가 꼬부라진 혀로 필라테스 여강사의 허벅지가 자기보다 더 굵다는 말을 뱉었을 때, 저런 남자는 열 트럭 가져다줘도 싫다고 생각했다. 벌건 눈으로 나를 계속 힐끔거릴 때부터 그가 나쁜 남자인 줄 알았다. 제삼자는 나쁜 남자를 기가 막히게 알아본다. 다만 본인의 남자가 나쁜 남자일 때는 애써 부정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줌마 힘내세요. 힘내자고요.
‘월정리 해변’에서 커피를 마셨다. 피곤이 몰려와 잠시 눈을 감았고 ‘지금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이런 걸 여행이라고 하는 건가?’가 비집고 나왔다.
예전에 누군가 ‘근데, 이 쌀국수가 맛있는 거야?’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본인 입에 맛있으면 맛있고 맛없으면 맛없는 거겠죠? 정답이 있나요. 개인 입맛은 다르니까요.’라고 말해줬었다. 멍청한 질문이라 생각했었는데. 내가 하고 있는 이런 걸 여행이라고 하는 건가요?라고 멍청하게 묻고 싶어 진다.
‘따라비오름’으로 갔다. 해 질 녘의 제주 오름은 혼자 가기엔 무시무시한 곳이지만 용기를 냈다. 오름을 향해 깊숙이 들어갈수록 아차 싶었지만 유턴할 길이 없다. 다행히 주차장에 사람들이 보였고 그들 대부분이 중년 여성들이라는 사실에 한숨 돌린다. 만약 그들이 중년 남성들이었다면 오름 오르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름을 오르는 동안 정상에서 일몰을 보겠다는 생각은 미친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랬다간 어둠 속의 오름에 영원히 갇혀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따라비오름은 오름의 여왕다웠다. 무서움에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올라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잠시. 내려가는 길을 헤매서 나는 어이없게도 울어 벼렸다. 결국 참고 있던 눈물이 이렇게 흘러나왔다.
표선 해변으로 갔다. 해변을 보겠다는 의지보단 그곳에서 저녁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눈에 보이는 건 광활한 모래사장과 롯데리아뿐이다.
여행 2일 차. 온종일 괴물에 쫓기는 사람처럼 소리 지르며 뛰어다닌 기분이다. 죄수 방 같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안도감이 밀려든다. 불 꺼진 캄캄한 방에 오도카니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앞 호텔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경찰들이 언제 나오는지 기다리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역시 나는 여행 고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