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 삼다수 숲길
제주도 여행을 결정하자마자 한라산 성판악 코스를 예약했었다. 사실 단조로운 성판악 코스보다 관음사 코스를 예약하고 싶었지만 나를 믿을 수 없었다. 성판악 코스를 완주할 자신도 없었으니까.
주차장이 협소하다고 해서 근처 마방지 주차장에 주차하기 위해 일찌감치 출발했다. 덕분에 성산 일출봉을 백미러로 힐끔힐끔 구경했다. 숙소에서 성판악 코스 초입까지 가는 길은 50분쯤 걸렸는데 제주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코스의 운전은 즐거웠다.
김밥 1줄, 생수, 귤 2알이 들어간 작은 가방을 어깨에 두르고 경량 다운재킷에 레깅스, 운동화를 신었다. 등반객들 모두 제대로 된 차림새를 하고 있어서 조금 위축되었다. 이제 등산화 정도는 있어야겠다.
7시 40분에 입산했다. 진달래 대피소에는 12시까지 도착해야 정상으로 오를 수 있고 정상에선 13시 30분에 하산해야 한다. 속밭 대피소까지는 산책하는 기분으로 올랐고 사라오름 입구까지도 수월했다. 심지어 진달래 대피소까지도 힘들지 않아서, 어라? 혹시 나.. 등산 천재? 진달래 대피소까지 3시간이 걸린다고 했으나 나는 2시간 만에 올랐다.
고비는 진달래 대피소에서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었다. 유난히 바윗길이 많아서 등산화를 신지 않는 나는 발바닥이 아프기 시작. 아무래도 편도 9.6km의 긴 코스이다 보니 체력도 점차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1시간 만에 정상 도착.
백록담 비석에는 이미 사진 찍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져 있다. 당연히 사진은 찍지 않았고 백록담만 담아왔다. 어찌나 바람이 거칠고 차가운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바람 불지 않은 구석 자리에 앉아 김밥을 꺼내 먹었다. 다들 사진 찍기 바쁘고 통화하기 바쁘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다. 김밥을 꼭꼭 씹어 넘기며 말없이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을 만끽했다. 그제야 긴장감이 풀린다. 내가 올라오긴 왔구나. 진짜 백록담을 보고야 말았어. 잘했다.
옛날 사람이라 한라산 백록담 하면 ‘내 이름은 김삼순’의 삼순이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한라산에 오르던 장면이 생각난다. 정상에서 삼순이를 기다리던 현빈도. 나를 기다리던 백마 탄 왕자님은 없었지만 내가 백마 탄 왕자님을 원했던가? 남자라면 지긋지긋하다. 나는 섹스도 하기 싫은 여자가 되었다.
정상은 추워서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역시 좋은 건 잠깐이다. 내려가는 길은 한결 여유롭다. 어린 학생들이 내려오는 내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외국인도 인사한다. 안뇽하세요~ 나도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내 생각은 오로지 최대한 평편한 바위를 디뎌야겠다. 축축한 곳은 미끄러질 테니 피하자는 생각뿐이다. 바윗길이 나타날 때마다 절망한다. 그렇다. 성판악 코스의 가장 힘든 점은 바로 바윗길. 나무 계단이 나타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렇게 하산하는데 2시간 30분이 걸렸다. 한라산 등반은 총 5시간 30분의 시간이 걸렸다. 앞서 찾아본 자료에서는 총 9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했었다.(아마도 눈 올 때 한겨울에 이 정도 걸리지 않을까) 역시 나는 등산 천재가 된 것이 틀림없다. 다음엔 장비를 제대로 갖춰서 한겨울 관음사 코스에 도전하리라.
체력이 남아돌아서 삼나무 숲길을 찾았다. 와. 난 이곳에 온종일 있을 수 있다.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싶은 아쉬움이 들었다. 깜깜한 제주 숲은 나 같은 쫄보는 오줌 쌀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있었다는 건, 그만큼 좋았다는 것.
삼나무가 있는 곳은 흠~~ 하고 들숨을 쉬면 폐에 뾰쪽뾰쪽한 공기가 콕콕 찌르듯이 내 몸 안으로 들어온다. 그 차가운 공기가 참으로 좋다. 살아 있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나는 한결같이 길쭉하고 올곧고 뾰쪽뾰쪽한 것을 사랑한다. 언제나 그렇다. 둥글둥글한 것을 좋아한 적이 없다.
숙소에 도착했다. 몸을 혹사시켰기 때문에 흑돼지를 먹으러 갔다. 돼지도 아니고 흑돼지라고 좀 더 구체화되면 먹기가 더 미안해지지만 1인분을 파는 고깃집은 흔치 않은 데다가 그 집에서 제일 비싼 메뉴를 먹어주고 싶었기에 흑돼지를 먹었다.
흑돼지는 맛이 없었고, 사장님과 삼춘은 친절했다. 사장님은 나의 숯불이 불타오르자 맨발로 우당탕탕 뛰어와서 불 조절을 해주셨다.(미안합니다. 원래 이런 줄 알았습니다.) 옆 테이블에 앉은 할머니 직전의 아주머니와 이미 할아버지가 된 남자가 나를 계속 쳐다본다. 사실 아까부터 아주머니가 할아버지한테 오빠, 오빠 하는 게 영 거슬렸다. 그래, 오빠가 맞으니까 오빠라고 하는 건데 나는 그 누구에게도 오. 빠.라고 말해 본 적이 없는 인간이라.
아무튼, 혼자 한라산을 오르고 흑돼지를 구워 먹는 여자. 괜찮지 않나?