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싫어하는 사람의 나 홀로 제주 여행기, 마지막

용문사 -> 천왕사 -> 관음사 -> 이호테우해변

by 윤비

여행 첫날, 거지 같은 숙소 침대에 망연자실 앉아 내가 이 여행을 끝낼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그냥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까?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벌써 마지막 날이다.


성산일출봉 일출을 끝내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나는 숙소를 떠났다. 관세음보살. 마지막은 제주 사찰 투어다. 먼저, 세화 해변 근처 용문사를 찾았다. 이곳은 여행 첫날, 해변 도로를 운전하다 발견한 곳으로 여행이 끝나기 전에 들러야지 했던 곳이었다.


법당에 들어가 절을 하고 나오는데, 절을 관리하시는 아주머니가 다짜고짜 15년을 쓰려고 했던 본인의 핸드폰이 현재 박살이 나서 고작 8년 차에 화면이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내게 푸념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바로 도망쳤겠지만, 나는 8년이면 오래 쓰셨는데 이제 바꾸셔야겠어요라고 대꾸해주었다. 아마도, 그녀는 오래간만에 대화 상대가 나타나서 제일 하고 싶은 말을 바로 내뱉은 것이겠지.




드디어 가고 싶었던 천왕사로 갔다. 천왕사는 기대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 이러다 비구니가 되는 걸까. 사찰을 한 바퀴 돌고 대웅전이 조용해졌을 때 들어가 절을 하고 앉아서 명상했다. 역시 절이 최고다. 마음의 평안을 느낀다. 어떤 아주머니가 시주할 쌀을 어디다 놓아야 하는지 내게 물어본다. 이것은 말이다, 그만큼 내가 절에 친숙한 인간으로 보인다는 것 아닐까. 어딘가에 익숙해 보인다는 것. 지금 내게는 중요한 일이다.

절을 빠져나올 때쯤, 진민영이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어떻게 내가 제주 여행 마지막 날인 걸 알고 기가 막히게. 권나원이 내가 우도에서 자전거 탈 때 기가 막히게 전화한 것처럼. 내게 전화를 할 생각을 하고 전화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놀랍고 고마운 일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잃은 게 없다. 내 주위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뿐이고 내가 두려워하는 미래는 아직 들이닥치지 않았다.




사찰 투어의 마지막은 관음사. 6 년 동안 축축하고 깜깜하고 숨 막히는 동굴 안에서 수행했던 스님의 심정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어떤 절박함이 있었을까. 대웅전에선 한참 기도 중인데 염불 외는 스님의 발성과 호흡이 너무도 완벽해서(물론 무슨 내용인지는 알지는 못한다) 절로 탄성이 나온다.


나와 함께 절 안으로 들어온 레즈비언 커플은 아직도 사진 찍기에 열심이다. 연인을 껴안아 들어 올리고선 너 언제 이렇게 살이 찐 거야?라고 말하는 눈빛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 살이 쪄도 마냥 사랑스러운가 보다. 보기 좋구나. 젊은이들이여.


나는 더 이상 욕심내지 않고 공항 근처 이호테우 해변으로 향했다. 아직 한 끼도 먹지 못했다. 4시쯤 1인분이 가능했던 한치물회를 먹었다. 단체 손님들은 꽤나 취한 듯했고 말투에 애교가 섞인 여자가 대화를 주도해 나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그녀의 남편은 불안해 보인다.



카페에서 책을 읽고 일몰이 질 때쯤 밖으로 나가 걸었다. 이 해변은 주로 낚시 배 들이 모여드는 모양이다. 저 멀리 고깃배들이 반짝반짝한다.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면서 찔찔 울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 달 같고, 별 같구나. 달과 별을 따라 등대까지 걸었다. 그곳에서 삿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유튜버를 만났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는 것 같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제주는 깜깜했고 그 사이로 차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나도 저렇게 어둠 속에서 움직였겠지. 내가 다시 제주를 찾을 수 있을까. 그때도 나는 혼자일까. 비행 내내 깜깜한 하늘과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바다에 낚시 배들이 빼곡히 떠있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이렇게 흐르고 있었구나.

12시가 넘어 새벽 1시를 향하고 있는 시간 집에 도착했다. 이곳을 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집은 폐허 같았다. 내가 아끼고 놓치고 싶지 않았던 공간이 이랬던가. 내 존재가 생각보다 따뜻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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