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싫어하는 사람의 나 홀로 제주 여행기 9

소금막 해변 -> 표선해변 -> 신산리 마을

by 윤비

한라산 등반은 역시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몰랐지만 내 몸은 알고 있었다. 밤새 온몸에서 비 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내 몸은 어떻게든 회복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조금의 힘이라도 보태주고자 이불을 돌돌 감고 잠을 청했다. 이 숙소는 정말 최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침구 하나 만은 맘에 든다.


조식, 냉장고, 전기 포트, TV도 없는 이 숙소를 그럭저럭, 아니 어쩌면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며 보냈다. 잊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뭐든 그래,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버틸만해.


오늘의 첫 번째 목적지는 소금막 해변. 표선 해변 옆에 붙어 있는 조그만 해변이다. 관광객이 잘 찾지 않은 곳이라는 이유로 이곳을 목적지로 정했다.



역시 그곳엔 사람이 없었다. 순간 엔도르핀이 솟구치는 걸 느낀다. 혼자 아무 소리나 지껄이며 해변을 거닐다가, 멀리 롯데리아가 보이는 것을 보고 이곳이 표선 해변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소금막 해변은 워낙 작아서 내가 표선 해변으로 넘어간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는지가 같은 곳을 다르게 느끼게 한다. 나는 여행 2일 차에 표선 해변에 갔었다. 그때 표선은 내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었다. 울고만 싶었었다. 하지만 오늘의 표선은 그야말로 더 이상 그 무엇을 바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해변이었다.

아름답다는 것. 예쁜 것과는 다른 것. 아름다움을 알게 된 지금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래,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해운대에 살면서도 바닷가에서 맨발로 걸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건 매우 귀찮은 행위이기도 했고 관광객이 아니라 현지인이라는 우쭐함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니까 관광객 같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나 우스운 생각이었던가. 표선에서는 망설이지 않고 양말을 벗고 해변을 걸었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모래의 감촉. 뭐든 지금 여기서 하고 싶은 것을 당장 하자는 생각을 한다.



언제까지고 해변에 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똥이 마렵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각재기국을 먹으러 가서 똥을 해결하기로 한다. 각재기국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이제야 입맛이 살짝 돌려고 하는데 여행 막바지라니 아쉽기만 하다. 뭐든 이별이 다가오면 아쉬운 법이다. 아쉬운 것은 이별인가? 사람일까?



라테가 굉장히 맛있다는 카페를 찾아갔다. 문이 닫혀있다. 역시 제주. 제주는 공지하지 않고 문 닫는 일이 빈번하다 들었는데 직접 당하고 보니 어쩐지 즐겁다. 그 마음. 그 자세. 나는 배우고만 싶다. 덕분에 신산리의 멋진 카페를 갈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이곳도 커피는 똥물같았지만.(커피 식탁에서 마셨던 라테 같은 라테를 마시고 싶다) 잠시 눈을 붙이고 책을 읽었다.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 있던 사람들이 사실은 서로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 그걸 깨달은 뒤에 서로를 낯설게 바라보며 타인이 되어 가거나 관계를 돌아보며 무지와 오해에 대해 짚어 가는 서사는 읽고 쓰는 것 모두 좋아한다. 그것은 아무리 가까워도 알 수 없는 타인의 순간을 인정하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는 일인 동시에 인물이 자신의 진짜 얼굴을 들여다 보고 확인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밤은 괜찮아, 내일은 모르겠지만 –서유미)


나는 또 운다. 에라 모르겠다. 슬퍼서 우는 건 아니다. 어제의 내 생각과 기가 막히게 똑같은 생각이라서 운다.


카페 안의 손님들은 대부분 커플이다. 사귄 지 얼마 안 된 커플들은 그동안의 여행 사진을 같이 보거나, 서로 만지작거리고 오래된 커플들은 대화 없이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고 말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무 말 없이 혼자 바다를 보는 내가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카페를 빠져나와 신산리 동네를 산책했다. 동네 개들이 무료해 보여서 찡하다. 개들과 장난치고 하하하핫 그들의 가슴팍을 마구마구 간질어 주고 싶지만, 우리 쫄랑이가 떠난 지 이제 9년. 개들의 감촉이 이제는 낯설게 느껴지고 큰 개들이 조금은 무섭다. 익숙함과 멀어진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오늘까지 나는 함덕부터 표선까지의 모든 해변 도로와 포구를 돌아보았다. 해변 도로를 달리다가 맘에 드는 장소가 나타나면 주저 없이 차를 세우고 주변 동네를 산책했다. 혼자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여행이었다. 감사한 일이다.


여행 싫어하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건방지게 여행은 혼자 하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을 한다. 여행 첫날 무엇을 할지 몰라 괴물에 쫒기 듯 뛰어다니다 숙소에서 엉엉 울던 것을 생각하면 좀 어이가 없지만.


지하까지 뚫고 들어갔던 자신감이 어느덧 지상으로 빼꼼 고개를 들었다. 이것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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