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싫어하는 사람의 나 홀로 제주 여행기 3

섭지코지-> 성산읍 조개 바당길

by 윤비

여행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제주를 일곱 번 갔다는 것은 그만큼 제주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중 여섯 번의 여행 모두 11월에 자행되었는데 이유는 단지 11월쯤에야 내가 어딘가로 떠나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뿐. 그러니 나는 11월의 제주 말고는 제주를 알지 못한다.

제주 여행 3일 차. 섭지코지를 간 것 또한 비슷한 맥락인데 단지 숙소 근처의 관광지였기 때문이었다. 입장료가 없어진 대신 주차비가 있다고 해서 블로그에 올라온 무료 주차장이라 소문난 곳에 주차했다가 주차비 오천 원을 더 내는 멍청한 짓을 해내고야 말았다. 결국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섭지코지 유료 주차장에 주차를 했고 겨우 천이백 원의 주차비를 냈다.

겨우 오천 원 때문에 하루 일정을 벌써 망쳐버린 기분이 들었다. 워워 가슴을 진정시켜본다. 내가 저지른 일이다. 예전에는 타인 때문에 가슴을 진정시켜야 하는 일이 많았다. 백수가 된 지금은 거의 모든 일이 나로부터 빚어진다. 훨씬 타격감이 크다.



폐쇄된 코지 하우스와 팔 번쩍 곰돌이
붉은오름


여기 뭔가 세기말 분위기다. 침침했던 날씨가 내심 아쉬웠는데 오히려 잘됐다. 죽으란 법은 없나 보네. 지붕에 올라앉은 곰돌이가 한쪽 팔을 번쩍 들고 나를 맞이한다. 빛 바랜 조악한 건물은 폐쇄된 지 오래되어 보였다. 한때는 알록달록 선명했겠지. 그렇다면 나는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 틀림없다.



겡이 두 마리(*겡이: 게의 제주도 방언)


본능적으로 사람이 덜 붐비는 곳으로 발걸음이 옮겨진다. 겡이 두 마리가 대치 중인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봤다. 집게발을 쳐들고 대치 중인 상황인데 발걸음은 느긋하다. 그냥 춤 추는건가.

섭지코지에서 겡이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내 옆으로 흡사 이탈리아 혼혈같이 생긴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다.


‘혼자 여행 오셨나 봐요?’

‘... 네.’

‘그럼, 사진 한 장 찍어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사사삭 나는 겡이처럼 그의 주위를 벗어났다. ‘수작’이라고 맘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의 고맙습니다는 그의 친절에 대한 감사라기보다는 잘생겨줘서 고맙다는 감사 인사에 더 가까웠다.



섭지코지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
머리채 휘날리게 하는 바람


예전부터 사람이 오지 않는 곳을 찾아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자주 가던 카페나 술집은 언제나 망했다. 점점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동했더니 풀숲에서 나를 발견하고 놀라 자빠져 죽겠다는 꿩 예닐곱 마리를 보았다. 어찌나 놀래던지 내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산속을 트래킹 하다 꿩 한 두 마리 보는 일은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꿩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꿩들은 유난히 겁이 많다.


섭지코지를 빠져나오는 길. 이 날씨에 반팔 티셔츠 차림을 하고 씩씩하게 걸어 들어오는 이국인이 보인다. 이 사람아. 그렇게 웃을 일인가. 자네 섭지코지로 들어가려면 겁나 걸어야 한다고. 여행 온 해맑은 이국인을 보면 측은한 맘이 든다.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작은 불행을 내가 미리 먼저 훔쳐본 기분이다.



오조리 마을
히끄


광치기 해변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오조리 마을 입구로 향하는 표시판이 보인다. 내게 ‘오조리’라는 것은 ‘우주 대스타 히끄’와 동의어인데, 그는 오조리에 사는 햐얗고 포동포동한 고양이이다. 히끄를 생각하며 걸었다. 하지만 나는 제주 마을이 이렇게 미로 같은 줄 몰랐던 것이다. 나는 영원히 이 마을에 갇힐 것만 같아서 정신 나간 여자처럼 온 마을을 뛰어다녔다.





걷다 보니 이 길이 ‘성산읍 조개 바당길’의 일부라는 것을 알았다. 기존에 보았던 제주와는 조금 다른 풍경들이 펼쳐진다. 고요하다. 지형 특성상 바닷물이 고여있어 그 위에 해초 더미들이 그득하다. 습지 같은 느낌이 든다. 음침하고 조용해서 철새들이 자주 찾는 곳 같았다. 여기서도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야말로 물 위를 빠르게 달려 나가는 기적을 행하는 논병아리를 보았다. 엉덩이가 말도 못 하게 귀여웠다.

숙소로 돌아왔다. 어제처럼 괴물에 쫓기듯 뛰어다니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시원한 맥주 한잔이 절실해서 근처 술집의 문을 주정뱅이처럼 흔들어댔는데 다들 영업 전이다. 결국 고기 국숫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식욕이 돌지 않아 거의 남기고 일어나려는 찰나, 단감을 깎는 사장님의 모습이 보인다. 혹시 내게도 한 조각 주시려나 기다려봤는데, 아니네. 얼른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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